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의 하나님을 만납시다 (행 17:24~31)

  • 잡초 잡초
  • 400
  • 0

첨부 1



제 목 : 나의 하나님을 만납시다.
성 경 :사도행전 17장 24~31절


주후 50년 경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헬라문화의 중심지인 아덴에 들렀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레스토파네스 등 세계적 대 철학자를 배출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아덴에는 여기저기에 우상의 제단들이 있고, 산봉우리마다 신전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올라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하였습니다(행17:23).

그들은 무엇이든지 무턱대고 믿는 종교심은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요 형식이었을 뿐, 신을 믿는 신앙심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덴 사람들을 향하여 참신이 누구이며, 그 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 주겠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종교적인 형식도 있고, 예배에 참예하기도하고, 또 종교행사에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신앙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체 주일날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은 될 수 있는 지라도 신앙인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시간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의 하나님을 재발견하고, 그 분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나의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5절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보통 1분 동안에 16회 내지 17회 호흡을 합니다. 이것을 계산해 보면 하루에 23,000번 내지는 24,000번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호흡 가운데 계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 하나 하나를 주장하셔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러 병원 응급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약물에 의지하여 투병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에게서 약물 투입을 중단하다든지,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숨 한번도 쉴 수 없고, 자기의 생명을 하루도 연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23,000~24,000번 숨쉬는 호흡은 누가 주장하는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스스로 단 한번도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면, 내 생명이 어찌 나의 것이고, 나의 삶이 어찌 나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존재가 되었으니 내 삶이 귀하고, 내 생명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 실존 자체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 자기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존 신앙위에 서 있던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고전15:1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롬14:8).


Ⅱ. 나의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27절에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할 때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사55:6). 하나님은 나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땅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헤롯의 궁전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계시고, 더듬으면 만질 수 있는 곳에 계십니다.

요나의 배 밑창에도 계시고, 물고기 뱃속에도 계셨습니다. 루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야곱의 곁에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잠을 깬 야곱이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28:17).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신은 아주 멀리 - 인간을 떠난 영역에 존재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신이 세상에 내려오면 성스러운 자리, 높은 자리에 계셔야한다고 생각하며 높은 산등성이에 제단을 쌓고 인간과 격리된 곳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우상의 선각, 아크로 리스 신전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행여나 아데네 사람들과 같은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멀리 하늘에 신 분! 그래서 죽음 후에나 하늘에서 만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특별한, 유명한 주의 종들과는 함께 하셔서 그들이 기도하면 들으시고, 그들이 안수하면 병이 낫고, 그들이 축복하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잘못할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하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28:15).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더듬어 붙드시는 성도님 되시기를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Ⅲ. 선악간에 심판 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1절에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엔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8).

심는 대로 그두는 것은 땅의 법칙이요, 하늘의 법칙입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둘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화평을 심고 의를 거두라”고 했습니다(약3:18). 바울은 “효를 심고 복과 장수함을 거두라”고 했습니다(엡6:3). 시편 126편 5절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많이 심고 많이 거둡시다. 귀한 것 심고, 귀한 것 거둡시다. 긍휼을 심고, 사랑을 거두고, 땀을 심고, 열매를 거두는 복된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