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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시 68: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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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68:28~35 
제목 :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민족최대의 명절 설 잘 보내셨습니까? 한해를 두 번씩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신정의 결심이 무디질 만할 때에 또 한 번의 시작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여도 새로운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땅이 주어져도 경작할 능력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불행히도 우리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도 예외가 아닐지는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끊임없는 생존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을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능력이 힘을 어디서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고통과 죄악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특정한 지역이나 나라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 어디에고 파고 들어옵니다. 여기는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는 세상이지 결코 낙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죄악은 여러분의 자신의 삶에도 자리하고 바로 여러분 옆에 앉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도 기웃거립니다. 의미 없는 비극은 무력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덮치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비극적인 일이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해치는 사람들 뿐 만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설을 보내고 이 자리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를 향한 복된 하나님의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력한 삶을 살아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능력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닐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아픔이 있는 삶의 한 가운데서도 당신의 능력을 베푸십니다.

재난과 고통으로 융단폭격을 당한 욥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욥6:10)

그처럼 고통으로 재난으로 융단폭격을 당하듯이 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살았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위로가 됩니다. 놀라운 약속이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초자연적인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다. 그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새해에 만나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처럼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통해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의 하나님은 무력한 우리의 삶에 대답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68:35)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는 찬송 받으실 분이십니다.

제가 믿기론 여러분 대부분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엄청난 능력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느냐 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전능의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어떤 상황에 전능의 능력이 필요한지를 먼저 그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네 가지를 살피므로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를 먼저 살피겠습니다. 언제 이 능력이 우리의 삶에 절실히 필요할까요?

첫째는, 삶에 지칠 때 우리는 이 능력이 필요합니다.

지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피곤함을 느끼느냐고 물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 다녀온 피로감이 얼굴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직장에 나가서 일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만 이제는 얻어도 피곤해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설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달리다가 차를 세워놓고 그것을 감상할만한 여유가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지나칠 뿐입니다. 봄이 되어 꽃이 피어도 차를 세워놓고 그 향기를 맡을 여유가 없습니다.

느리게 사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할 때입니다. 급하게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8-31)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그는 결코 피곤치 아니하십니다. 지치지 아니하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엿새 동안 온 세상을 창조하고도 그는 다시 전능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힘을 공급받고 싶지 않습니까? 또 어떤 때에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까?

둘째는, 무력감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달리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제발 이 고통에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 때 그는 기대하지 않은 대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듣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_

고통 중에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 가운데 나타내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몸의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가 약할 때 주님은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그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어쩔 수 없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바닥날 그때에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우리의 삶에 공급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세 번째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지난해에 나온 세 이레 기도 책자를 살펴보면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상한 가족관계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인관계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위에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고통당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고통은 신체적일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겪어야 하는 신체적인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떠도 동일한 고통 속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지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민할 수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출근은 하지만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도 고통입니다. 월요일 출근하자 말자 비현실적인 작업분량과 도무지 불가능한 데드라인하며 회사를 다닌다는 자체가 짓누르는 고통입니다.

계속되는 경제적인 압박으로 인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카드회사에서 하루에도 수십 차례 걸려오는 전화로 인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분도 이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아니라 거친 남자 목소리 앞에 위축을 당하며 전화벨소리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깨어진 우정으로 인해서 아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깨어진 자아상과 실추된 위신으로 인해서 고통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는 이미 이혼의 아픔을 겪은 분도 있으며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혼이 일상사가 되어도 생이별이란 엄청난 스트레스요 극심한 고통입니다. 실망과 배신, 버림당함의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별도 인간이 겪은 가장 큰 스트레스입니다. 최근에 사별로 인한 고통 가운데 처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을 여의고 나서 맞이하는 명절이 외로움을 더하는 절기인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부모 된 여러분은 자녀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는 짓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내딛는 것을 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혼자라는 사실로 인해서 괴로워합니다. 명절에 고향에 가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너 언제 결혼하냐?”고 묻습니다. 아직 데이트하는 사람도 없고 결혼이란 잘해야 먼 후일의 일처럼 여겨지고 결혼 하는 친구들을 보면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고통이란 바로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고통에 면역된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때가 수시로 우리 인생길에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구약의 시인도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몸 아플 때 여호와께서 보살피시리라. 어떤 병으로 누워 있어도 주께서 회복시키시리라.”(시41:3, 현대어성경)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우리의 영혼은 고통가운데서도 만족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능력을 얻고 싶지 않습니까? 그 능력은 여러분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또한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유혹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힘이 없기에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통을 실감나게 로마서에서 묘사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같은 구절을 현대인성경은 더 생생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의 옛 성품 속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롬7:18, 현대인의 성경). 하고 싶지 않으면서 그것을 중단하지 못하는 고통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셨습니까?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거짓말의 달인입니다. 유혹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유혹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유혹을 우리는 받습니다. 이 번 명절동안 받은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평소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유혹을 받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유혹, 다른 사람 잘근 잘근 싶어보고 싶은 것도 유혹이고요, 먹고 살기 위한 거짓말, 절세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탈세의 유혹, 게다가 남자들이라면 음란메일 접속의 유혹까지 이전에 없던 목록들이 추가되는 시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유혹을 받을 때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다 이기기 시작하면 쳐다보지 않고 얼마든지 지워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언제나 피할 길은 마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 길을 선택하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마련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남겨 두셨습니다. 여러분이 지쳐서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이 통제할 수 없는 유혹을 당할 때도 하나님은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력한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연약을 핑계하며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능력을 경험했기에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달리 말하면 신앙이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상황을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속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에게는 힘을 주시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도 아니고 평범한 신앙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매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능력을 공급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보다 무력하게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원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는 하는데 능력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요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시행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하면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1. 맨 먼저 여러분의 연약함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얻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함과 모든 문제를 내가 다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어떤 분들에게는 어려운 결단일 수 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다 할 수 있다고 살아온 자리로부터 돌아선 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통제할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생에 불과하고 설을 보내고 또 한 살을 더 먹지 않을 장사는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 가면 머리칼은 희어지죠, 빠지죠. 이렇게 가다가는 스스로 자기 머리카락을 셀 수 있는 날도 올지 모릅니다.

전기제품을 사용할 때 돌아가지 않으면 접선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 충족한 듯 사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우리의 연약을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만이라고 가르칩니다. 교만은 우리 삶에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내가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티는 것 보고 사람들이 닭발 지긴다고 하대요. 닭이 안 갈려고 발버둥 쳐 봤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소나 코끼리가 안 가겠다고 버티면 모르지만 여러분과 저는 해봤자 닭발 지기는 것 밖에 안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신다면 이제 여러분이 잡고 계신 운전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뒷좌석에 편안히 앉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의 운전대를 잡아 주시기를 부탁드려 보십시오. 그 때 전능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전능의 능력을 소유하려면, 능력의 원천과 접속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능력이 필요합니까? 능력의 원천에 접속하십시오. 전기제품은 플러그를 꽂아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광의 힘에 접속할 때 제대로 작동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고백은 전능자 그 분께 접속 되었을 때에. 창조주 하나님과 바로 접속해야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구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햇수가 얼마인데 이제 와서 새삼 웬 접속이냐구요? 그 영광의 힘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신앙의 경력이 어떠하더라도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사람의 능력이 없다면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면 접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 그동안 비 신앙적인 선택을 하고 자기 길을 걸어오시진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대신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온 일은 없습니까? 그리고는 오만하게도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일을 저지르는데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공급해 주시길 기대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의 연약을 인정하십시오. 다음에 하나님과 접속되었는지 확인하십시오. 주님은 당대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포도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른 봄이 되면 농부는 포도나무 가지를 다 잘라냅니다.  밭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잘라진 포도나무 가지에서는 여름이 되어도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저는 가전제품을 쓰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돌아가려면 플러그를 꽂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전기제품을 벽에 있는 콘센트에 꽂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접속하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우리 문 밖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플러그를 들고 꽂을 곳을 찾기 위해 벽 사방을 헤맬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집 밖에 서 있으면 “날씨 추운데 들어오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 속에 초대하시면 됩니다. 문을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구주대망 2004년에도 여러 가지 과정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주님과의 재접속을 위해서 여러분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2004년 성경대학은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월부터 시작하는 제자훈련원에도 여러분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2월28일부터 3월1일에는 부부생활세미나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장하기 원하시면 우리는 도와드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 큰 교회가 가지는 장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등록하지도 않고 과정을 이수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실까? 울산 교회는 왜 이렇게 사랑이 식었을까? 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식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로 전능의 능력을 소유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방법을 신앙으로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믿음이 직결되어 있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네에서 능력을 행치 않으셨던 것은 저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능력을 더 이상 행치 않으시고 끝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선택을 하십시오.그렇게 하나님께 접속하면 분명해집니다. 선택이 쉬워지는게 아니라 무엇을 선택해야 될 것이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삶에는 쉬운 길은 없습니다. 분명한 길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 이집트 왕자(Prince of Egypt)라는 비디오 보셨습니까? 바로가 당시에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모두 그의 노예였습니다. 고역을 인해서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냈습니다.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놔 주라고 , 내 보내라고,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왜? 임금을 안 줘도 되는 그 엄청난 노동력을 누가 내어 놓겠습니까?

바로가 열 번씩이나 재난을 당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애굽에 한 때 살았던 임금님의 이야기라고 들으면 유익이 없어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열 번째 재앙에서 자기의 아들이 죽는 것을 보고 비로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수백년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가무를 즐기는 백성이 아니라도 춤추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집트에서는 바로가 정신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니, 노예를 다 내 보내다니, 내가 무슨 짓을 했지. 당장 내일부터는 누가 우리집 청소하고 벽돌은 또 누가 굽지?” 그래서 애굽의 정예 기마 부대를 내 보냈던 것입니다. 춤추고 노래하며 가다 보니깐 갑자기 기마부대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죽일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이집트 기마부대를 보고도 혼미백산을 하면서도 용케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나는 참 신기한 사람들을 다 봤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런 지경에서도 또 누군가에게 시비를 겁니다. “아니, 이집트에는 우리가 묻힐 곳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할 생각이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끌고 나왔소? 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우리가 애당초 말했지 않았소. 우리를 가만히 놔두라고. 우리가 애굽인들의 종노릇하며 사는 게 편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이것 보시오. 우리가 지금이라도 이곳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는 애굽 사람을 차라리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게 낫겠소.” 그 순간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두려워 말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여라.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기만 하여라. 너희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이집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의 기마부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로 들어가서 죽든지 칼날에 죽든지가 유일한 선택인 것처럼 보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어떤 때는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엄청난 기마병처럼 달리는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만날 때라니깐요.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몰려야 우리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니까요.

먼저 믿음으로 행동을 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당신의 능력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고 싶습니까? 그러면 오늘 저녁부터 저녁예배에 나오십시오. 밤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구역예배에 등록하십시오. 준비된 공부과정에 등록해 보십시오.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홍해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 거기에 기적의 역사는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발을 홍해를 향해 내딛는 것, 그것을 할 때에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그들 앞에 연출하셨습니다. 아이를 키우시는 부모 여러분, 직장생활도 힘들지만 아이들 보살피는 것도 만만치 않지요? 지쳐서 같이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도 여러분은 부모입니다.

주님께서 그 아이들을 여러분에게 위탁하신 것을 믿고 함께 놀아주십시오. 남자들 중에서는 가끔 이런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잘 놀 때는 데리고 놀아요. 그러나 아이가 울면 엄마에게 갖다 맡겨 버리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울 때나 웃을 때나 아이는 함께 나았으니깐 평소에는 직장 생활한다고 좀 아이 볼 여가가 없었더라도 명절에는 좀 봐주면 어떻습니까? 명절에는 여자만 고생하느냐고 바가지를 긁어도 서약한대로 아내에게 실천하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생각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은 일 많은데서 탈출 시켜 주는 일도 남편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부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분이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실천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한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왜 구정 지나자 말자 목사님께서 갑자기 여자 편을 드는가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장이기 때문에 제가 가장부터 말씀드리는 거예요.

안 그러면 가장 자리 내 놓든지. 가장이 꼭 아내 하는 대로 그렇게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알아서 먼저 하는 그것이 남편 일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아내들로부터 설 떡을 받아먹으려고 이야기 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불가능한 기적의 역사를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수년간 쌓아온 우정이 박살이 났습니까? 아니면 그토록 자신하던 건강이 무너졌습니까? 탄탄한 기업이 내리막을 치닫고 있습니까? 우선 믿음의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실천해 보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십시오.

대판 싸운 처지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이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전화기를 들 힘은 남아 있지요? 그러면 순종의 행동, 믿음의 행동을 시도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그 진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아직 한번도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분은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내어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님, 들어오십시오. 당신의 능력을 주십시오. 이젠 당신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해 보십시오. 참으로 원하시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더불어서 남은 인생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가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의 삶은 하나님의 전능의 전시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 우리가 쇼케이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능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복된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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