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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새부대가 되십시오 / 눅 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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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새부대가 되십시오
누가복음 5장33-39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을 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유대인들이 말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난 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십니까”

유대인들 사이에 신앙의 전통 중에 금식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금식을 그렇게 정해놓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그들은 그때에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특별히 속죄일이 될 때에는 일년에 한 번씩 누구나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대제사장이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입니다.말하자면 민족적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그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누가5:34-35).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생베조각과 가죽부대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 새포도주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새부대란 무엇입니까?

가죽부대는 (아스쿠-스)물이나 술을 넣기 위해 사용되는 부대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현재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죽부대가 새 부대가 되어야 새술을 넣는다라고 말합니다.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기존의 자기들의 고정틀에 맞추어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정틀에 예수님을 보았을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일때 자기들의 고정관념,틀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나는 믿음이라고 하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나의 편견과 나의 성격을 믿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새포도주와 같이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신앙의 새부대를 회복해야 합니까?

1. 정죄보다는 은혜를 더 강조하는 신앙이 되십시오

유대인들은 항상 모든 것을 정죄하였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 인생들은 세상이란 곳에서 항상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삶의 모습들을 보아왔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정죄의 틀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금식하는 신앙은 옳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신앙은 틀리다라고 정죄합니다.
이것은 금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을 평가할 때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을 기준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정죄하였습니다.

율법을 보면 크게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마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말 이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까? 그러나 그들도 ‘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 대해서는 은혜로왔습니다. 그 율법은 자기들에게 적용하라고 주었는데 남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정죄하기 보다는 은혜를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의 은혜, 사랑의 은혜를 강조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는데 유대인들이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치라 멍하엿습니다.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여기에서 만일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을 치라고 하면 사랑이 없는 분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면 율법을 어기는 공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셧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하셨고 죄인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조건없이 용서하여주시고 죄의 값인 죽음을 담당하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은헤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백성된 우리도 은혜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은혜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자신에 대해서도 은혜로와야 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도 은혜로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도 나의 성격적인 약점 때문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주의”라는 못된 버릇입니다.제자신도 힘이 많이 들었고 저의 아내도 저 때문에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집이 잘 정돈되어야 마음이 편하고 책상이 잘 정돈이 되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리고 옷도 항상 깨끗해야 하고 신발도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시험을 칠때면 한 3-4주정도부터 준비를 해서 최소한 서너번 마스터를 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설교도 원고가 6장 정도되는데 이것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야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새벽이나 금요일이나 주일에 원고를 씁니다. 그러나 때로 원고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을 너무 완전하게 하려고 하다보니까 자신에 대해서 늘 만족하지 못했습니다.그리고 여유가 없고 자유가 없었습니다. 사실 완전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완전하지 못하면 나는 못난이’라고 하는 스스로의 틀에 주님을 맞춘 것입니다.조금 내가 못하고 부족하여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인정하십니다. 주님은 1등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꼴찌도 사랑하십니다. 지금은 제가 완전주의를 많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자신에 대해서 여유를 부립니다.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은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용납하고 서로 수용하여 줄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서로 함깨 어울려 교회생활을 하다가 보면 분명히 우리가 서로 흠이 있고 단점과 결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정죄하지 마시고 그때 은혜로 덮어줄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 교회에서 이렇게 저렇게 들려오는 많은 정죄의 소리를 듣고 있고 많은 판단을 보고 있습니다.여기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신앙의 문제,금식의 문제를 갖고 따진 것처럼 우리는 섣부른 지식과 생각으로 따지고 서로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주인으로 있는 집입니다.

특히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갈 때 경제논리와 세상적인 계산의 논리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는 예수님 앞에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갖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싼 향유의 값을 계산하여보면 나드 한근 약 300데나리온의 값입니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년 벌어야 벌 수 있는 많은 돈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1000만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일년동안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입니다. 그 돈을 한순간에 에수님의 발에 부었을때 다 허비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예수님의 12제자중에 가롯유다가 말햇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허비합니까?”“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닙니까?” 낭비하는 여인을 판단하였습니다. 머리가 이상한 여인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가만히 두어라 저는 지금 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이다 ” 라고 하였습니다.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인 생각이고 멋있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롯유다의 세상적인 생각과 잘못된 동기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회 속에서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상식으로 모든 것을 풀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도 은혜를 서로 적용하면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수만 있다면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은혜를 허용하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형식과 전통보다는 예수님을 더 강조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전통,금식의 전통을 강조하였습니다.물론 때로 좋은 전통은 우리가 강조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이 우상이 되거나 형식이 원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전통은 중요하지만 전통주의자가 되어버리면 위험합니다.

전통주의자가 되어서 금식에 매이고 안식일에 매이면 결국 그 형식과 전통에 매이는 죽은 신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전통과 형식은 하나의 그릇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밥을 먹을때에 어떤 그릇에 먹는가? 그것의 맛이 다릅니다. 때라서 일정한 형식은 필요합니다. 가령 금식이라고 하는 형식은 우리가 믿음 생활에서 필요합니다.

구약에 보면 금식의 대표적인 사건이 2건이 있습니다.
첫번째 사무엘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기도했습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굉장한 위기입니다.
법궤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은 하나님이 저들을 떠났다고 하는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법궤를 빼앗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 사무엘은 삼상7장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에 금식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합니다.

두번째로 느헤미야의 금식입니다.
느 1장 4절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 성전은 무너지고 나라는 빼앗겼을 때에도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금식기도를 들으시고 결국 느혜미야가 에루살렘성을 중건하는 축복을 갖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금식을 신앙의 중요한 전통으로서 강조하엿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먼저 와서 사역을 한 세례요한도 금식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금식하는 것을 많이 따라했습니다.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많은 사역을 했습니다.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음식도 가장 소박한 음식을 먹었고,옷도 몸을 가릴 정도의 옷을 입었습니다.그리고 그는 금식을 했습니다.그러면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이것이 세례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식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금식을 해야만 영적이고 금식을 하지 않으면 비영적이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고 안먹고 어떤 날을 지키고 안지키고 이것보다 얼마나 우리 속에 예수님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금식이 좋은 전통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이 오히려 주님을 제한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좋은 전통들이 주님을 오히려 제한하는 위험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속에는 많은 전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통들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3년간 새부대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화를 이루면서 노력햇습니다. 우선 일차적으로 양육과 훈련 시스템을 먼저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들은 새가족양육을 받도록 합니다. 그리고 학습과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도 5주간 양육을 받도록 합니다. 그리고 교회 평신도 일꾼들 되시는 분들은 제자훈련과 사역자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다음에는 우리 교회가 시도한 것은 관계중심,필요중심의 구조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구역모임도 종래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목장모임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중심으로 뭉친 남여전도회대신 은사를 중심으로 교회의 필요를 따라 사역시스템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관계중심의 전도를 할 수 있도록 열린전도소그룹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부대 즉 구조를 바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복음으로 전도하고 주님의 제자로 잘 양육하여 세상을 다시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절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때가 되고 상황이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또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변하지 않지만 주님을 만나는 길,주님을 증거하는 방법은 분명히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적으로 프로그램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떤 형식에 매이는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던지 기도를 하던지 그 형식자체에 매이게 되면 주인이신 주님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신앙의 엑기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경험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그런데 우리가 제도와 전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구조와 틀로 변화를 시도할 때 꼭 감당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4년쯤에 제 아내가 처음 차를 배워서 저에게 차키를 달라고 하엿을때 제가 한달동안 주지못했습니다. 그 실력을 믿지를 못해서입니다.한달정도 지나고 나서 키를 주면서도 얼마나 내심 불안한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때로 옆에 타고 갈 때에는 불안하여 타기기 싫습니다. 그러나 나의 염려와 불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를 잘 운전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여자 집사님이 차를 운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남자 집사님이 바빠서 운전을 못하니까 여자 집사님이 대신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찬찬히 운전을 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여자들이 운전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못미더워하였을까요? 지금까지 운전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 때문에 그 생각이 고정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주님이 원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하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의 질문입니다.그때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고전 중에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신문을 만드실까?”“예수님이라면 재산을 어떻게 활용하실까?”“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삶을 살았을까?” 하는 질문을 갖고 삶 속에서 적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교회 속에서 우리가 이런 질문을 갖고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성경의 문자보다는 의미와 정신을 더 강조하십시오

금식을 문자적으로 지켰는가?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문자적인 실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상으로 그 말씀의 의미 정신을 더 강조하셨습니다.이것은 문자적으로 지키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로 어떤 정신으로 지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령 “성령을 읽으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무조건 1번 읽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의미와 정신을 알고 행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우리가 금식을 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금식을 통해서 영적인 정신이 바로 회복되는 것입니다.만일 금식을 문자적으로 실천하였지만 오히려 우리 손에 그냥 피가 있고 우리 삶에 그냥 주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남아있다면 그 금식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중심의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문자적으로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문자로 기록되었고 무오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거나 해석하고 적용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의미와 정신입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는 몸으로 간음하지 않으면 나는 간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문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이미 그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문자도 중요하지만 더 강조하는 것은 그 정신입니다. 그 의미입니다. 몸으로 간음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이미 간음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몸으로 실천하는 것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당시에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주님이 강조하는 핵심 의미와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의미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말씀을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그런데 여러분 누가 깨닫게 해줍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님 역사하여 주셔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여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을때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고 바로 지킬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가는 말 )  여러분 우리가 본질이 변질되고 낡은 신앙의 모습으로 헌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속적이 자기 갱신과 자기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과 전통과 옛습관들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삶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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