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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을 얻는 비결 (신 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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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얻는 비결
신명기 6장 4-15절/ 주일 낮 예배/ 040201

< 광야 40년 역사의 교훈 >

성경 민수기(民數記)는 말 그대로 '백성들의 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 된 남자가 603,550명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레위인들은 1개월 이상 된 남자의 수가 22,273명이었습니다(민 3:43). 그리고 광야생활 40년 후에 민수기 26장을 보면 그 수가 601,730명으로 1,820명이 줄었고 레위인은 23,000명으로(민 26:62), 727명이 늘었습니다.

이 숫자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중에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왜 출애굽 시켰느냐?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게 낫다!"고 불평해서 20세 이상 된 남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민 26:65). 그래서 약 40년 동안 20세 이상 된 남자 603,548명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신비하게 죽어갔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하는 말에는 미래의 축복과 저주가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입으로 "나는 가나안에 갈 수 없다!"고 하면 가나안에 들이지를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게 하십니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면 행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잃지 않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어떤 모습으로 주어지든지 반드시 있습니다. 때로는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죄 때문에 그 축복이 현저히 삭감되는 것도 일종의 형벌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있지만 죄에 대한 형벌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약 40년 동안 603,548명이 죽었지만 전체 20세 이상 된 남자는 1,820명밖에 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근성을 가진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은 다 죽이셨지만 그래도 새로운 믿음의 일꾼을 그만큼 일으키셔서 가나안 땅을 준비하게 하시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광야와 같은 환경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전진하면 반드시 가나안의 행복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구가 줄었지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인구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파였고, 유다 지파는 광야 행진 때 제일 앞장서서 행군하며 어려운 일은 도맡아서 했던 지파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유다 지파는 거대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가장 험지인 헤브론 땅을 달라고 했던 헌신과 도전 정신이 넘치는 지파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앞서 헌신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은 좋아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축복이고, 어떻게 축복 받는지 모르고 축복만 받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축복 받는 원리는 외면한 채 축복에 집착하니까 마음의 허전함과 불안함은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그 불안함 속에 사단은 틈타게 됩니다. 점쟁이에게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얼굴에 마(魔)가 꼈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놀라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눈을 감고 중얼중얼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말합니다. 그 말 패턴이 거의 유사합니다. "남쪽으로 가지 말라! 물을 조심하라! 무덤을 옮겨라! 집터가 쎄다! 몇 년 안에 초상을 치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백 만원 들여 굿을 하게 하고, 부적을 사게 합니다.

그런데도 점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사사건건 점을 칩니다. 왜 그렇게 점에 매달립니까? 가장 큰 이유를 두 가지 들라고 하면 하나는 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죄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 축복을 얻는 3대 비결 >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방황한 후 축복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게 되었을 때 모세가 죽기 전에 행한 고별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이 고별설교에는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축복 받는 3가지 비결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4절과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은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우상을 반드시 빼앗깁니다. 돈을 우상으로 삼으면 돈을 빼앗기고, 권력을 우상으로 삼으면 권력을 빼앗기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앞세운 우상으로 삼으면 자녀도 빼앗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돈과 권력과 자녀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자기를 지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우지 않으면 진짜 능력 있는 삶, 진짜 축복된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스승인 비노바 바베는 사람들이 길에 배설한 분뇨 치우는 일을 일종의 예배와 기도로 여기고 단 하루도 그 일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은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청소하는 일, 설거지하는 일, 남이 싫어하는 천한 일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의 재료입니다.

왜 흐르는 강이 썩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앞 물결이 뒷 물결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지울 줄 알아야 영혼이 건강하게 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도 맑아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에고(ego)'가 살아있는 한 결코 진정한 축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시험과 문제를 허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에 알튼 링크 레터란 박사 학위를 열 개 가진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고문으로 디즈니랜드의 모든 설계를 계획한 분입니다. 대통령도 그를 귀하게 여겼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그렇게 부와 명성을 얻으면서 그는 어릴 때부터 믿던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사랑하는 14세 된 딸이 가출하며 이런 편지를 남겼습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살게요." 그리고 며칠 후에 딸의 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딸의 시체를 안고 통곡했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더니 딸도 자기 곁을 떠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교회로 돌아왔고, 그후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상처를 극복하고 전보다 더 기쁘고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주 신앙강연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네 가지 성공 비결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 네 가지 성공비결이란 겸손, 인내, 용기, 하나님의 인도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있을수록 더 겸손하고, 엄청난 시련이 있어도 인내해야 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용기 있게 일어서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앞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얻는 비결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전심으로 사랑할 때 진정한 축복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도 예뻐지고, 생각도 예뻐지고, 얼굴도 예뻐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축복은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웃어도 복이 오지만 사랑하면 반드시 복이 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멀리 하고 진정한 축복을 받는 길은 없습니다.

17세기 미국 신앙부흥 운동을 일으킨 요나단 에드워드 부부는 12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백 년 후에 보니까 그들의 후손 팔백 명 중에 600명 이상이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가와 경제인 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종학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가문이 되었는가?" 하고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유전자 때문도 아니고, 교육 때문도 아니고 사랑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산다면 그처럼 위대한 가문의 창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 말은 말씀 중심적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 중심적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씀 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미래의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그 말씀 중심적인 삶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7절 말씀대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이자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이 선물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자녀들을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에고(ego)'에 부모들이 따라갑니다. 아이들을 조금만 야단치면 어떤 어머니는 말합니다. "왜 남의 아이를 기죽이세요." 심지어는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 자녀를 야단쳐서 기분 나쁘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상하고 불행한 행동이 그런 행동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래서 야단을 친다면 "내가 부모로서 져야 할 십자가를 저분이 지고 있구나! 정말 감사한 일이다. 젊은 선생님이지만 정말 존경해 드려야지!"라고 생각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부모들은 어린아이의 기를 살리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올바르게 키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8절과 9절을 보면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 그처럼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부담이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인생 전체의 짐을 더는 길이고, 말씀을 멀리하면 부담은 없는 것 같아도 인생길은 더욱 고단하게 됩니다. 요새처럼 시대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속에서만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그 사람과 한참 상담을 한 후에 처방을 내렸습니다. "특별한 증세는 없고 안정이 필요하니 조용한 산에서 며칠 쉬세요." 그리고 편지 봉투를 하나를 주며 "산에서 뜯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산에 가서 편지를 뜯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그래서 신중히 들어보니까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등이 귓가에 들렸습니다. 그런 소리 속에서 이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동시에 자기의 병을 자기의 병을 발견했습니다. 자기의 병은 '마음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 병'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불안은 떠나지 않고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불편한 환경이고 불행한 환경이라도 말씀을 붙들고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범인들이 인질을 붙잡고 돈을 요구하다 대개 돈도 못 얻고 결국 총에 맞아 죽습니다. 남미의 어떤 사람은 성당에 들어가 마리아 상을 인질로 붙잡고 돈을 요구하다가 결국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붙잡고 돈을 요구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치 내 행복과 축복을 위한 인질처럼 끈질기게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가장 복된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저렇게 하는 믿는 사람의 이중적 생활이 전도를 얼마나 막는지 모릅니다. 신경질을 잘 내는 어떤 교인에게 누군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너는 신경질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은 말씀을 장식처럼 달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0-12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고 배부르게 하시면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조금 가지게 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그 가진 것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축복을 받았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한다면 그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 때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일 년에 몇 번밖에 목욕탕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 묵은 때를 벗길 때 본전 생각난다고 이태리 타월로 심하게 비벼 몸 전체가 빨갛게 되었던 일이 바로 얼마 전의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잘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잘 믿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지난 5천년 역사 중에 어느 때보다 잘 살게 되었는데, 저는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금방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앗아가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지속적인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또한 어떤 것을 잃어도 감사하는 삶만은 잃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도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죽음의 길에서도 찬미하고 갔는데, 어떤 분은 십자가는커녕 변변치 않은 개나리 봇짐 하나만 져도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너무 적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크게 생각하면 어떤 고통에서도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어떤 분은 두 아이가 다 말썽꾸러기입니다. 한 아이는 수시로 가출을 합니다. 또 한 아이는 집에는 붙어있지만 공부가 가장 밑바닥입니다. 이쯤 되면 웬만한 가정에서는 죽느니 사느니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한데 그분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옛날에 몸을 팔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면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고 자식도 얻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했기에 어떤 상황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보고 감사를 체질화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축복을 진짜 축복으로 만들고 회복과 치유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치유 받았지만 그 중에 한 명만 감사하러 왔습니다. 9명은 육신은 치유 받았지만 영혼과 인격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러 온 한 명은 영혼과 인격까지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삶은 치유의 완성이요, 축복의 완결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도 닷새만 되면 주인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 "비전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지는 삶'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초적인 것이 바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 축복을 나누며 사십시오 >

오늘 축복을 얻는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자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진정한 내게 주어진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와 구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최대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입니다

전도란 복음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복음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축복도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내 것을 퍼내지 않으면 반드시 내 안에서 썩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내 것을 나눠주어야 내가 더 깨끗해지고, 결국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축복을 나눠주면 나눔 받는 사람도 복을 받지만 나눠주는 사람이 더 복을 받게 됩니다.

독일의 어떤 수도원에 무대 체질이 아닌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 테스트가 있는데 이 수도사는 수도원장에게 설교 시험만은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은 이 젊은 수도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설교를 시켰습니다. 난생 처음 설교하던 날, 강단에 올라가 수많은 동료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도저히 설교할 자신이 없어서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모든 청중들이 고개를 흔들며 모르겠다고 하자 이 수도사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사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끝내자 원장이 이 수도사에게 다음날 다시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강단에 올라간 이 수도사는 다시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시를 하니까 이 수도사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데 제가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아는 대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펄펄 뛰면서 다음날도 또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날에도 이 젊은 수도사는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그러자 절반은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절반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수도사는 "아는 분은 모르는 분에게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라!"는 이 한 마디가 그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나누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축복을 받은 자'가 '축복을 받아야 할 자'에게 받은 축복을 나누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축복 많이 받으시고 그 받은 축복을 나눠주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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