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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이런 자를 도우신다/ 대하 32: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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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런 자를 도우신다/ 역대하 32:1~8, 20~21

지금은 IMF 시대보다 더 살기가 힘들다는 말들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IMF 시대의 위기보다도 더 심각하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의 중심에는 통치자의 리더십에 대한 불안이나 불신이 많이 깔려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고, 다양한 국민의 소리를 통합하며, 내일을 위한 비전을 보여주어야 할 대통령이 제자리를 제대로 지키면서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할 때 나라가 어려워지기 쉬움을 우리는 익히 잘 압니다. 여론 조사를 통해 보는 바와 같이 국가 통치자의 리더십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전 국민의 반 이상이나 됩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통해서 아주 기막힌 글을 읽었습니다. 도올 김용옥 박사 하면 우리 나라의 지성인 중의 지성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향은 진보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 참여정부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는 인사라고 알고 있는데, 이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국정이 흔들리고 있다. 민생이 풍전등화와도 같은 벼랑길로 치닫고 있다. 노무현 당신은 통치를 포기하고 있다. 국가를 우습게 알고 국민을 우롱하며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말로 위기만을 모면하고 있다. 대통령 노릇 못해 먹겠다고? 우리도 이제 국민 노릇 못해 먹겠다. 진보의 명분도 확보 못하고, 보수의 기강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당장 대통령을 때려 치우시오." 이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지 100일이 넘을까 말까 한 초반기에 이런 말을 듣는 지도자가 되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통령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이 나라의 형편을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야당에 속했던, 여당에 속했던 상관없이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초창기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도 즉시 제자리를 잡고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줘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통치자가 잘못 판단하여 실정을 했다고 합시다. 나라가 얼마나 어지러워지겠습니까? 정치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네 탓, 내 탓 하면서 정치인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싸움에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가 잘못됩니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물러납니다. 무역이 막힙니다. 실업이 속출합니다. 빈부격차가 계속 벌어집니다. 이런 나라에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를 안심하고 학교에 맡길 수 없을 만큼 가슴에 증오를 품은 살벌한 교사들, 이런 교사들이 큰 소리를 치는 교육환경. 우리가 어떻게 안심하고 학교에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기적인 소리만을 가지고 함부로 집단 행동을 하면서 나라를 무질서로 만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소리치는데, 이런 것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나라, 질서를 세우지 못하는 나라가 과연 소망이 있겠습니까? 나라가 어떻게 되든 예수를 잘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근심, 걱정 없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굉장히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 불신자를 떠나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호'라는 한 배를 타고 거친 물결이 소용돌이 치는 바다를 지금 항해하고 있습니다. 선장이 실수하면 우리는 함께 위험을 당합니다. 배에 화재가 나도 우리는 크게 다칩니다. 빙하와 부딪혀도 우리는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폭풍이 몰려와도 우리는 고생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 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잘 믿는 사람도 곤고한 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히스기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가정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나라 때문에, 지도자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히스기야를 보면 우리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도 곤고한 날이 올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런 곤고한 날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기는 길인가를 히스기야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히스기야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두 동강이 난 유대나라 남왕국의 13번째 왕입니다. 그가 25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매우 악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했는지,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어놓은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기구들을 치워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도록 우상과 재단을 만들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혀놓은 왕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얼마나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는지, 왕이면 당연히 묻혀야 될 왕릉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른 데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악한 왕, 영적으로 잘못된 왕 아래에 히스기야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왕상18:5) 앞뒤로 아무리 살펴보아도 히스기야처럼 성실한 믿음의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변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지독하게 악한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믿음 좋은 성군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영향이었습니다. 어미 아비야는 경건한 제사장 스가랴의 딸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이 여성은 신앙으로 잘 자라 이제 왕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자녀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버지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자녀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은 어머니가 끼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좋지 않으면 아이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철저하면 아이 역시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엄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더럽혀놓은 성전을 깨끗하게 치우고,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전으로 다시 정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라 곳곳에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모여서 우상을 섬기도록 만든 산장들과 우상들을 다 치웠습니다. 그래서 나라 전부를 개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백성들이 잊어버린 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나라가 부패했는지 수백 년 동안 그 절기를 지키지 않다가 히스기야가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또 섬기고 있는 히스기야에게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재미있는 용어가 하나 나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이 말은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나라를 정화시키고, 우상 숭배를 없애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선정을 베푸는 이런 충성된 일을 한 후를 말합니다. 또한 이 말을 현대어 번역에서는 좀더 아름답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토록 귀한 일들을 모두 수행하여 자신의 진실함을 하나님께 증명한 다음에'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앗수르 왕 산혜립이 유다를 침공하는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평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히스기야가 인간적으로 판단했다면 불평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가 전국에 있는 우상을 다 치우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자고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면 이 나라가 복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앗수르가 이 나라를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내 체면이 뭐가 됩니까?' 하지만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가 불평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해도 어려운 일이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바로 대처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안겨주실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위대했던 것은 위기를 만났을 때에라도 평안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그 자세를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성실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히스기야가 위대한 점이며,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이나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져 마음에 갈등을 겪고 있진 않습니까?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나라가 잘못되면 내가 당할 수 밖에 없고,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판단 잘못하면 내가 실직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흔히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야베스가 기도해서 응답 받은 것처럼 환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근심 없는 인생을 살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는 달리 갑자기 어려운 일이 터졌을 때에 혹시 마음 속에 어떤 불안한 생각, 불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히스기야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통해 우리는 3가지를 교훈받게 됩니다.

첫째로 히스기야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구하기 전에, 또 구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3~5절까지 내용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왕으로서 적군이 쳐들어올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군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적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장기전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나아가 적군을 물리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골몰히 생각하면서 부하들과 의논한 후 자기 손에 미치는 데까지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예루살렘 남쪽에 기혼샘이라고 하는 수원지가 있습니다. 유대나라는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물이 솟는 큰 샘이 있어 여기로부터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다 기드론 골짜기 양편에 있는 과수원에 물을 대기도 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수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대가 쳐들어오자 '앗수르 군대가 물을 구하기가 어렵도록 만들자.'라고 의합하여 수로를 전부 묻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군대가 물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지하 500 m 거리에 터널을 파서 그 기혼샘에서 나오는 생수를 그대로 끌어서 예루살렘 성안으로 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포위를 당해도 성 안에서는 물이 귀해가지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대책을 다 세워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곽이 무너진 곳은 다시 증축했습니다. 망대를 다시 손질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을 재정비하고,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한 것입니다.

가끔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원에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기도 좀 해야 되겠다.' 하고 기도원에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원에 가서 안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1주일, 2주일, 오래 있다 보면 세상만사 다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려와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세상살기가 겁이 나 또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바른 태도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는 기도하더라도 내려와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뭐냐? 하나님이 모두 다 하실 수 있도록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 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어딘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일하라고 준 양손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열심히 뛰라고 한 양 발을 놀리지 않습니다. 머리를 쓰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나는 평소보다도 시간을 2,3배로 더 투자한다. 그래야만 평범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집회 인도를 하면서 참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니는 똑똑한 젊은 청년인데,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졸업 후 한국에 들어오자니 취업하기가 너무 어려을 것 같아 미국에 있는 회사에다가 지원(apply)했습니다. 미국도 어렵긴 매일반이지만 이 젊은이가 기도하면서 회사에 '어플라이'(apply)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자그마치 천 여개의 회사에 서류를 넣으면서 문을 두드렸다는 점입니다. 결국은 좋은 회사를 만나 지금은 미국에 잘 정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만 하고 엎드려 있으면 안됩니다. 두드려야 합니다. 열 번 두드려서 안되면 백 번 두드리고, 백 번 두드려서 안되면 천 번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줄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학생들을 가만히 보면 공부하기 싫고, 직장 구하는 것 때문에 머리 아프니까 교회 와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슴이 뜨거우니까 신학교까지 갑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7절, 8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백성들을 놓고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쫓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꼭 믿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무엇에 근거해서 이렇게 큰 소리를 칩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신명이 28장에 나오는 말씀을 그가 기억하고 믿었다고 봅니다.

신명기 28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7절을 보면 이 약속이 좀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히스기야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 다음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하나님의 나라를 깨끗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성전을 깨끗하게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면, 전쟁이나 기근이 나도 말씀에 약속하신 그대로 반드시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이렇게 자신 있게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기억합니까?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라.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고 너로 인하여 전 세계 민족이 복을 받게 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혈육 한 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지극히 적은 소수의 부족의 한 족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비교할 때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무명인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을 통해서 세상에 복을 받게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또 역사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진실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만큼 창대한 이름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복을 많이 받은 민족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늘의 복을, 하늘의 구원을 얻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믿었습니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 하늘에서 뜹니다. 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녁이면 해가 서쪽 하늘로 집니다. 이것 역시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해놓은 말씀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절대 의심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반드시 순종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해당되고,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안 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틀림없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을 눈 앞에 두면, 막상 위기 앞에 서면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곤 합니다. 가장 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허황한 것처럼 생각하고 밀쳐내는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자리에 거꾸로 믿음을 차 버리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목사도 그렇고, 장로고 그렇고, 권사도 그렇고, 집사도 그렇고, 순장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어떤 어려운 위기 앞에 서면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 문제를 좀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으면서 히스기야가 믿음을 통해서 이겼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마음이 들떠서 예배 마치고 나갑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니 너무 캄캄하여 마음이 또 약해지고, 불안해지고,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생을 험하게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또 험하게 살지 아니한 사람에 비해서는 험하게 산 사람입니다. 지나간 제 나날들을 돌아볼 때 신학교를 다니고, 부 목사에 이어 목사가 되었지만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말씀이 곧이 곧 대로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기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진짜 믿음이 없어서 일어나는 현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명한 변증학 교수이자 기독교의 탁월한 문학자였던 C.S 루이스가 나름 대로 멋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음은 이성에 기초를 둡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이성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우리는 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역시 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데 중요한 부분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면, 어려움에 처하면 이 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흔드는 장애물이 생깁니다. 그것이 상상력을 동원하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쓸데없는 불길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직도 내 눈 앞에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미리 끄집어 내가지고 미리 공상하여 불길한 생각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밤잠을 못 자고 눈이 벌개서 일어나곤 합니다. 기도한다고 엎드렸는데 정작 기도는 안하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들면 감정은 불안 쪽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점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감정이 내 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흔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결국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루이스가 참 멋진 정의를 내렸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성이 받아들인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기분이 바뀔지라도 그대로 고수하는 기술이다." 기술이라는 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믿음도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을 통해서 좋은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감정이, 기분이 이상하게 나를 끌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감정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적당하게 감정을 차에서 내어버리는, 발로 차버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정에 계속 끌려 다니면 안됩니다. 그것이 내 믿음을 흔들기 시작하면 발로 차 버려야 됩니다. 기도할 때도 발로 차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변덕이 심한 기분에 끌려 다니면서 믿다가 말다가 하지 않아야 됩니다. 믿음은 냉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항상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에서 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까? 냉정하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위기를 대처하는 훈련이 잘 안되어 감정에 왔다 갔다 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그것은 히스기야가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이성에 근거한 냉정한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훈련된 기술, 훈련된 습관을 갖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만약 감정 때문에 왔다 갔다 하면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바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왓슨이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 듯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팽팽하게 부푼 튜브와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거센 고통의 바다에 빠져도 그 튜브만 잡으면, 하나님의 약속만 잡으면,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히스기야처럼 확 붙들면 튜브를 가슴에 안은 어린애처럼 물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감정에 끌려 다니지 말고 냉정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에게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인가? 아니면 나의 흔들리는 믿음인가? 어느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히스기야는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20절 이하를 보면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9장을 보면, 앗수르 왕 산혜립이 쳐들어와서 협박하자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혼자 기도하기가 힘들 때에는 선지자 이사야를 불러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왕하19:20) 그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환란을 이기게 하는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기도는 환란에서 쓰러지지 않게 하는 가장 강한 버팀목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역경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역경을 호전시켜주셔서 오히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 15절 말씀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가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히스기야는 이 약속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군대를 하룻밤에 시체로 만들어버리고 겨우 남은 몇 사람 만이 도망갔는데, 결국 그들과 함께 도망간 왕은 나중에 자기 아들의 손에 살해를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앗수르 왕궁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앗수르 군대가 진멸됩니다. 기도하는 사람 앞에 앗수르 군대가 물러갑니다.

제가 어느 잡지에서 콕스라고 하는 미국의 젊은 부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내용은 평범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겪을 수 있고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어서 제가 유심히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콕스 부부는 세상배기 아이와 이제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부부입니다. 남편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부실경영으로 인해서 그만 남편이 실직을 했습니다. 모아놓았던 돈은 둘째 아이를 해산하면서 거의 다 써버리고 바닥이 났습니다. 알다시피 그냥 벌어서 사는 사람들은 돈을 어디 크게 쓸 데가 있어 써버리면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부부가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밤마다 부부가 앉아서 말씀을 펴놓고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참 감동적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위기에서 건져주세요. 아빠에게 직장을 주세요." 

어느 날 저녁에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곧 이방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 먹고 마시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꼭 붙들고 같이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 우선에 두자. 하나님의 나라를 걱정하고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에 두자.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우리가 돈 이야기를 하면서 손 내밀지 말자." 그러나 아침이 되면 남편은 직장을 구하러 나가고, 어린애들을 데리고 이제 집안에 남아 있는 아내는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금방 은혜를 주시고, 해가 뜨면 하나님께서 직장을 주셔서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사실 아무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지고, 불길한 생각들이 자꾸 마음을 흔듭니다. 철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불쌍해 죽겠고, 자기 모습도 너무나 처량하고, 그래서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죽고 싶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계속 끌려가게 됩니다. 이러면서 여러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기도하면서 힘을 얻었지만, 낮에는 이런 여러 가지 찾아오는 어려운 심리적인 갈등 때문에 고통하는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교회에서 인사를 하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한 것입니다. "이상하게 당신 가정 생각이 자꾸 나요. 당신 집안 생각이 자꾸 나요. 이 생각을 내가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상하죠.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세요?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주면 좋겠네요."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다가 너무 진지하게 물어 오자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가 실직 중이어서 지금 무일푼이랍니다." "아, 그래요?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해 줄게요. 하나님이 어려움 중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1주일 후 교회 친구 한 명이 지나가면서 봉투를 건네주었습니다. 열어보니까 5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자기들이 갖고 있던 전체 재산은 39센트 밖에 없었기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장도 보고 애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 다음에는 부부가 앉아서 "하나님,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두 주간이 지나자 그 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아직도 직장은 구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일학교에서 잠깐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부목사님 한 분이 달려오더니 봉투 하나를 전해줍니다. 어떤 분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말고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뜯어보니 15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보내주시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넉 달이 지난 후에 남편은 신발을 팔고 있는 큰 가게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봉급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그 첫 봉급을 앞에 놓고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2가지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없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했다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간절히 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때가 되어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을 압박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가 무엇입니까? 가난입니까? 실직입니까? 육체의 질병입니까? 아니면 자녀 문제입니까? 여러분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기 위해 그 동안 최선을 다했는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서 충성했는데, 생각지도 않는 어려운 일을 당해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럴 때 히스기야를 마음에 떠올리고 그를 배우고 닮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을 위해서 약속하신 말씀이라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붙들고 그 약속을 100% 믿으십시오. 그 약속을 믿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때가 되어 우리의 앗수르 군대를 다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과거에 상상하지 못하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좋으신 우리 하나님, 반드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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