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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욥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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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8:5-7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시작과 마침

  오늘 드디어 2003년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주일이 되면 항상 하는 말씀이 있지요?  “이제는 과거를 잊고 새 출발 합시다!”  “금년은 접어 두고 내년을 기약합시다!”  세상 사람들도 忘年會를 하면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7절을 보면 시작과 마침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  여기에 “시작”이란 말과 “나중”이란 말이 나옵니다.  “시작”이란 말은 히브리 말로 “레쉬트”인데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시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나중”이란 말은 히브리 말로 “아하리트”인데 시간적으로 나중 부분, 마침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작과 나중!  사물의 출발과 종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시작과 마침은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시작과 마침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세요.  인간이 벌이는 일 가운데 시작과 마침에는 언제나 큰 행사를 벌입니다.  회사가 업무를 시작할 때 시무식이 있습니다.  큰 공사를 시작할 때는 기공식이 있습니다.  어떤 직분을 맡은 자에게는 취임식이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 장관 취임식, 총장 취임식, 사장 취임식... 중요한 행사에는 개막식이 있습니다.  올림픽 개막식, 월드컵 개막식, 전국체전 개회식, 총회 개회식.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무슨 일을 시작할 때마다 의식이 있습니다.  개회 예배, 개업 예배, 창립 예배.... 마칠 때도 그렇습니다.  폐회식, 폐막식, 종업식, 졸업식, 준공식, 해단식, 임종 예배 등등.  年末年始는 그런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흥분합니다.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서울의 보신각에서, 동경에서, 런던, 파리...전 세계 사람들이 마침과 시작에 기대를 걸고 환호합니다. 
  시작과 마침은 하나님께서도 중요한 의미를 두십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끝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란 말은 시작과 끝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 이런 별명이 붙여진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시작하시고 마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작과 마침이 삶의 가장크고  중요한 부분일까요?  일년의 마지막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본문은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통상 본문 구절은 개업식 때 선물하는 木刻 懸板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구입니다.  시작은 작지만 나중은 잘되라!  장사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뭐 그런 뜻으로 대개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해석입니다.  본문은 시작과 마침에 초점을 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정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한 말입니다.  욥은 지금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충격적인 재앙을 당하여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런 욥에게 빌닷이 이 말을 했습니다.  일견하여 위로와 축복의 말씀같지만 자세히 보면 욥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본문 말씀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 봅시다.  욥은 본래 가장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욥1:1-3)  신앙도 좋고 자녀도 많고 재산도 많은 최상의 인물입니다.  그런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가축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다 죽었습니다.  육체는 병이 들었습니다.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이런 욥의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위로 차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욥의 형편을 보니까 무슨 말을 할지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일주일을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2:12-13)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태어나지 않았더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욥의 말을 듣고 있던 세 친구들은 차례로 입을 열어 욥의 불평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삶에 비하여 분명히 뭔가 불공평한 재앙임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욥은 자신이 남들보다 분명히 신실하게 살았지만 뭔지 모르믄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재앙은 욥이나 자식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가운데 본문 빌닷의 말이 나왔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7절을 이해하려면 5절부터 봐야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5-7절)  무조건 시작은 작아도 나중은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청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시작해도 마침내 잘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재 욥이 고생하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얻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즉, 욥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고, 욥의 재산이 날아간 것은 욥의 숨은 죄악 때문이니, 바르게만 산다면 왜 창대해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오늘 만일 여러분이 욥의 형편에 있다면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떤 심정이 되겠습니까?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기껏 찾아 와서 한다는 말이, 네가 바르게만 살았다면 왜 잘 되지 않았겠느냐고 합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위로는커녕 기분 잡치는 말입니다.  아마 오늘 욥과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들이 있을겁니다.  나는 그래도 열심히 살았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의 형편은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바른 신앙 바른 생활만 유지한다면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 말씀은 위로의 말도 아니고 축복의 말도 아닙니다.  욥의 처지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일 욥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본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기분 나쁜 충고로만 여겨야 할까요?  아니면 별다른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본문에는 萬古不變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무슨 진리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시작과 마침만큼 과정도 중요하다

  첫째로, 시작이나 마침만큼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한 순간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전 과정입니다.  저는 이것을 <과정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세상 만사에 시작도 중요하고 마침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의 과정입니다.  삶의 성취는 결국 과정의 결과입니다.  오늘의 처지가 과거 삶의 과정의 산물이라면, 현재 내가 살아가는 과정은 내일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7절이 핵심이 아니라 5절 6절이 핵심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5-7절)  시작만 해 놓으면 다 창대해지는 게 아닙니다.  개업식, 시무식, 기공식, 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과정입니다.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나옵니다.  시작에서 곧바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라!  신실한 신앙 생활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청결하고 정직하라고 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삶이 바르게 진행될 때, 창대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욥이 당한 일을 다시 해석해 봅시다.  욥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정직한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입니다.  양심이 바른 사람입니다.  욥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는 욥기 29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욥29:14-17)  욥은 결코 지탄받을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그런데 이런 욥에게 왜 재앙이 내려졌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신앙도 좋고, 양심도 바르고, 생활도 바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힘든 일이 생깁니다.  몹쓸 병이 들기도 합니다.  재산을 잃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떻게 된 겁니까?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일이 거꾸로 되는 겁니까?  과정의 법칙은 없어진 겁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일년을 결산하는 이 시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일년간 정말 열심히 땀 흘리고 뛰었는데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면 과정의 법칙은 없는 겁니까?  욥이 신실하고 바르게 산 것이 헛것입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과정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욥이 당한 재앙은 재앙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런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과정을 어디까지 적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과정의 법칙을 단기간에만 적용하지 말고 길게 적용해보자는 말입니다.  욥의 인생 잘 될는지 안 될는지는 현재까지 만으로는 다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까지 보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잘못한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욥은 분명히 과거에 선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오늘까지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후 먼 미래, 죽는 날까지 적용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욥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을 보십시오.  욥기는 욥의 남은 생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42:12-17)  재산은 정확히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잃었던 열 명의 자식들 대신에 다시 열 명의 자식들을 얻었는데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자식들 전부가 미남 미녀들입니다.  잃었던 건강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장수의 복을 얻어 140 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의 처지만을 가지고 인생을 평가하지 마세요.  인생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과정의 법칙은 살아있습니다.  지난 1년간 살아온 땀과 노력의 효력이 살아 있습니다.  지난 일년간 바르게 살려고 애썼던 효력이 살아 있습니다.  지난 일년 간 하나님을 찾았던 경배와 기도의 효력이 살아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썼던 신앙의 효력이 살아 있습니다.  비록 현재 모든 열매를 다 거두지 못했다 해도 낙심하지마세요.  현재가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도 삶이 남아있습니다.  과정의 법칙은 우리 생애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자손 대대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결과를 천 대까지 적용하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과정 자체도 축복이다

  둘째로, 과정 자체도 하나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얻었는가로 평가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도 하나의 축복입니다.  결과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과정도 축복입니다.  내가 얻은 결과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내가 뭔가 행한 것 자체도 축복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에 보면 <아우구스투스>란 얘기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라는 젊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遺腹子를 낳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의 이웃에 빈스방거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상자에서 아름다운 천사의 음악을 들려주는 신비로운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엘리자베트 부인이 아이를 낳아 세례를 받은 직후에 이런 이상한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 집 음악상자에서 소리가 들려올 때에 아이를 위해서 한 가지 소원을 아이의 귀에 대고 빌어주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겁니다.  딱 한 가지 소원만 빌어야 합니다.”  노인이 약속한대로 저녁 때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부인은 아이를 위해서 빌어주고 싶은 소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빌어줘야 될지 모르고 우왕좌왕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갈 무렵 황급히 한 가지를 빌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란다!”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를 보는 사람마다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는 사람마다 이뻐하고 귀여워합니다.  아이가 버르장머리가 있든지 말든지, 고약한 짓을 하든지 말든지 모든 사람들은 좋아하기만 합니다.  청년이 되면서부터는 뭇 처녀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눈물로 사랑을 고백하는 처녀들이 사방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 사랑을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차겁고 냉정했습니다.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는 도취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어떤 후견인이 그를 도시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켜줬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방탕했습니다.  처녀들을 농락하는 것은 물론 시장 부인이나, 대사 부인과 같은 유부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돈 많은 부인들이 줄줄이 그를 사랑하고 돈을 대줬습니다.  그는 이런 돈으로 마음껏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별장에 사람들을 초청하여 매일 잔치를 벌이는가 하면,  도박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처녀들, 유부녀들, 심지어는 바람난 부인의 남편들까지도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할 뿐이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향락, 어떤 여자, 어떤 배부름에도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런 삶에 지치고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기로 결심합니다.  죽기는 죽되,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면서 죽을까?  그는 큰 파티를 열기로 하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도록 했습니다.  파티가 열리는 날 저녁 그는 키프로스 포도주에 독약을 타서 마실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파티에 왔다가 죽은 시체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고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런데 그가 독주를 마시려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빈스방거 노인입니다.  노인은 아우구스투스가 마시려던 잔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드신 포도주가 뭔지나 아세요?”  노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 독약은 내가 다 마셔버렸다.  나도 네 불행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세례를 받을 때에 네 어머니는 너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빌었단다.  비록 어리석은 소원이지만 나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지.  그 소원이 저주가 되어 버린 것이 가슴이 아프구나....아우구스투스, 이제 어떤 것이든지 네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니?  너는 아마 돈이나 재산을 바라지는 않을거야.  권력이나 여인의 사랑도.  그런 것들은 충분히 가져보았을 테니까.  잘 생각해 보렴.  망쳐버린 네 인생을 다시 좋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소원으로 빌려무나!”  아우구스투스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하다가 한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노인은 떠나갔고 그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파티에 온 사람들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빌려준 돈을 내 놓으라는 사람, 농락당한 여자들의 증오의 외침, 그 남편들의 보복, 해고된 하인들...모두가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두들겨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오물을 뒤집어썼습니다.  마침내는 결박당하고 끌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노인이 되었을 때입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거지같은 노인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심지어는 거리의 부랑자나 창녀, 의심과 적개심을 품은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했습니다.  빈민구호소에서 앓아 눕기도 하고, 거리를 방랑하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친절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키가 작아 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일, 수용소에 있는 노인들을 위로해 주는 일....등등.  때로는 오해를 사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은 것입니다.  는 빈스방거 노인의 품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처지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얻고, 무엇을 받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 보다는 사랑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입니다.  돈을 벌어 쌓아 놓는 것 보다는 돈 버는 과정이 행복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오직 합격만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과정은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  인생에서 합격의 순간만 중요하고 공부하는 과정은 불행해도 되는 겁니까?  인생에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행복이지만, 오히려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노력하는 과정도 행복입니다.  요즘 신혼부부들은 살림살이 대부분을 다 장만해 놓고 결혼식을 올립니다.  저는 그것을 상당히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결혼할 때에는 장롱 하나 마련한 것이 가장 큰 살림살이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재도구를 하나하나 사들였습니다.  선풍기 하나 사 놓고 온 가족이 한 달은 좋아합니다.  냉장고 하나 사놓고 또 몇 달 동안 좋아합니다.  전화를 집에 놓는 날은 너무나 좋아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장만해 놓고 시작합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부터 얻어 놓습니다.  삶의 과정은 아름다운 추억이 됩니다.  그 중요한 추억거리를 만들 기회를 원천 봉쇄 당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니 얼마 황량합니까?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신혼부부들은 살다가 싫으면 그냥 헤어집니다.  함께 나눌 추억도 없고 미련도 없습니다.  삶의 과정은 그 자체로써도 하나의 행복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시점에 와 있습니다.  시작에 비하면 마감 때의 모습이 초라해 보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은 어디로 간 겁니까?  그러나 시야를 조금만 더 넓혀 보세요.  우리 인생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앞날이 창창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법칙이 있습니다.  과정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결과만 보시지 않고 과정을 보십니다.  신앙의 과정을 보십니다.  삶의 과정을 보십니다.  비록 내 삶의 과정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해도 여전히 과정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와 응답이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행복은 삶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도 얻어집니다.  목표 달성도 중요하지만 목표를 향해 뛰는 과정도 행복입니다.  과정 자체도 행복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 기대한 만큼의 성취를 못했다 해도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계속 보고 계십니다.  시작이 미약했을지라도 나중은 필경 창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경주하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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