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 날개 밑 즐거워라 (시 91:1-6)

  • 잡초 잡초
  • 1061
  • 0

첨부 1



시편 91:1-6
주 날개 밑 즐거워라

날개란 새나 곤충의 몸에 붙어 있어서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쓰이는 몸의 한 부분을 말합니다. 또 비행기 몸체의 양쪽에 붙은 넓고 긴 조각을 말합니다. 이 날개란 단어는 구약성경에 107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여 번만 문자적인 의미로 새의 날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날개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91편 4절에 보면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사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는 사람은 이처럼 안전합니다. 지존자, 가장 존귀한 자이신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특성입니다. 성도의 생활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휴식처로 삼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불안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지거나 빼앗기지는 않을까, 사업이 어려워지지는 않을까, 몸이 좀 아픈 이유는 불치의 병에 걸린 때문이 아닐까, 뜻하지 않은 재난이 닥치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때로는 이유 있는 불안에 살지만, 많은 경우 막연한 불안 속에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내 능력과 내 손이 닿지 못하는 부분까지 하나님이 돌보시고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생활이 행복해서가 아닙니다. 문제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보호처, 그 그늘 아래 있으므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믿음의 대상에게 전적으로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혼자 캄캄한 밤에 밖에 나가려면 두려워서 웁니다. 그런데 똑같은 밤이라도 아빠의 손을 붙들고 밖에 나가면 콧노래를 부르고, 별을 바라보면서 걸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며 세상을 이겨 나가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도처도처에서 하나님이 그 크신 날개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감싸주시고 덮어주심을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이 시간에는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본문 4절 말씀을 근거로, 찬송가 478장의 “주 날개 밑 즐거워라”라는 후렴을 제목 삼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랑의 날개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은 그 날개 품안에 계란을 품어서 21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오직 병아리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기만을 고대합니다. 암탉에 안긴 계란이 부화되면 어미 닭은 기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낮이나 밤을 막론하고 자기 새끼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아니합니다.

만일 위험이 병아리들에게 다가오면 그 암탉의 고유한 소리로 병아리들을 모읍니다. 하늘 높이 날던 솔개가 다가오면 암탉은 그 날개 품 안으로 병아리들을 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다해 병아리들을 보호합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선교사가 시골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아침에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묵은 농부의 닭장에 모이를 주러 갔는데, 어미 닭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날개 밑에서 고개를 내밀고 삐약대고 있는데, 모이를 주려고 해도 이 닭이 그대로 있자, 이상해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주인이 오더니 상황을 알아채고 설명합니다. 지난밤에 족제비가 이 닭장에 들어온 모양이군요. 어미 닭은 자기 피를 족제비에게 다 빨리면서도 혹시 병아리들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하여 꼼짝도 않고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말이 받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품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사랑의 넓은 가슴을 활짝 여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은 그 분의 품 안에 있습니다. 마치 병아리들의 구원이 어미 닭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품속을 떠나 자유로운 세상에서 놀고 있지만, 일기가 불순하거나 고약한 동물들이 올 때에는 오직 그들의 피난처인 어미 닭 품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염려 근심 걱정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 주님의 품 안입니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멘으로 믿으면서 주님 주시는 평안을 안고 세상을 이겨 나가는 존재들 모두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 날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나를 운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세상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운반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말씀에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삶의 고비 고비들을 넘겨야 했습니다. 때로는 많은 불평과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례자는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운반하고 있다는 은혜의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제가 어느 기도원에 갈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막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40일 금식기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 분은 오랫동안 금식을 했어도 얼굴이 빛나고 몸도 강건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40일 금식기도하신 분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숨어서 혼자 뭘 드신 것이 아닙니까?” 농담으로 말을 건넸더니,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요, 혼자 잘 먹었죠. 그것은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이었답니다. 말씀을 먹고 은혜를 실컷 먹었습니다.

물론 40일 금식기도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힘든 고비 고비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행을 하면서 금식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 저도 하나님 날개에 엎혀 40일을 은혜 가운데 지냈을 뿐입니다.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하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해 있는 것이 과연 내 힘과 노력과 열심만으로 되어진 일입니까? 내가 잘 나서 오늘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똑똑하고 대단해서 입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업어 인도하셨기에 오늘 이 모습으로 살아감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이 나를 운반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그 은혜를 매일매일 누리고 체험하고 감사하며 사는 존재들이 모두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한치 앞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5분 후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내가 앞을 열어나가고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날개에 엎어 운반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 이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 날개로 우리를 훈련시켜 주십니다. 신명기 32장 11절 말씀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였습니다.

짤막한 구절 속에 새끼 독수리를 훈련하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의 제왕이 된 것은 가혹한 훈련 때문입니다. 알에서 금방 나온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나 꿩 새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훈련과 연단을 통해 새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든다고 합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곳에 둥지를 틀고, 거기 자기 털이나 부드러운 것으로 폭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거기에 알을 까서 새끼를 기릅니다.

독수리 새끼는 아무 염려 없이 어미가 물어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시끄럽게 떠들면서 기분 좋게 지냅니다. 눈만 뜨면 파란 하늘이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집니다. 새끼들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폭신한 깃털 침대도 밖으로 물어 던지고, 둥지를 흔들어 새끼들을 밀어냅니다. 새끼들은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어리둥절해 합니다. 다른 새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저 집 어미 독수리가 심술을 부린다’고 수근댑니다.

위기를 느낀 새끼들이 둥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어미 독수리는 날개를 너풀거려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새끼들이 곤두박질하며 땅에 떨어질 무렵 어미 독수리는 그 새끼를 자기 날개로 다시 받아서 둥지 위로 올려놓았다가 다시 그 일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반복하면서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의 비행훈련을 시키고 강인한 날짐승으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대부분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만족해” 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나날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깁니다. 마음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고, 자녀들에게 뜻밖에 어려움이 닥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날개로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고 판단해도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때론 어려운 시련이 닥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두 번은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되어지는 여러 일들을 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불안합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참 많습니다. 신문을 펴 들 때마다 우울한 기사거리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불안요인이나 가슴 아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보금자리에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를 자주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살 수 없구나. 이래가지고는 도무지 않되겠구나. 하나님을 믿자” 이런 마음이 우러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사로 여기고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자, 독수리 새끼가 둥우리에서 기어 나오면 어미 독수리는 사정없이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나 죽는다’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어미는 공중에서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어미는 쏜살같이 내려가서 힘있는 날개로 안전하게 다시 받아 높은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어미 독수리는 이 훈련을 반복합니다. 언제까지 합니까? 새끼가 자기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연속적으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지쳐버리고 때로는 너무 힘들어 감당하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가 바로 이런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모진 훈련을 하십니까? 높은 하늘을 힘 있게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길 때까지입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땅에 부딪치게 하여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듯이,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망하도록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계속 연단시키지만, 절대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여건인데도 이상하게 하루하루를 넘긴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을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날개 밑에 거하며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편히 쉬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덧입으며, 힘찬 믿음의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 하늘을 맘껏 나는 신앙인이 되기까지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 날개 밑에 거하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