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율법과 복음(갈 3:10~14)

  • 잡초 잡초
  • 886
  • 0

첨부 1



동경중앙교회
2-18-8 ookubo Shinzyuku-Ku Tokyo Japan

율법과 복음
The Law and the Gospel
갈라디아서 3:10-14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이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서론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은혜 혹은 율법과 복음으로 대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율법이 달이라면 복음은 태양과 같다고나 할까요? 달은 달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만 태양이 없는 달을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양의 빛이 없으면 달 자체로서는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태양이 존재할 때 달이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율법이 씨와 싹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꽃과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잎이 아무리 무성하다고 할지라도 열매를 하나도 맺게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떠나서 복음이 갑자기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저주라고 했을까요? 복음은 무엇입니까? 왜 복음을 축복이라고 했을까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율법 속에는 복음의 싹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을 자는 없다는 것이며 율법을 완성하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얻는 의라고 말하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소로마서라고 불리울 만큼 그 사상이 동일합니다. 로마서가 멀리 미래의 전도지를 바라보면서 기록한 반면 갈라디아서는 당면한 교회의 위기에 대처하는 영적 전투적인 서신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설명했습니다.

오늘날도 구원을 받고서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하는 사람들 곧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율법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하여 무율법주의자로 타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정립하지 않으면 이러한 혼란은 계속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의 전반부에서 율법과 복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책망하고(1-5), 아브라함의 전례를 들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도리(이신득의)를 말하고(6-9), 나아가 율법의 저주와 복음의 축복을 대조시켜(10-14) 설명했습니다.

1. 율법의 저주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저주라고 했습니까?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완전합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적인 신앙행위에 대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실행하지 않는 자에게 율법에 기록된 저주가 임하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올바른 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대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율법도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다 행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요구에 합격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에 비춰 볼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가해지니 율법은 저주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이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행함을 의미하고 믿음은 믿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서는 한 사람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고, 그 가운데서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은 저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저주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율법 때문에 저주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율법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따라서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지적하고 아무도 율법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깨달으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에 있으려고 한다면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축복

10절에서 12절까지에서 율법의 저주를 논한 바울은 이제 13절과 14절에서 복음의 축복을 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돌연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13절의 첫번째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라고 시작합니다.

율법은 그리심 산에서 선포한 축복과 에발산에서 선포한 저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축복이 될 수 있으나 아무도 율법을 완성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전 인류를 저주 아래 두고 만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으로 율법의 저주를 지시고 인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율법의 저주는 끝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을 대속 혹은 구속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서 인용한 말씀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율법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저주를 담당하셨으므로 율법의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값을 치루셨으므로 그 누구도 죄의 값을 요청할 자는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에서 출발한 복이 아닙니다.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약 450년 후에 주어진 법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논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요 다윗은 율법 이후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약성경 첫 부분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의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 믿음의 근거와 대상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먼저 유대인들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복음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복음의 축복은 이방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들이 수출한 복음을 믿고 복을 받는 이방인들을 보고 시기가 나게 하사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부터 11장까지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역수입해서 믿고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3. 성령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는 다시 성령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14절 하반부에서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듯이 성령의 약속 또한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찌기 요엘은 예언했습니다.

"28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 2:28-32)
이 말씀은 사도행전 2:1-4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7-21에 베드로에 의해 인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른 말로 하면 대속의 피를 흘려 속죄를 완성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지만 특수한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성령의 선물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없이 믿는 자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16-20)
라고 말씀하신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영원토록 신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자가 없습니다. 곧 믿음과 성령의 사역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7장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37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7:37-39)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대로 성령이 강림하시는데 그 시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후에 성령이 강림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4절의 말씀은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내용상으로 보면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습니다. 이 복은 성령의 약속과 불가분리의 축복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저는 왜 율법의 저주와 복음의 축복인가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율법 자체가 저주는 아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끝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 자체는 축복이지만 복음 자체가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을 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복음 아래에 있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자가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공로를 믿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축복입니다. 또한 성령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차별이 없습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는 자들을 향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사도행전 2:37-39)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복음의 축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