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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삶의 흔적 (왕하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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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왕하9:30-37
제목: 내 삶의 흔적


  본문은 아합왕의 왕비였던 ‘이세벨’의 최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불행하게도 매우 혼탁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열방과 같이 자기들도 왕을 세우면 뭔가 될 것 같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윗과 같은 왕이 있어서 한때 부강했지만, 그 이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특히 나라가 갈라진 뒤에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안팎으로 매우 어려워서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사람들은 다윗 왕권을 회복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정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대가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아합’이라는 왕이 통치할 때입니다. 아합은 물론 자신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의 왕비인 ‘이세벨’로 인해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세벨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시돈이란 나라의 공주로서 정략적인 결혼에 의해 이스라엘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녀는 궁에 들어오면서 ‘바알신’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궁궐에서부터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세벨은 성경에서 가장 악한 자의 대명사로 불리웁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타락에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녀를 사탄의 대리인, 마귀의 앞잡이, 소위 ‘악의 축’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세벨도 결국 죽습니다. 절대권력이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역사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탁한 이스라엘을 위해 ‘예후’라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10번째 왕을 세워 여로보암, 바아사, 오므리에 이어 예후왕조의 새 시대를 열게 했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9장은 예후가 당시 아합의 아들로 왕이었던 요람을 처단하고, 이세벨까지 죽이는 유혈혁명의 과도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세벨의 최후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세벨은 예후의 반란과 자기 아들 요람이 사살 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도 최후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녀는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화장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후가 들어오자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라고 말합니다.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에 비한 것은 경멸의 표현입니다. ‘시므리’는 전차대를 지휘하던 장군인데 왕을 살해하고 왕권을 차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7일만에 오므리에 의해 공격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가장 비열한 왕위 찬탈자로 불리웠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이런 사람을 언급하며 예후를 대했습니다. 예후는 이 말을 들은 즉시 그녀를 가차없이 창 밖으로 내어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피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세벨이 죽은 뒤, 궁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진행되는 도중에 예후는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이세벨이 한때 나라의 왕비였으니 그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왕의 명령에 신하들이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비참하게도 이세벨의 시체는 개들이 다 핧아 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열왕기상 21장 23절에서 엘리야가 선포했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개들이 시체를 다 핧아 먹은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머리와 손과 발, 이것만이 그녀에게서 남은 유일한 흔적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죽은 뒤, 그에게서 머리와 손과 발이 남았다는 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한 인생이 살다가 끝나게 되면, 남는게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사람이 머리로 한 것, 그 사람이 손과 발로 한 것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흔적입니다. 이세벨은 악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이런 부분에서 얼마나 악한 흔적을 남겼는지 우리는 머리와 손과 발의 관점에서 그녀의 생애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하나님대신 늘 어떻게 바알을 섬길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 대한 공격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의 발목을 잡고, 구렁텅이로 몰아갈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잠재우고, 제거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생각에서 나온 악행이 이스라엘의 충신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손으로 저지른 악행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그녀의 손이 지적한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습니다. 그녀가 손이 들면 그를 추종하는 바알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항하여 싸웁니다. 그녀의 손으로 얼마나 많은 선지자를 죽였는지 모릅니다. 그녀가 손을 움켜잡으면, 애매한 백성의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였고, 자손까지도 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발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늘 궁궐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바알 산당를 만드는데 열심히 뛰었습니다. 왕비로서 가지 못할 곳을 가고, 하지 못할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집요하게 추적하는데 앞장서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옮겼습니다. 선하고 좋은 일에 앞장서지 않고 그녀에게 거치는 사람을 몰아내는데 그의 발은 누구보다도 빨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머리와 손과 발로 한 일입니다. 그것이 죽은 후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좋은 일,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 나쁜 일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근 우리 나라에 10만원 짜리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각계의 찬반 논란이 거셉니다. 반대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타당성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10만’의 고액화폐는 선진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10만원권을 발행하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우리 경제 수준이 후진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대하는 이유는 검은 돈이 생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만원으로도 사과 박스를 채우게 되면 1억이 들어가는데, 이젠 박스 하나에 10억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벌서부터 10만권에 들어갈 인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인물을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순신, 김구, 유관순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모두 우리 나라 역사에 큰 공헌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화폐는 그 나라의 얼굴입니다. 문화와 역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화폐를 보면 그 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미국화폐에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링컨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도 오랜 역사 속에 그들의 마음에 기억되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사람들의 초상화가 대부분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화폐가운데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South Africa,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이 나라의 화폐는 인물대신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코풀소, 코끼리, 사자, 표범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왜 남아공은 다른 나라처럼 인물이 없을까요? 여기에는 슬픈 과거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아공은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백인들은 흑인을 자기들과 철저히 구별했습니다.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참정권이나 선거권이나 소유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새로 선출된 대통령에 의해 인종차별정책의 완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27년간 감옥에 수감되었던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340년의 백인통치를 종식시켰던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그 땅에서 흑인이 사람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목일 뿐, 다수의 흑인들은 여전히 짐승 같이 삽니다. 만델라의 후임도 역시 흑인이건만, 여전히 차별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백인들이 사는 곳에 흑인이 얼씬도 못합니다.

  이런 슬픈 역사 때문에 지금 남아공의 화폐에는 사람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불행하게도 존경할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인물이 있다해도 그려 넣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동물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앞으로 만델라가 죽으면 그의 초상화가 혹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백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좋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 나라가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라는 데 있습니다. 남아공은 교회출석과 관계없이, 통계상으로 국민의 98%가 크리스천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처음 여기에 자리잡은 백인들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부터 그 나라를 지배한 화란인과 영국인들이 화란의 개혁교회와 영국의 성공회를 그곳의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도처에 예배당이 즐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날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크리스챤이었건만, 그들은 역사와 삶에 좋은 흔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세계를 슬프게 하는 비극이요, 우리를 깨우치고, 경종시키는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나, 혹은 개인의 삶이나 인간은 세월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속담에 그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우리는 이름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두고두고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생각하면 아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좋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믿고 크리스챤의 이름을 가진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에 내가 속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좋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결심하고 출발한 우리에게 이세벨의 사건과 남아공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머문 자리에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나는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아무도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여러분의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생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생각이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삶을 삽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혹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지 않습니까? 이 소중한 시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묵상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몸만 왔다 가지는 않은 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여러분의 생각들이 결국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 가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손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거의 생활의 대부분은 손으로 하지 않습니까? 음식도 손으로 먹고, 목욕도, 전화도, 쓰는 것도, 집는 것도 다 손으로 합니다. 무엇보다도 요즘에 손으로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는 잘만 사용하면 정말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인생을 가장 은밀하게 해치는 무서운 것입니다. 완전히 오픈 되어 있는 사이버 세계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지요? 저도 컴퓨터를 거의 매일 사용합니다만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냥 켜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뭔가가 들어오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매일 컴퓨터에 앉아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무방비로 당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 그것을 혹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발은 우리의 움직임을 도와줍니다. 발이 가지 않으면 내가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다니셨는지 잘 보았습니다. 손이 인격이라면 발은 행동입니다. 내 삶의 현주소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믿는 자는 분명 가야할 곳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내 발은 지금 그것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갈데 못 갈 데를 아무런 의식이나 생각 없이 나오지도 못하고, 돌아서지 못하고, 푹 빠져 있지 않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발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임중이란 사람이 쓴 저서 가운데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뿐인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자는 내용입니다. 인생에 지우개가 없다는 말이 물론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론 지우고 싶은 것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돌려놓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생의 오류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때로는 아쉬워하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한 허물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흰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하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 인생에 지우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은혜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습니다. 마치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치료가 되어도 그 아픈 자국이, 그 수술자리가 흔적으로 남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 이제 생각부터 교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에 손을 쓰고, 바른 삶에 발이 움직여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손과 발이 되어 주님처럼 본받고 살아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삶을 향해 이 한 주간도 바르고 참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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