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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하고 부흥하자(2) / 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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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변화하고 부흥하자(2)
성경본문 빌립보서 3:4-9

  변화의 요구

  변화와 발전은 21세기 기업과 정부와 모든 분야의 화두입니다. 우리가 지금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정치가 변해야 한다는 이런 요구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변하려면 공천이 변해야 된다고 해서 공천을 가지고 물갈이론을 이야기합니다. 기득권자들이 다 물러가야 된다, 신진들이 등장을 해야 된다 해서 영남 물갈이론, 호남 물갈이론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합적으로 보면 젊다고 해서 전부 신성하고 정직하고 의로우냐, 그러면 기존세대는 다 부정직하고 부패한 것인가, 초선의원은 깨끗하고 3, 4선 의원은 다 구닥다리냐, 또 앞으로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준비하는 그 사람들은 그러면 믿을만한 사람들이냐 이것을 볼 때 답이 잘 안나옵니다. 16대 총선 때 입후보한 사람이 2천명이 넘습니다. 그 중에 23%가 체납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국회의원이 된 사람 중에도 고질적인 체납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사람도 그런 지경인데 이 물갈이론에 젊어야 된다, 나이 많은 사람은 물러가라, 기득권자는 물러가라, 이제는 신진이 등장해야 된다는 그것이 하나의 세속적인 방법에서 대안일 수는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변화라는 것은 젊은 사람들로, 국회의원을 안한 사람들로, 깨끗한 사람이 해야 된다 이런 측면이 아니고 변화의 본질은 내면, 즉 중심이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관이 변하고 공직자로서 국회의원의 기본 사명감을 가진 그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젊다고 다 믿을 수 있고, 신진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내면의 변화와 삶의 변화는 국가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분야에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우선하고 이것을 증명하는게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변화를 변화의 본질이라고 하고, 부흥을 삶의 변화라 하는 것입니다. 내면으로 변한 이것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게 부흥입니다. 우리가 교회부흥이라고 할 때 ‘이것이다’라고 보여주면서 부흥을 말해야 됩니다. 내면에 변한 것은 안 보입니다. 이것은 변화입니다. 내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바깥으로 보이는게 부흥입니다. 그것이 기업의 발전이고 국가의 발전입니다.

  변화의 본질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놀라운 기득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에 두 사람도 없는 특출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신분이나 학문이나 그의 지위나 모든 면에서 그보다 탁월한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들 앞에서도 최고요 로마사람 앞에서도 최고입니다. 바울에 관한 기록을 보면 조부가 로마 시민권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는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학문을 다 한 사람이지만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로마사람이고, 로마인의 학문을 다한 사람입니다. 바울만큼 기득권이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기득권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본문 8-9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선 8절에 보면 세 가지 포기한 게 나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명예, 지식, 재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 중반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표현을 합니다. 돈, 명예, 영광, 학벌, 족보,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 율법의 의,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바울은 잃어버렸다, 그리고 해로 여겼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즉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기회가 있어도 멀리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기득권을 포기한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왜 버립니까?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여기 ‘아는 지식’이라고 했는데 가장 고상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그 기득권을 버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반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았고 얻었고 발견되었기 때문에 해로 여겼고 잃어버렸고 배설물로 여겼다 이렇게 구절이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변화와 부흥을 말하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여기에 우리 내면이 변화에 적응을 안 하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를 적당히 알아 가지고는 사람이 안 변합니다. 예수가 최고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째다, 예수라 하면 명예도 재물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이 지식을 알아야 사람이 변합니다. 그리고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얻었다는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얻었다는 것은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은 가치가 다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전부 내가 새롭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말은 모든 걸 해로 여겼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의 히브리적 개념은 폐기처분이 아닙니다. 주님께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고 “나를 좇으라”고 할 때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배와 그물을 폐기처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잡은 고기, 그 배를 전부 주님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잃어버렸다는 말은 주님께 던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장 고상한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얻고, 발견되는 것과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다시 말하면 복음의 핵심을 붙잡고 버릴 줄 알 아는 것이 변화입니다. 우리가 버릴 것을 안 버리고 있는 한 변하지 않습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변합니다.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려야 변합니다. 오늘처럼 인간들이 육의 것에 집착하는 세대가 없습니다. 육의 것에 집착하는 그것을 해로 여길 줄 아는 가치가 일어나야 됩니다. 거기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내면을 보니까 이런 것 때문에 변한 것입니다. 그는 최고를 알았고 최고를 얻었고 최고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고라는 그 기득권을 전부 주님을 위해서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식도 명예도 가문도 학문도 로마 시민권도 복음을 위해서 그는 다 사용을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부흥되기를 원하는데 기독교의 변화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변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변치 않는 기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것이 변화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것이 변화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본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추구해야 됩니다. 이 기본을 놓쳐버리면 큰 시행착오가 일어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될 것은 부대입니다. 내 인격은 부대입니다. 내 직업은 부대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부대입니다. 여러분의 직장도 부대입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상대적인 것은 전부 부대에 속합니다. 그것은 전부 변해야 됩니다. 변해야만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안 변하는 절대가치, 즉 새 포도주에게로 맞추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와 어울리면 바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자유로울 때 내가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행정의 변화

  요즘 교회의 갱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행정의 변화에 대해서 굉장히 주목을 합니다. 이 행정의 변화 가운데 제일 큰 이슈로 등장을 하는 게 지금 목사, 장로의 정년제 문제입니다. 목사, 장로의 정년을 단축할 것이냐, 이대로 할 것이냐, 어떤 형태로 조정을 할 것이냐 하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개 교회별로, 지역별로 현실화되고 있고, 케이스마다 행정의 변화가 지금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고 교단적으로도 이 문제가 지금 대두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 장로임기제는 교회변화에 큰 변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하든 우리는 이대로 한다며 변화를 시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가 지금 듣고 있는 사례만 해도 목사님들의 조기은퇴가 초교파적으로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조건이 각각 다릅니다. 교회마다 그 교회에 맞는 조건을 가지고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A교회도 B교회처럼 하라’ 그렇게 말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기은퇴에 관한 변화의 바람은 지금 급하게 불지는 않아도 서서히 불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물갈이론이 지금 교회와 무관한게 아닙니다. 아마 이번 17대 총선에 물갈이 폭이 크면 클수록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 바람은 불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행정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임기제는 행정의 한 부분이고 다른 면에서 행정은 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행정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 행정의 요체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의 행정에 당회와 제직회가 통폐합 구조식으로 해놓았는데 운용만 제대로 하면 굉장히 발전된 체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예배위원회나 행정위원회 등의 위원회가 있는데 그 위원회의 위원장을 비롯해서 부서의 장들, 실행위원 되는 구성원들이 거기서 확실하게만 일해 주면 교회는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고 뻗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부서는 제대로 돌아가는데 어떤 부서는 제대로 안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부서를 맡고 있는 사람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부서를 맡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얼마나 변화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 부서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육부장관이 바뀌었습니다만 전 분이 불과 1년도 안 했지만 그 분 때문에 왔던 혼란을 생각해보면 정말 이 교육행정이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어느 부서에서 장관을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선 조직이나 행정에 이게 최고다, 저게 최고다가 아닙니다. 정답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구역을 섬기든, 전도기관을 섬기든, 성가대원을 하든 여러분의 모든 교회의 활동은 전부 행정관하에 있습니다. 예배도 행정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행정의 변화는 교회변화에 중요한 하나의 과제입니다.

  이런 것과 아울러서 교회가 조직의 능률화를 기한다는 문제가 있고 규칙의 단순화, 자원개발의 운용, 기술의 집합, 훈련 등등 이런 것들이 행정의 교회변화에 큰 이슈로 등장을 합니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 사회도 지금 구조조정이라든지 이런 행정과 조직이 변화에 기업이나 조직체에 승부를 겁니다. 교회도 이런 변화를 과감하게 해야 됩니다.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변화를 하는 것은 실험입니다. 해보고 잘 안되면 보완을 하면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감하게 우리가 변화를 시도해야 됩니다. 거기에 우리 각자가 바울의 이런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전체변화에 바로 답을 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제도나 행정이 우선이 아닙니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가치관이 변화된 그 사람이 답을 주기 때문에 사회와는 조금 다릅니다. 

  예배의 변화

  두 번째로는 예배의 변화입니다. 예배가 변하지 않고는 교회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그렇습니다. 예배학 이론에서 보면 예배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교회변화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우리의 예배생활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예배생활을 위해서 우리 각자가 관심을 가져야 되고 실제로 내가 예배를 위해서 무언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예배를 드리러 오기 전에 주일예배가 은혜롭도록 얼마나 기도하고 오는가? 내가 은혜받을 준비기도를 하고 예배를 오는가? 이 예배를 섬기는 자들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 성가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성가를 들으면 분명히 은혜가 더 될 줄 믿습니다. 설교자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고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으면 이 말씀이 새롭게 들려질 줄 믿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한 주간 동안 전혀 관심도 안 갖고, 기도 한마디도 준비 안 하고 예배에 참석해서는 예배생활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배생활을 위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예배에 여러분의 기도생활과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내가 이번 예배에 주님 앞에 드릴 예물이 있다면 그것도 준비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이 준비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요즘 ‘오픈 워십’이라 해서 열린 예배라 하는데 예배의 변화가 그런 형식적 차원만 보면 곤란합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순서가 바꾸어지는 것은 변화의 수단적 일부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배의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부딪히고 내가 그 말씀에 응답하는 이 예배본질에 내가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말씀하시지만 하나도 내게 와 닿지 않고, 내 삶 속에 그 말씀 앞에 응답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예배가 변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변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게 들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환되어야만 예배생활이 변하는 것입니다.

  예배생활이 변한다는 말은 예배드리는 이 시간을 국한한 개념이 아닙니다. 예배생활이란 말은 신앙생활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배적 삶이 되어야 한다, 예배를 바로 드린 자답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 때 은혜 받은 것으로 삶 속에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예배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삶은 기본적으로 예배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하는 이 말이 몸으로 드리는 예배, 즉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 주기 위해 살자

  우리 속언에 부모들이 아이를 보고 공부 안 하는 아이를 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야,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나” 저는 그 말이 참 묘한 말이다 싶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 이 말이 아이들 앞에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들 앞에 공부하라고 윽박지를 때 꾸중 반, 책망 반 담아서 하는 말이 “이놈아, 공부해서 남 주나” “제발 공부 좀 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은 아멘 해야 됩니다. 남 주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진짜공부입니다. 여러분, 남을 섬기기 위해서 은혜 받으세요. ‘은혜 받아서 남 주나’ 그렇습니다. 남 주기 위해서 은혜 받아야 됩니다. 남 주기 위해서 성공하십시오. 남 주기 위해서 돈 버십시오. “공부해서 남 주나”라고 할 때 애들보고 당당히 대답하라 하십시오. “그럼요.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해야죠!” 그것이 정답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읍에서 장사도 하면서 농사도 짓는 약간의 규모를 가지고 일하시는데 이 분이 투정을 합니다. “목사님, 금년에는 장사도 재미도 없고 농사도 다 망쳤습니다. 종업원들 월급주고 세금내면 금년에는 하나도 남는 게 없습니다”라며 불평을 합니다. 내가 그 말을 다 듣고 있다가 “집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헛 장사했다고 나한테 푸념하는데 내가 들어보니 안 그렇습니다. 집사님은 성공자입니다. 돈벌어서 종업원한테 월급 준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세금 낸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종업원한테 월급 주려고 장사한 것 아닙니까? 뭐 하려고 돈법니까? 집사님은 성공자입니다. 감사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을 했더니 “아이구 목사님,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게 그렇게 좋네요” 합니다.

  종업원 월급을 괜히 주었다고 탄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못 받습니다. 종업원들 월급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돈 벌어서 남 주어야 됩니다. 주기 위해서 벌어야 됩니다. 임금 떼먹고 세금 떼먹고 내 수중에 돈이 남아있는 게 성공입니까? 남 주기 위해서 은혜 받고 돈 버십시오. 움켜쥐기 위해서 하는 것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이름으로 주기 위해서 여러분은 욕심을 가지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를 가만히 보면 마땅히 할 일을 해놓고는 괜히 했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수지결산이 안 맞아도 종업원한테 임금을 주는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는데 그건 해놓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단장들의 모범

  저가 잊지 못하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내 후배가 양구에 22사단에서 군목을 했는데 자꾸 나보고 여름휴가를 와 달라는 것입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부탁을 해서 휴가를 겸해서 갔습니다. 그때 사단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신 이 준 장군입니다. 이 준 장군 부부가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군목이 사단장님에게 얼마나 잘 보였던지 저를 사단장님 집에 저녁초대를 하였습니다. 제가 관사에 처음 가 보았는데 산중에 별장처럼 잘 지어놓은 관사인데 초소를 두 개나 지나서 갔습니다. 청와대 들어가는 것보다 더 엄합니다. 가서 저녁식사를 잘 나누었는데 군목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즉흥적으로 새벽부흥회를 하자고 합니다. 목사야 어디를 가든 설교하는 사람이니까 하자고 했는데 첫날 부흥회를 하는데 저가 강단에 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단장이 앞에 앉아 있고 거기에 참모들, 영관급 장교들이 앉아 있고 예배당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감동적인 예배 분위기에서 설교를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이 사령관이 나보고 무슨 운동을 좋아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것은 잘 못하고 축구를 좀 했다고 하니까 나를 위해서 축구대회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또다른 부대에서 사역하는 군목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군이 예배드리러 나오면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군목이 이 장군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감히 “장군님, 제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좀 들어주시렵니까?” “목사님이 부탁하는 것인데 해야죠” “주일날 정복을 하시고 교회 앞에서 주보를 좀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장군이 정복을 하면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여러분, 그 교회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 섬기기 위해서 믿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믿습니까? 무엇 때문에 은혜를 사모합니까? 무엇 때문에 축복을 사모합니까?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장군이 주보를 나누어주는 그 교회분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섬김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가진 자가 섬길 때 하나님이 크게 쓰십니다. 진정 남 주기 위해서 돈 벌고,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변화와 부흥이 다 있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고는 부흥이 없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가 주려고 왔다” 주님은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제가 새삼스런 이야기를 한 마디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내년에 50주년인데 우리 교회가 60주년이 되면 저도 은퇴하는 때입니다. 지금 법정기간으로 계산할 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60주년하고 내가 만 60세가 되는 해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60주년은 저가 은퇴하는 그 해입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빨리 은퇴하는 그 해가 왔으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건축 후 10년 동안 우리 교회가 부흥 발전한 모습을 빨리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안 늙으시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빨리 늙고 싶은 심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식들이 빨리 커서 성공한 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1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면 우리가 빨리 늙어야 됩니다. 빨리 늙어야 그 애들이 자랄 것 아닙니까? 빨리 늙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의 변화와 부흥을 빨리 보기 위해서입니다. 60주년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은퇴하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연말도 빨리 왔으면 싶습니다. 사람들이 안 늙으려고 세월 안 가는 법이 없냐고 몸부림치는데 그러면 더 빨리 갑니다. 환갑이여 빨리 오라, 칠순이여 빨리 오라, 그런 자세로 하루 하루 기대를 가지고 발전과 부흥된 내 생애의 미래를 보면서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변화와 부흥이 금년에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야 됩니다. 당회, 제직회, 안수집사회 등 여러분이 속한 기관에 변화와 부흥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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