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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하고 부흥하자(1) /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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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변화하고 부흥하자(1)
성경본문 마태복음 9:14-17
설교내용

  변화의 시대

  “성전건축으로 변화하고 부흥하자.” 우리 교회의 표어가 한국교회의 화두입니다. 지금 세모에 수많은 좌담회, 대담 프로그램에서 한결같이 논하고 있는 화두가 변화입니다. 정부가 변해가 된다, 정당이 변해야 된다, 기업이 변해야 된다, 대학이 변해야 된다, 군대가 변해야 된다. 그리고 교회가 변해야 된다 이렇게 모두가 변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변화를 해 왔습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나쁘게 변하는 것, 또 하나는 좋게 변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고정은 없습니다. 이 해 아래는 그대로 유지되는게 없습니다. 나쁘게 변화든지, 좋게 변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두 형태로 늘 계속돼 왔는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전에 선지자들 입으로는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본문 16-17절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며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되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변화의 개념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변하지 않는 새 것입니다. 포도주는 변하면 변질됩니다. 이 새 포도주는 변하면 안됩니다.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이 새 포도주에 가장 실체적 본질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새 생명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새 것이 되는 이 본질,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입니다.
  새 부대는 변해야 새 것이 됩니다. 부대는 안 변하면 낡아집니다. 변해야만 새 것이 됩니다. 우리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지식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방법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변해야 됩니다. 이 부대는 변해야 됩니다. 안 변하면 부대는 낡아집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새 것, 변하지 않아야 새 것이 되는 포도주와 변해야 새  것이 되는 부대가 절묘하게 만나는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 우리가 믿는 이 복음,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변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되고, 새 부대는 변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됩니다. 전자는 파수적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동시에 일어나야 됩니다. 지키는 파수적인 몸부림과 적극적으로 행하는 몸부림, 지키는 것과 행하는 것,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만 새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변화의 경향

  한 3년 전만 해도 21세기는 이렇게 변한다 해서 일곱 가지를 가지고 논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대로 변해갑니다만 지난 1년 동안에 이 지구촌의 변화에 가장 크게 몰아쳤던 세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화시대입니다. 이제는 이 세계화가 얼마나 실감이 있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는 이제는 식생활도 안됩니다. 우리 식탁에 들어와 있는 이 세계의 농산물, 축산물,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이 모든 환경이 이제는 세계의 것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것도 세계로 다 나갑니다. 이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한 가족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화에 아무도 역행을 할 수가 없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고령화시대입니다. 지금 고령화시대를 우려하고 염려하던 때가 15년 전입니다. 15년 전의 미래학자들이 고령화시대를 많이 예언을 했는데 이제 도래했습니다. 이제 고령화는 우리 사회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현상으로 다가옵니다. 지금까지는 고령화도 고령화대로 그대로 별 영향이 없었지만 이제는 가정마다 노인 때문에 돈을 써야 되고 시간을 써야 되고,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노인 때문에 이제는 소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이제는 노인병원이 필요하고 노인을 위한 온갖 프로그램이 따라와야 되고 교회도 노인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향후 10년을 내다보면 이 고령화시대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양태로 다가옵니다. 고령화가 점점 가까이 우리 사회에 큰 이슈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전문화시대입니다. 이제는 전문화가 안 되면 살지를 못합니다. 전문화가 안 된 사람들은 이제는 다 밀려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쓰레기를 치워도 전문성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아무렇게나 해 가지고는 일이 안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지금 세 가지 경쟁을 하고 있고, 이 지구촌이 이 세 가지 때문에 지금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첫째가 부요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벌이를 추구하는 욕구, 잘 살아보겠다는 욕구가 온통 이 지구촌에 생존경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부자들이 많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요의 욕구가 우리 사회에 지금 굉장합니다.  두 번째는 휴가문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휴가를 값비싸게 고품질로 할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사업하는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호텔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펜션이 많이 들어서서 신혼부부들이 펜션으로 많이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고급정보화 시대라는 것입니다. 국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고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고급정보를 얻는 것이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R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이것이 더하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북한을 이기는 길은 북한에 대한 고급정보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한 고급정보가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내면의 변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변화에 대해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첫째로 우리가 변화라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내면의 변화입니다.
  로마서 12장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중심의 축이 변하지 않으면 그 다음 것이 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 끝까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글과 사도들의 글 속에 그대로 담고 있는 이론입니다.
  에베소서 4장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것을 버리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으려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변해야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도 합니다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일은 중심이 변해야 됩니다. 이 축이 안 변하면 변화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잘 강조합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확인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내용의 초점을 잘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2-4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일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두 번째, 6-8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세 번째, 20-21절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황금같은 가르침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제를 은밀하게 해라,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을 은밀하게 하라, 이 세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구제의 내면화입니다. 기도의 내면화입니다. 물질생활의 내면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를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강조한 말씀은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하라는 이 말씀의 문맥의 뜻은 본질을 살려서 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살려서 구제하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구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물질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중요한 개념을 하나 발견하기 바랍니다.

  변화의 의미

  변화는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본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탈선하고 있는 것, 자리가 빗나간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의 기준입니다. 어디로 변할 것이냐 라는 변화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받으시는 구제, 그 분이 들으시는 기도, 그 분이 상주시는 물질, 그것을 제자리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본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변한다 라고 하면 세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는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게 변화의 목표요 기준입니다. 구제, 은밀하게 하라, 기도, 은밀하게 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것은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말인데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본질이 살아있는 일은 드러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구제는 아무리 드러내도 그것은 인간이 교만하지 않고 인간이 영광을 안 받습니다. 구제의 본질을 가지고 구제하는 것은 드러날 때 모범이 됩니다. 모범은 드러나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받아지지 아니한 것이 드러나면 그 모범은 우리를 헤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을 보고 사람이 보는 데서 기도하지 말라, 은밀하게 골방에서 들어가서 하는 드러내지 않는 기도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주제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아주 기본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구제인데 이 구제는 사실상 순교적 개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새 예배당을 지어놓고 새 예배당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야겠지만 전도는 구제의 개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구제를 하듯이 전도의 구제를 담아서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비는 구제금과 같은 개념입니다. 복음을 주기 위해서 포장하는 게 구제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그것만 구제가 아니고 복음을 포장하는 물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쓰는 물질이 전부 구제의 개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일, 물질을 사용하는 일, 이 세 가지가 지상생활의 크리스찬의 삶의 주축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찬 의사 가운데 한 분은 의사로서 의료행위를 함으로 돈을 벌지만 그는 복음의 의미를 담아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돈 번 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이 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전도의 놀라운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의료인이 번 돈을 복음을 위해서 써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위선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전도에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도록 포장을 잘 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선물도 포장이 어울리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의 포장을 잘 해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구제입니다. 구제가 베푸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내 기도생활에 얼마나 되겠는가? 여러분의 기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기도의 본질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기도의 제자리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거기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가 중언부언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보물이 하늘에 쌓아지는 그때 우리 지상의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땅의 것만 위해서 살면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보물을 쌓는 행위를 해야 우리의 물질생활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험해 보십시오. 하늘의 보물을 쌓는 물질을 다루어 보십시오.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의 유전자

  교회성장학자 중 한 사람이 ‘교회에도 DNA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DNA, 디오시리보헥산 이렇게 번역합니다만 이게 옥시라이버니요 라고 원어발음을 읽기도 합니다. DNA는 변하지 않습니다. 죽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DNA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친자, 친부 확인 등 온갖 수사에 확인되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에도 DNA가 있다는 이 말은 교회의 DNA는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물론 교회에는 반드시 DNA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전통이 있습니다. 장, 단점이 있습니다. 교회 분위기가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간성, 시대성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설립된 교회와 6·25동란 전후에 설립된 교회와 오늘날 설립된 교회와는 다릅니다. 농촌교회, 어촌교회, 도시교회가 다릅니다. 강북교회, 강남교회, 신도시 교회가 다릅니다. 환경이 다르고 공간이 다릅니다. DNA형성이 다릅니다. 구성원이 다릅니다. 광화문이 다르고 독립문이 다르고 신촌이 다릅니다.
  우리가 있는 이 독립문은 정신적으로 의미상으로는 광화문이 굉장히 먼 동네입니다. 왜냐하면 사직터널 때문입니다. 신촌이 제일 가까운 동네가 독립문인데 신촌의 대학문화가 독립문에 안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금화터널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런 가상을 해봅니다. 양쪽터널이 없이 신촌과 독립문, 광화문이 평지로 연결이 되었다면 여기가 어마어마한 어드벤테이지가 일어날 상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터널이 막혀서 광화문문화가 독립문에 안 들어옵니다. 광화문에서 일어난 사건은 전국에서 일어난 사건개념입니다. 신촌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것은 한국대학문화의 상징입니다.  우리 교회의 DNA를 한번 분석해 보는데 상당히 재료거리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를 이제 정확하게 분석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우리 체질에 광화문 옷을 입혀도 안 되고 신촌 옷을 입혀도 안 됩니다. 강남 옷을 입혀도 안 됩니다. 우리 DNA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이 무언가? 우리의 장점이 무엇인가?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가? 우리의 분위기가 무엇인가? 이것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DNA는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인체의 DNA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교회성장학자가 DNA라는 용어를 빌렸다는 것뿐이지 DNA의 성분을 빌린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물론 전통이 있고 분위기가 있고 흐름이 있습니다. 그 DNA는 형성이 됩니다만 이 교회는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에 세워졌든 똑같은 동질성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의 DNA는 바뀔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도시 교회든 농촌 교회이든, 그 교회에서 예수이름을 부르는 영혼은 다 구원받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도 말씀과 성령의 역사 때문에 교회이지 다른 조건을 가지고 동질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 번째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DNA를 바꾼다는 개념은 바로 이 세 가지 본질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땅위의 교회가 시험이 들고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추한 모습이 일어나는 이것은 우리 인간이 저질러놓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거두기만 하면 본래부터 거룩한 교회입니다. 본래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말씀과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우리가 누더기를 입혔고 우리가 오물을 끼얹었고 우리가 더럽혔습니다. 인간이 더럽힌 그것만 거두어 버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저절로 거룩해집니다. 교회를 그 자리에 세우면 부흥의 역사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더기를 걷어내지 아니하면, 우리가 이 교회에 뿌려놓은 오물을 치우지 않고 있으면 우리 교회는 여전히 추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인간이 저질러놓은 것만 회개하고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됩니다. 주님은 영원토록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어떤 사람도 없고 근거도 없습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DNA는 우리 인체의 DNA와 개념은 다릅니다. 어떤 정통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형성하고 있는 분위기는 달리 형성이 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개념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부흥은 증거이다

  이제 부흥을 생각합시다. 부흥은 왜적이고 보이는 증거입니다. 실적입니다. 변화는 내적입니다. 안 보여도 변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실적이 드러나야 합니다. 부흥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는 말은 교회가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수도 많아지고, 교회가 하는 프로그램도 달라지고, 교회가 선교하는 것도 달라지는 등 교회의 실적이 부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을 이야기 할 때는 실적, 증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에 내가 무슨 역할을 했는가가 있어야 됩니다. 남의 실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 부흥이 아닙니다. 내 부흥을 내가 말하려면 내가 그 부흥의 역할을 해야 됩니다. 부흥이 변화와 밀접한 것입니다.
  교회가 공사를 하는데 몇 가지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말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만날 때마다 기도하는 중에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교회 건축이 너무 쉽게 되면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보이는 예배당 건축에 이런 저런 장애를 자꾸 주시는 것입니다. 왜 교회 안에 이런 장애가 일어나는가? 왜 순탄하게 일이 안되는가?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받기를 하나님이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교인들이 변하지 않고 입당이 되는 일입니다. 교인들이 안 변하고 입당이 되면 그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교인이 변하고 새 집에 들어가야 그 교회가 희망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성전건축의 애로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애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하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걱정만 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들이 변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변하면 걱정은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초점은 너희들이 변하라는 것입니다. 당회가 변하라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변하라는 것입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기를 주님이 원하시지, 지어지는 그 집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당을 짓는 이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변화와 부흥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앞으로 우리 교회가 변화와 부흥을 시도하는 데는 이 세 가지 초점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세 가지 변화에서 부흥이 온다

  첫째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우리 의식의 변화입니다. 제자의식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가 환경의 변화입니다. 새 예배당은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옛날 집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새 예배당은 공간적인 변화입니다.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장로님들 세대를 위해서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옛날 그 예배당을 증축하면 한 600명 이상은 앉을 수 있는 예배당이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은퇴하고 가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고생스러운 일을, 왜 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예배당을 짓습니까? 바로 우리 후세들을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후세들에게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복 받고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이 집을 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엄청난 공간적인 변화이고 환경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20년을 보고 짓는 집도 아니고 이것은 최소한 한 세대, 아니면 반세기 이상 유지될 것으로 보고 짓는 것입니다. 옛날 조상들이 그럴듯하게 지어놓은 예배당은 다 반세기 이상 되었습니다. 지금도 오십년 이상 되는 예배당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환경의 변화는 예배당을 짓는 이것이 가장 눈에 보이는 큰 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이 큰 변화에 걸맞는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움막집에서 싸우는 그 죄와 새 예배당을 지어놓고 싸우는 그 죄와는 다릅니다. 싸우려고 예배당을 지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적인 변화, 새 성전 건축은 진정으로 새 마음, 새 사람, 새 제자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새 부대, 삶의 변화입니다. 이제는 행동이 변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추구하는 변화와 부흥의 요체입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지상교회가 이 도전을 다 받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변화와 부흥의 계기가 오는데 이 변화와 부흥의 계기는 파종기가 있고 잠식기가 있고 성장기가 있습니다. 심어야 됩니다. 누군가가 심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심어놓은 것이 인간의 계산처럼 그렇게 빨리 싹이 나서 열매를 빨리 맺는 것이 아닙니다. 잠복기가 있습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걷힌 다음에 하나님이 열매를 주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다 겪고 있습니다.

  변화의 기회를 살리자

  우리 교회가 이제 반세기 역사를 만났습니다. 2005년도에 50주년이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입당과 더불어 이제는 제2의 역사를 스타트하는 계기가 2005년도입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변화와 부흥의 기점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나 모든 여건상으로 보나 교계 분위기를 보나 우리 자신들이 이제 한 세대가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볼 때 변화와 부흥은 불가피하고 여기에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변화와 부흥은 이 시대의 화두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화두입니다.

  요즘 행사를 가보면 전부 변화와 부흥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변할까?” “어떻게 하면 부흥할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시행착오가 현실교회 안에 자꾸 일어납니다. 부산에 있는 A교회가 너무 후자만 집착을 했습니다. 부흥, 부흥, 부흥... 그러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부흥만 되어 버리면 모든 게 다 만점으로 매겨지는 이 교회의 풍토가 우리로 하여금 시행착오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킨 목사님은 성자다’가 아닙니다. 교회를 부흥시킨 교회, 목사 중에 장로 중에 더 교만하고 오만하고 더 본질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흥의 잣대를 가지고 한국교회 전체를 채점을 해 버립니다. 부흥한 교회의 교인들은 전부 성화가 다 되어 있고 주님을 다 닮아 있습니까? 부흥이라고 하는 이 이슈를 잘못 적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안 가립니다. 그럼 부흥이 되면 위로 올라가고 부흥이 안 되면 채점상 아래로 매겨져야 되고 도태되야 되고 추방되어야 하는 이런 분위기가 교회에 잃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 지도자들이 제일 많이 받는 압박 중에 하나가 교회의 부흥입니다. 교인들은 지도자로 하여금 교회의 부흥에서 해방되도록 교회를 섬겨야 됩니다. 

  금년에도 제 후배 세 사람이 찾아와서 목회상담을 했는데 모두가 병이 나 있습니다. 왜 병이 낫는가? 교회부흥 때문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 전력을 다 했는데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다. 거기서 그만 탈진이 왔습니다. 여러분이 부흥, 부흥을 인위적으로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여러분 각자가 변하면 변화된 당신을 통해서 교회는 부흥이 됩니다. 교회가 본질을 찾고, 교회가 온전성을 찾고, 교회가 제자리에 있으면 거기에 어떻게 말씀과 성령이 역사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변하고, 교회환경이 변하고, 우리의 생활이 변하는데 어떻게 교회부흥이 안되겠습니까? 요즘 저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호박이 구르기를 바랍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도토리가 열 번 굴러도 호박이 한 번 구른 것 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도토리도 굴러야 되고 때로는 호박도 굴러야 합니다. 도토리만으로는 힘듭니다. 호박도 굴러야 합니다. 큰 일을 하는 교회에는 큰 일군이 있어야 됩니다.

  맺는 말

  우리 교회가 큰 일을 시작했습니다. 큰 일군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큰 희생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큰 봉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주여, 호박이 구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호박은 저 멀리서 수입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한 평생 도토리처럼 구르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호박처럼 한 번 구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호박처럼 한번 구를 수 있습니다. 호박이 수입되어서 구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호박이 굴러지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일어나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변화와 부흥입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호박이 구를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부흥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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