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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당한 일 (빌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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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당한 일
빌립보서 1:12-14

  I. 들어가는 말

여러분, 설 잘 지내셨습니까? 새해에도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지키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의 가정에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 모두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제가 지나간 옛 퀴즈를 한 가지 내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보시고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한번은 교통사고가 나서 한 버스에 타고 있던 많은 승객들이 안타깝게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퀴즈입니다. 그 사고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원래는 96번 버스를 타야 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결혼식이 내일인데, 그 버스를 탔다가 안타깝게 희생된 총각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버스가 막 출발할 때 저 뒤에서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세워 겨우 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버스 안에서 졸다가 그만 자기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서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웃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지만, 결코 웃어만 넘길 수 없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과 불합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96번을 타야 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여 탔다가 죽었다는 것,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행복한 삶에의 온갖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는데, 그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 이제 막 떠나는 버스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겨우 잡아탔는데, 하필이면 그 버스가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삶이 힘들고 피곤하여 깜빡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는 도중에 그만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정말이지 다 억울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우스개 소리로만 끝나지 않고, 정말로 이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고 차가운 강물에 던지는가 하면, 부모와 형제를 끔찍하게 살해하고도 조금의 반성도 없는 패륜아의 모습이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삶 속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는데 우리의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번 설 연휴 동안에도 우리들 가운데는 기쁘고 즐거운 일 보다는 이렇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 속상하는 일, 기가 막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탄식했던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왜 우리 가정이 이런 일을 계속해서 겪어야 합니까? 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이유를 몰라,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더욱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때때로 너무도 억울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서 낙망하고 탄식하던 한 믿음의 조상의 고백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탄식의 소리가 아닙니다. 실망의 소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귀한 깨달음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그 삶 속에서 참 많은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그가 당한 그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한 가지 귀한 진리를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바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이 고백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 귀중한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II. 몸 말
1. 바울의 당한 일

그렇다면 먼저 바울이 당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빌립보서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좁은 의미에서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법에서 현재완료형이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행동을 나타낼 때 쓰는 동사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일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로마의 감옥에 올 때까지 일어났던 모든 환난과 역경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난을 당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고 다닐 수 있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재판도 없이 2년간이나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던 바울은 아마도 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루가 아쉽고 한 시간이 아까운데 감옥에 2년씩이나 갇혀 있으니 그는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를 생각해 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에게 상소를 하면 당시의 법에 의해서 그는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빌립보 감옥에서 나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로 가는 길 역시 평탄치를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그가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하여 갔는데, 그만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파선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 풍랑은 2주간이나 계속되었고, 구원받을 소망이 다 끓어질 정도로 아주 심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 “네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배에 탄 사람 중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인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과연 천사의 말대로 그들은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피신을 하게 되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약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자, 그러고 보면 바울은 지금 거의 4년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기간동안에 매우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긴 세월동안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단 한순간이라도 더 복음을 전하여야 할 텐데 무려 5년씩이나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갇히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 아마도 처음에는 바울도 상당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뒤늦게 자신의 지금까지 당한 일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 복음의 진보   
 
바울은 그 옥살이하고 있는 것,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억울하고 한심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 그 감옥살이가 오히려 복음의 진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가 오랜 세월동안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듣고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나의 일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사실 나의 매임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놀라운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1) 복음의 진보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프로코페”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 당시에 전 세계의 가장 막강한 군대였던 로마의 군대는 항상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공병대가 먼저 앞서 나가 장애물들을 제거하면서 도로를 닦았는데, 특별히 저들이 자랑하던 전차가 나아가는 길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뚫린 길로 로마의 전차가 행진해 들어가면 그곳이 곧 로마의 영토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지금 너희가 걱정하고 있는 그 일 때문에, 즉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곳에 복음을 위한 큰 길이 열리게 되었고,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확보되었다는 것입니다. 

(2)새로운 영지(로마의 시위대)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입니까?
바울은 13절에서 그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는 로마의 권력 중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지금 시위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바로 황제의 시위대, 즉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친위부대를 말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부대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발되면 급료도 두 배나 더 받고 남다른 조건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로마의 유력한 가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시위대에 뽑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부대를 처음 조직한 황제가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보통 약 만 여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후기시대에 가서는 이 시위대의 권력이 막강하여져서, 오히려 황제의 힘보다도 더 세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후기에는 시위대에서 로마의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하고, 새로이 세우기도 하는 등, 그 세력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나중에는 “황제 제조기”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로마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이었고, 그러기에 아무나 시위대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 정치의 핵심이요, 로마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 즉 황제숭배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철옹성 같은 벽을 쌓고 있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바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매임”이란 그가 바로 그들이 지키고 있던 로마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그들과 함께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매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에베소서(6:20)에서는 분명히 자기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같은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행전 28:20에도 보면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는 이 말씀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 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그 로마의 정신으로 투철한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중죄수를 가둘 때에는 간수 두 사람이 죄수의 양쪽 팔에 각각 손을 같이 묶고, 그 앞에는 따로 두 명의 간수를 세워서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중죄인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의 시위대 군인들이 배당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보초는 6시간씩 하루에 네 번을 교대로 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바울의 곁에는 하루에 16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사도행전 28장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시위대 뜰 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는 한 오두막집에 연금상태로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한 명의 시위대 군사가 그의 팔에 쇠사슬을 같이 묶고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기록이 바로 행전 28: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그리하여 바울은 처음에는 시위대 감옥에서, 후에는 한 오두막집에서 연금상태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그 손에 쇠사슬이 묶인 체로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 바울의 전도
그렇다면,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행전 21,22,23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때 바울은 성전 안에서 결례의 예를 행하다가 성난 유대 군중들에 의해서 린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의 천부장이 부하들을 풀어 사태를 진정시키고, 몰매를 맞고 있던 바울을 가까스로 구해냅니다. 그런데 심하게 매를 맞아 거의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바울은 오히려 천부장에게 부탁을 하여 유대인들에게 다시 이야기 할 기회를 달라고 하여,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몰매를 맞아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놓았더니, 겨우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또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 무엇을 하였을 것 같습니까? 바울에게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바로 로마의 중심부에 들어가, 그 로마를 움직이던 사람들, 로마의 정신이요, 로마의 사상을 대표하던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간수들은 바울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처지라 아마도 꼼짝없이 바울이 전하는 바 귀한 복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도 바울이 파렴치범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양심수와 같은 사람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평범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대로 로마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나의 매임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복음의 진보가 시위대안 뿐만이 아니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타 모든 사람들이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로마의 고관 대작들과 또 한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을 다 포함합니다.
 
먼저 행전 28장 17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시위대 감옥에서 밖으로 나아와 연금상태에 있을 때,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아마도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을 그곳으로 초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기타 여러 사람들 가운데는 로마의 고관대작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에도 조금의 무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동시에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로마는 로마가 인류에게 남긴 3대 유물 가운데 하나가 로마법전일 정도로 법 행정이 아주 발달하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원로원은 바울의 재판하기 위하여 새로이 등장한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바울과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법정은 피고가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법정에 선 바울이 무슨 말로 자신을 변론하였겠습니까? 그가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살려달라고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이었습니다.(행전 26장) 그 때에 바울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이 너무나 많은 학문에 그만 정신이 돌았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은 “나는 미친 것이 아니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즉 자기가 지금 이렇게 결박된 것 이외에는 모두가 다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가이사랴 법정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한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서는 어떠하였겠습니까?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를 마치려 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전 20: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친바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그의 모든 지식과 체험을 다해 로마의 법정에서 생명을 걸고 그리스도를 변론하고 증거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 복음이 온 시위대 안과 로마의 고관대작들에게까지 전파되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가장 심장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담대하게 전파되어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때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 받는 바울의 비범한 모습을 눈여겨본 많은 귀족들이 로마의 감옥에, 또는 바울이 후에 거처하고 있던 오두막집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 옛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로마의 고관들이 밤중에 바울에게 찾아와 그가 전하는 복음을 더욱 자세히 듣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전 16:30)고 담대히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런 모습이 바로 행전의 마지막 두절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2년)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전 28:30-31)
 
결국 바울로부터 이 복음을 들은 고관들이 가정에 가서 이야기하고, 친구에게 전하고...이렇게 해서 전파된 복음이 로마의 황궁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시위대와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진 결과, 주후 64년경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대 박해 때에 이미 네로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많이 순교케 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 어머니와 딸들이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신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런 기록들을 세상 적인 문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마지막 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로마교회 교인들) 너희에게(빌립보교회 교인들)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니라”(빌 4:22)
 
여러분, 여기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이들은 바로 황제의 친척들 내지는 로마 황궁에 있던 고관대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주후 60년경 로마의 감옥에 이르러 그곳에서 시위대 안과 로마의 높은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후, 불과 300년쯤 지나 그 거대하고 교만하던 로마제국이 나사렛 목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주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그때부터 로마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 즉 기독교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결론적인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 나의 당한 일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
 
그것은 바로 “나의 당한 일”, 즉 바울이 당한 일 뒤에 숨어 있던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 바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고, 그는 로마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때는 이제 그의 로마에서의 옥중생활도 거의 끝나가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들을 가만히 앉아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바울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이 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쇠사슬의 매임이 결과적으로 오히려 복음의 큰 진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깨달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같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 시위대 군인들과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황제의 법정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면서, “아,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내가 감옥에서 몇 년을 지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 때문에  거의 4,5년이라는 세월을 나로 하여금 감옥에서 보내며, 그 온갖 고생을 하도록 허락하셨구나” 바울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그 고통스런 환경 뒤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귀한 뜻과 섭리를 비로소 그 인생 말년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걱정을 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로 이 진리를, 이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들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는 바로 하나님의 귀한 섭리가 깃들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당한 그 일 때문에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임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로마의 가장 중심부인 시위대안에 복음이 전파되어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가 로마서에서 고백한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것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이는 그가 비록 감옥에 갇히는 그런 고난과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바로 그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전파되어지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이 고통과 이 시련의 의미가 무엇 때문인지를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거기에는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 이 귀한 진리에 비추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조명해 보십시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는 오랜 기간동안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하여서 답답해하며, 실망 가운데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도무지 왜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지를 이해하지를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환경이 사방이 꽉꽉 막힌 감옥처럼 느껴져,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그 답답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 조금은 속상해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내 능력과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한숨짓고 있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병든 부모님 때문에, 자식문제 때문에 속상해하며, 남편 때문에 아파하며, 일터에서의 불편한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입니다. 저는 믿기는 우리의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감옥에 갇힌 상황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당신의 때가 되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려운 그 환경과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섭리와 뜻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몰라도 좋습니다. 지금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당한 일, 내가 당하는 고난과 실패, 내가 당하는 질병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일진데, 거기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고 의지할 것뿐입니다. 결국에는 당신께서만이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대로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50장의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온갖 고생을 했던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이제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했고, 결국은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 50:20) “형님들은 나를 시기해서 죽이려 하였고, 나를 팔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대비케 하시기 위해서, 당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는 다른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창 45:5-8)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대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올 한해를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III. 나가는 말
 
오늘 본문 14절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성도들은(“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는 모습을 보고는 저들도 용기백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는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그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쇠사슬에 매인 상태에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면서, 그리고 황제의 호위병들과 로마의 고관대작들이 복음의 검 앞에 거꾸러지는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 나의 당한 일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안교회 여러분, 혹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고통 속에 있습니까? 그 문제가, 그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의 사건 속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희가 당하는 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뜻하는 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우리의 믿음의 무릎을 세우고,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 딛읍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지금 내가 당하는 사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을 눈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갈 길을 나아가십시다.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보면서 “저가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자.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자”하면서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민족은 참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그 시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해벽두부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당한 일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을 때, 오히려 내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외치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감사하십시오. 그런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있는 연약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맞아. 저 그리스도인은 그 어려움을 극복해냈어. 저 친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겁을 내거나 변명하지도 않고 이겨냈어. 저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따르고 싶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보입니다.

사랑하는 동안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이 믿음으로 승리하십시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이렇게 외치십시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내게도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이 민족에게도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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