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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고 싶은 교회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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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행2:42-47
제목: 가고 싶은 교회

  어느 한 크리스챤 아들이 70대의 노모에게 ‘요즘 교회 가기가 싫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은 3가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리가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가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그래도 교회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 꼭 가야 할 3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교회에 가는 것은 너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둘째 교회를 가야 깨닫고 배우고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정말 꼭 교회에 가야 할 이유는, 네가 바로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현대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예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교회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생활이 즐겁지 않고,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4년은 우리 교회가 세워진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느덧 우리교회가 서른살의 견실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많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또 다른 비전과 꿈을 갖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교회가 많은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로 거듭나야 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고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2월은 성경에 나타난 교회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초대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주시는 교회 상은 한마디로 ‘가고 싶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은 늘 교회가 가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그들은 모였다가 헤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함께 살았습니다. 도대체 이처럼 가고 싶은 교회로 만들었던 힘의 동력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감동적인 예배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선적으로 배우는 교훈은 초대 교회에 예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을 다 언급합니다. 46절에 모이기를 힘썼다,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리고 42절에 기도와 말씀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진정한 기쁨은 바로 예배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로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에 뭉클한 감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환희를 맛보고, 내 마음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 바로 그런 교회가 가고 싶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예배의 감동이 흘러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위해 물론 인도하는 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제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섭니다. 인도자의 어떤 영성과 힘이 감동을 창출해 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성령으로 예배를 이끌어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동적인 예배는 결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자체가 혼자 드리지 않기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참여가 감동의 예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초대교회의 예배는 ‘디아코니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가 성도의 임무인 것처럼, 예배를 위한 예배자의 봉사,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한 우리의 봉사를 위해 적어도 2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피곤’부터 조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피곤하면 천하장사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현대를 향한 사탄의 전략은 토요일 주말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좋은 것을 이 시간에 다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영상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밤늦게까지 그런 시간을 갖고 피로가 풀리지 않은 채 주일 예배에 나와 어떻게 감동의 예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동의 예배는 우선 피곤부터 잡아야 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조절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예배에 나올 때 피곤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자꾸 보는 것으로 생각하면 예배하러 나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배는 나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합니다. 호흡이 같고, 손발이 맞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감동의 예배가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과 입이 열려야 합니다. 감동의 예배는 예배자의 입이 열릴 때 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은 하늘나라의 예배장면을 감동적으로 보고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찬란한 보좌가 한 복판에 있습니다. 그 보좌를 둘러서 네 생물이 있고, 24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러선 많은 천사가 있고, 마지막에는 온 성도들과 만물들이 둘러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예배광경입니다. 그런데 그 보좌를 둘러선 존재들이 보좌를 향하여 뭔가 계속 말하는 것, 영어로 say, saying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감동을 받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찬송도 같이 불러야 하고, 기도도 함께 해야 합니다. 아멘도 힘있게 해야 합니다. 이제 피곤을 조절하고, 영적 감각과 센스를 가지고, 감동의 예배를 만드는데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풍성한 교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배와 함께 '교제'를 강조합니다. 42절에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모두는 교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헤어지기 싫어한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교제와 사랑이 이들로 하여금 가고 싶게 하고, 머물고 싶게 하고, 헤어지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 이 교제를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종종 사용하는 말이기에 기억해 두십시오.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 코이노니아, 교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기 싫은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고, 미워하고, 싸우는 순간부터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교제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나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제가 풍성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사람들은 세상과 다른 면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늘 다툼과 갈등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보니까 가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만재’ 라는 사람이 쓴 저서 가운데 ‘교회에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던, 다니는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를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그것을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이 다르지 않더라,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지더라’ 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세상처럼 지방색이 있고, 교회에서도 학력을 내세우고,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심 많고, 자기 이름 내려고 하고, 시기와 질투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참 거슬리더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싶고, 예수는 참 좋으나 교회는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장례가 나면 많은 성도들이 슬픔을 당한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가까운 곳부터 심지어는 먼 지방까지 마다하지 않고 갑니다. 성도가 아파할 때, 함께 있어 슬퍼하고, 함께 찬송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이 교제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기쁠 때보다 슬플 때, 더 우리의 사랑과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거기에 깊은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는 탁구의 붐이 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토요일이면 성도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얼마나 열심히 치는지 바닥의 타일이 다 벗겨질 정도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탁구장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탁구를 통해 성도의 교제가 깊어진다면 이것보다 귀한 교제의 수단이 없습니다. 열심히 탁구를 치시면서 교제하시되, 싸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이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람들이 좋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사람들과 사랑이 깊어지는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오고 싶은 그런 교회로 만들어 야 합니다. 이 일에 사명을 갖고 모두 힘을 다하여 수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42절에 그것을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이 있기 전, 베드로의 설교를 강조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위해, 그 말씀 앞에 성도들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해가 지도록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 말씀 앞에 펑펑 울고, 자기의 마음과 옷을 찢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들의 육체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날마다 새로웠습니다. 영을 살리고, 살찌게 하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었기에 그들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끝까지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가고 싶은 교회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쓰러지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때, 오직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 때문에 나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말씀이 은혜롭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가 모두 말씀앞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처럼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당시 성도들은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바울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마음으로 사사로우 감정이나 인간적인 견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럴 때 그 말씀이 그들 속에서 놀라운 힘과 역사로 솟구쳤던 것입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연설이나 웅변도 아닙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도 이벤트도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나를 깨우고, 바로 세우기 위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케르그마’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전쟁에서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은 나를 향해 하나님이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이 은혜롭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것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그 밭이 4가지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와 돌짝, 가시덤불과 그리고 옥토입니다. 여기에서 씨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뿌려지는데 어떤 밭에서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가를 알려주셨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밭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 앞에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냥 소리로 듣고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은 말씀을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고 비껴 가는 것입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은 말씀 앞에 교만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옥토와 같은 마음은 이 세 가지의 모든 잘못을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건성으로 듣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참으로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의 밭을 일구어 은혜로운 말씀이 날마다 선포되고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가고 싶은 교회입니다. 내가 우선 가고 싶고, 다른 사람을 끌고 오고 싶은 교회입니다. 바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만나면 떠나지 않을 정도로 교회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디아코니아, 감동의 예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이노니아, 풍성한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르그마, 은혜로운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0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가 정말 이런 교회가 되도록 나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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