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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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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7
복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고 합니다.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에게 의사가 온다는 것이 기쁜 소식인 것처럼 죽음과 파멸의 그늘 가운데 앉아 있는 인간에게 구주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감격적인 소식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에 계속 전파되어야 합니다.

대개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처음의 그 뜨겁던 신앙은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복음에 대해 무지하거나 곡해하거나 의심하거나 교만하거나 불감증에 걸리게 된다고 지적들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복음이 다시 전해질 때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란 우리가 중생할 때 체험했었던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이자 구원받은 자로서의 기쁨입니다.

그 감격을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영광으로 가득찬 기쁨이었다. 내 기쁨은 마치 홍수처럼 강둑을 넘어 범람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윗 필드)

이 감격은 깨닫지 못하면 모르게 되거나 오래되면 식고 범죄를 해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 계속 듣지 않으면 복음의 감격이 무디어지는 자리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배운다는 말이요 깨닫는다는 말이요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또 거기로부터 오는 은혜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 곧 복음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 굳건한 믿음 위에 세우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함께 감격을 누리겠다는 소망을 나타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 1:11)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12)고 합니다.

3년 동안 목회한 에베소교회를 위해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8)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9)고 합니다.

1년 반 동안 목회한 고린도교회에 그가 전한 모든 것은 결국 복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복음이 전부인 자였습니다.

로마교회가 복음을 들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는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믿는다는 "너희에게", 복음을 잘 안다는 "너희에게", 교회생활 잘하고 충성한다는 "너희에게", 소문난 "너희에게", 그러나 무엇보다도 복음의 감격이 없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 뉴우스(Good News) 곧 복음이란 주제로 전국 학생 면려회 수련회가 본 교회에서 열리게 됩니다.

우리도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함께 도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불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변화시키시는 재창조의 능력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의인처럼 사랑하시고 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멸망 받을 죄수로 취급하는 대신에 사랑받는 자신의 아들로 여기시는 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으로 양심,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을 사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양심으로, 행동으로 율법으로 하나님께 바르게 되는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의의 개념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한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의미 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취급하시고 인정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을 멸망 받을 죄수로 취급하는 대신에 사랑받는 자신의 아들로 여기시는 이것이 바로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가 아닌 친구로 죄인이 아닌 의로운 선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요 복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는 이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사랑과 신뢰의 관계, 화목과 기쁨의 새로운 관계로 들어섭니다. 때문에 의롭다 함을 입은 자는 이제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에게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상실하였던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여 심판 주와 피고인의 저주스런 관계에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들의 복된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위해 죄인들의 죄 값으로 자기 몸을 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의는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분의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고 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 할 때 신비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은 평안이 가슴 가득히 차오를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부요함에 놀랄 것입니다. 천국을 수시로 바라보시기바랍니다. 세상에서 다친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아물 것입니다. 가슴으로부터 예수 보다 더 좋은 것 없고, 구원받은 것 보다 더 기쁜 것 없다는 벅찬 감격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마을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다리에는 그리스도의 상이 12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상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동들은 지나가면서 선한 목자 그리스도 상 앞에서 정원사와 농부들은 씨 뿌리는 예수 상 앞에서 어부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그리스도 상 앞에서 그리고 병자들은 치유 자이신 그리스도 상 앞에서 그 밖의 사람들은 각각 자신과 연관되는 그리스도 상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형편대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께서 내 의가 되는 길이 믿음이란 길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길을 통해서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안에 나를 투입하는 믿음의 길을 통해서 살아감으로 되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자신을 깨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이성과 지식, 완악한 고집과 교만, 과학만을 제일 되는 진리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은 설화나 신화로 여기는 불신앙을 버려야만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그 마음속에 채우고서는 결코 복음의 씨앗이 심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영접과 고백입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자신을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며 절대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이요 복음의 정수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요, 주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며 그가 자신의 구주됨을 만인 앞에 고백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열정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여호와의 약속과 구원만을 바라보고 결코 주위 환경에 의해 좌절하지 않으며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나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참신이요, 하나님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결코 의심치 않으며 끝까지 전진해 나가는 믿음입니다.

복음은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타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믿고 예수를 자신의 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바로 복음을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과 그가 이루신 구속 사역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복된 소식이 됩니다.




구한말에 서양 선교사가 어떤 촌락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된장 냄새가 코를 찌르는 초막에서 선교사가 서툰 한국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밤이 깊도록 분위기는 진지했습니다. 밤이 이슥하여지자 선교사는 무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자기도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바깥에서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그 무리 중에 대표자가 들어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라는 분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셨지요? 그 소식을 듣고 우리가 잠이 오나요? 그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선교사는 새벽까지 그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수기에 남아 있는 실화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늘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했습니다(합2:4).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이요,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능력이 끝까지 믿음이요,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이 끝까지 믿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의롭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으므로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정죄하지 말고 의롭다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오직 예수로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믿음으로 죽음의 형벌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의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롬3:23).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만이 의인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배격하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은 기여코 하나님이 바라는 그런 훌륭한 백성으로 바꾸시고 변화시키시고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복음은 믿기만 하면 반드시 율법은 온전히 지키는 자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합니다.

'능력'은 몇 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물리적인 힘으로서 '자연의 능력'입니다. 근육의 힘으로서 '사람과 짐승에게 있는 생명과 의지가 포함된 능력'입니다. 정신적 힘으로 '사상의 힘, 이성의 능력'을 말합니다. 영적인 힘으로 '신적 능력, 또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양심을 깨우쳐 영혼을 소생케 하며(시18:7)의지로 활동하게 하고 그 의지에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 최상의 합리성을 가진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 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행하고 계시는 최상의 거룩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위해 하나님은 수천 년을 선지자로 예비하게 하시고(롬1:2),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세상에 알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신적 능력의 가장 장엄한 연출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죄에서 의로 바꾸는 능력(17절)은 세상의 창조 능력보다 더 위대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골2:9)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현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 모두가 구원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창조와 섭리의 능력도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 머물러 있는 능력만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된 능력입니다.

하나님 한분 외에 죄를 사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7)고 합니다.

정당한 정죄를 멸하게 해주는 것은 그의 백성에 대한 위대한 통치의 능력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라고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에서 낼 수 있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정죄에서와 죄의 지배에서 구원해 줍니다.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의 공동 작품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행20:24). 하나님은 성령으로 매일같이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으로의 완전한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마24:14; 28:19). 그러나 복음을 유대인에게 먼저 선포되었으며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롬3:2). 그들은 주의 백성이라 불리었으며(요1:11) 바울 역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는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롬9:5). 그리스도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행1:8).

복음은 사회적 계급이나 민족이나 인종에 차별 없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오직 인간은 믿음으로 그 복음에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조건입니다.

바울은 이렇듯 가장 근원적이고 영원하며 강력한 능력인 복음을 힘 있게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부끄러워 않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진정 복음을 특권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대한 합당한 생활이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빌1:27).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입니다.(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리라-인터넷 정보 클럽)

우리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굳 뉴우스 곧 복음이란 주제로 전국 학생 면려회 수련회가 열리게 됩니다. 위해서 기도하며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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