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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 /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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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
본문 : 고후 5:17

그리스도인인지 비 그리스인인지를 외모만 보아서는 분간할 수 없지만, 그 삶을 들여다보면 판이하게 다릅니다. 다 같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영적인 소속으로 치자면 전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후자는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또 전자는 빛에 속한 사람이고 후자는 어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만큼 그 생각하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하셔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지만, 비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감화가 없으므로 각자의 욕심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다니지 아니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증거 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받게 되는 은총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먼저 그의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은 결과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의 영뿐 아니라 육신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모든 불행의 일차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생겨났습니다. 땀 흘려 수고하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적에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만드셨으나 범죄로 인해 정신과 육체 속에 부조화가 생겨났습니다. 교만과 욕심과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온갖 종류의 결함과 질병이 육체에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알고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아야 의사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죄인이 스스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아는 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입니다.

시몬은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하루는 밤새껏 수고했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와서 배를 해변에 대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해변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빈 배에 오르신 후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으신 채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얼마후,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일을 행한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시몬이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몬은 그 놀라운 일을 보았을 때 나사렛 예수의 신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앞에 앉아 계신 나사렛 예수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절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시몬은 너무도 확연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의 마음눈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이에 예수께서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자기의 추한 모습이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 자신의 추한 모습이 드러날 때 전율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주님의 용서가 뒤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무서워 말라” 하시는 음성과 함께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오늘도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물론,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시기가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일찍 이 사실을 깨닫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나중에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가 꽤나 의로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예수 믿고 나자 그렇게 추악한 죄인인줄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죄의 은총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추악한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철저하게 알게 되어야만 비로소 구세주를 믿게 됩니다. 죄 사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죄를 깨끗하게 씻겨줍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살인마 고재봉에 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군에 입대해서 소속 부대장인 박 중령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고재봉에게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나 봅니다. 박 중령은 고재봉의 손버릇을 고치겠다고 그를 헌병대로 넘겼고, 이로 인해 그만 7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고재봉은 교도소를 나오는 길로 박 중령 일가를 몰살하고 자살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밤중에 박 중령의 집을 찾아가서 도끼로 일가족을 살해하고 났을 때, 자기가 죽인 가족이 박 중령 가족이 아니고 새로 부임한 이덕주 중령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고재봉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안국선이라는 집사님이 교도소로 고재봉을 면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 집사님은 무조건 요한복음 3장 16절로 20절까지를 읽고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가 누구신가를 전했습니다. 단 15분 동안 전도한 것밖에 없는데, 성령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안 집사님이 전해준 성경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날, 고재봉은 교도소가 떠나가리만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놈들아! 왜 나에게 진작 예수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예수를 조금만 일찍이 알았던들, 한 발짝만 일찍 예수를 알았던들 무고한 사람이 여섯씩이나 죽지는 않았을 것을. .." 그는 통곡하면서 그 말을 밤새도록 소리쳤다고 합니다.

살인마로 낙인찍힌 고재봉은 그로부터 교도소에서 열성적으로 전도했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사형 당하는 날, 사형집행인에게 “예수 믿으시오” 당부하고 찬송을 부르며 평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죄 사함의 은총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서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다 치르셨으므로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님들께서는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더 이상 죄책감에 괴로워할 이유가 없으며, 날마다 죄 사함 받은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병든 마음이 치유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가 접하는 뉴스 가운데는 끔찍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부정부패, 살인, 강도, 강간, 납치, 인신매매, 사기, 방화사건 등등 입에 담기도 싫은 흉측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날이 어두워지면 바깥출입을 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범죄가 빈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사회적인 불평등과 불합리한 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이 악한 데 있습니다.

요즘 와서 갑자기 범죄 건수가 늘어나는 것은 지금이 과거보다 사람들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악한 생각이 행동으로 표출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돈이 인격을 대신하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또 사람들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엽기적인 사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타락한 사회상은 새로운 법이나 제도를 만든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병들어 있는 한 개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0)…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슨 수로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칠 수 있을까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 당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일을 했으므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니 많은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나사렛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는 곧장 거리로 나왔습니다.

저 앞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서 오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는 유난히 키가 작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길가에 서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명색이 세리장인 사람이 뽕나무 위에 올라가다니,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체면불고하고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는 나무를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얼마나 파격적인 배려입니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를 보고 수근거리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대할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좀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어렸을 적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식석상에서는 만나도 일부러 모른 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태도에 감격했습니다. 그는 서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번 돈인데,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더 이상 돈만 아는 수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삭개오의 병들었던 마음이 치유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삭개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9:).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 가족과 이웃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그의 병든 영혼을 치유해 주시니 경건하고 사랑이 충만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여성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데, 이는 그만큼 그의 봉사와 헌신이 두드러졌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노숙자의 명의를 빌려서 거액의 불법 자금을 운영해 온 사실이 밝혀져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또 정치가들이 불법 자금을 수백억이나 거둔 일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남을 위한 봉사를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이 병들면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가져도 만족이 없고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폭식증 환자가 음식을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먹으려는 것처럼 돈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재물을 가져도 가져도 족한 줄을 모릅니다.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까지 들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병들고 눈멀고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향해 “…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고 했는데, 현대인들이 처한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웃은 없고 경쟁자만 있습니다. 강도인 마귀를 만나 노략질 당하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줄 사람은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망에서 건짐 받아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 역시 영혼의 강도 만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전도해서 듣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를 받는 사람들은 강도인 마귀에게 약탈당해서 거반 죽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면 많은 수고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할 때 수많은 영혼이 치유받고 새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그가 어떤 삶의 목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돈을 모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무시해 버립니다. 사회 정의나 봉사와 같은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요즘 거의 모든 범죄가 돈과 관련해서 생겨나는 것을 보면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데도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죽을 목숨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 돈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할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를 이단으로 알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찬성표를 던졌으며 그를 죽이는 자들의 옷을 맡아 지킴으로써 그 사건의 증인노릇을 자처했습니다. 또 대제사장에게 가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해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가 살기등등해서 성전 근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메섹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정오의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모두 땅바닥에 엎드러졌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들리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빛 가운데서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큰 능력 가운데 나타나신 것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빛 때문에 소경이 된 그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다메섹에 들어가 어느 골방에서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사흘 후에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사울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평생을 헌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알고 증오했던 그가 자신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고 했습니다.

이처럼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세상적인 가치관을 심어주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답게 삶의 목표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회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고, 전도하는데도 유리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가능하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자선사업도 크게 하고, 장학금도 많이 내어 인재들을 길러내고, 선교사들을 적극후원해서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재능과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칼이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강도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어떤 목적으로 칼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판이한 결과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건강과 재능과 물질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느냐, 아니면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삶의 목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삶의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므로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름과 겉모양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그 삶의 내용이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으며, 병든 마음을 치유 받았고, 삶의 목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오리 새끼는 물로 가고 꿩 새끼는 산으로 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 본성이 그렇게 명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억지로 그리스도인처럼 살려고 하면 너무나 힘이 들어서 금방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힘들지 않고 즐겁습니다.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거룩한 신분을 올바로 자각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심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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