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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직스런 개인전도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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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스런 개인전도 (행 8:26-40) 

(서론) 전도방법은 크게 나누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중 전도요, 또 하나는 개인전도입니다. 대중전도는 두사람 이상의 많은 대중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개인전도는 성도 개인이 한사람 한사람씩 상대하여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대중전도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은 겨우 30%에 불과하나 개인전도를 통해서 믿는 사람은 약 70%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전도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까?

(一) 전도대상에 대하여 미리 알아야 합니다.

손자병법 맨 서두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시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4:31-32)

이 말씀은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자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에 무슨 일을 하든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동료에게 전도하고 싶으면 교제하면서 친해져야 합니다.
본문 30절 보면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전도자 빌립은 에티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 내시는 자기의 궁금한 것을 이해하는 줄 알고 빌립을 기꺼이 마차 안으로 오르게 한 것입니다. (31절)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드디어 내려가서 물 있는 곳에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도 대상자에 대하여 잘 관찰하여 그가 좋아하는 일이나 그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아 전도에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또 전도자는 전도대상자가 싫어하는 일이 있는 것을 알면 가급적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해서는 안됩니다. 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한 말도 도리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반발심을 줄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아 생전에 절에 열심히 다니다가 죽은 부모를 둔 사람에게 전도할 때 "절에 다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그런 곳에 다니다가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二) 신중하게 행동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목적이 있다고 해서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무턱대고 복음을 전하기만 해서는 당장 선교지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말하기에 앞서 베풀어야 하고, 조건없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줄테니 믿으라"는 식은 오히려 전도 문을 닫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조건없이 사랑하고 희생하신 것처럼 조건없이 베풀되 신중 해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며 상대의 마음을 배려할 때 그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 배우고 배고프던 시절에는 최권능 목사님과 같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세대는 그때와 같지 않습니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저 예수쟁이는 공공질서도 모르나? 왜 고래고래 소리지르나?" 하고 비아냥 거립니다.

결국 오늘날은 그런 방법이 덕을 끼치는 것보다 교회가 무모한 일이나 하고, 황당한 소리나 외치는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인 양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진리의 외침이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전한다 해도 그 접근 방법이 세련되지 못할때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불쾌감만 주기 쉬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도자들에게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 10:16)
그렇다고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을 할때 주의할 것은 마음이 뜨겁다고 해서 무턱대고 외치기만 말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 방법을 연구하며 적당한 기회를 잡아 지혜롭게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전도를 할때에도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바로 파악하고 그와 말하기 가장 좋은 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한 기회가 잘 닥쳐오지 않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기도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조급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는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농부의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논밭에 씨를 뿌린 농부는 가을의 추수때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씨뿌린지 하루 이틀도 안되어 농부가 싹이 얼마나 났는가 보고자 땅을 파보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씨를 뿌리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태도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광야로 갔고, 거기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타고 가는 병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는 성령의 지시가 있기까지 접촉하지 않았고, 또한 내시가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할때까지 신중히 행동하며 기다렸습니다.
내시가 사 53: 메시야 예언장을 읽으면서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라고 물었을 때 드디어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행 8:32-34)


(三) 믿음이 뿌리내릴 때까지 잘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해서 기껏 교회에 데려다 놓았더니 얼마 안가서 그 사람이 다시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경우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관심 소홀로 인해 한 영혼을 잃은 경우라고 보아야 합니다.

전도란 자릿수만 채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이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 일원이 되어 그 영적인 위상에 맞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데려다 놓는데만 급급합니다.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나몰라라 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전도받은 사람이 스스로 신앙고백 할때까지 항상 친근하게 대해 주고, 영육간의 문제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교역자나, 사역자, 목자의 손에 그 사람을 맡기었다고 해서 여러분이 관심을 끊으면 안됩니다.

사도 Paul은 전도를 해산의 고통과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에 비유했습니다. 갈 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4:14)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한 개인을 전도했다면 영적으로 여러분은 그 사람의 부모입니다. 어떤 부모가 한시간이라도 자식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특히 갓난 아이일때는 더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옆에 붙어서 끊임없이 돌보고, 만져주고, 갈아주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한 영혼을 전도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전도해 놓고 잘자라겠지 하고 방치해 두면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놓고 돌보지 않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이끈 사람이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관심을 갖고 돌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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