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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창 22: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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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창세기 22 : 1 - 9


메시야 사상이 극명하게 나타난 성경을 특별히 구분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있어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이면적 정신사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오실 메시야의 성격을 유감없이 나타낸 이른바 메시야 장이라고 불리울만큼 장차 나타날 메시야의 사상이 균형있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갈라 세웠습니다(창 12:1). 이때 아브라함은 고향과 혈육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보다 혈통보다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고 하는 것이 복입니다. 자식보다 부모보다 더 사랑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가는데 아쉬움이 없었던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부터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라놓는 작업을 계속하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으로부터 갈라놓고자 하시므로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혈육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본문 22장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22장 15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부르셨고 두 번째는 여호와의 사자가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변함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백 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과의 이별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예정된 작업일 뿐이었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은

Ⅰ.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 는 말씀입니다.

본문 22장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짐승을 잡아 죽여서 각을 뜨고, 피를 뿌리고, 제물을 불사르는 기본 제사입니다. 이 번제 행위를 아브라함은 경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번제 행위는 곧 예배를 의미합니다. 이 번제 행위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객관적 계시입니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삼는 이 엄청난 일을 아브라함 자신이 계획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에 의심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의구심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고 믿는 것입니다. 번제로 드릴 번제물은 바로 그가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는 외아들입니다. 그는 아브라함 가(家)에 웃음을 주었던 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 가(家)에 기쁨을 주었던 아들입니다. 바로 이 아들이 번제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예배의 장소는 브엘세바가 아닌 모리아 땅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장소입니다.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기도하신 겟세마네입니다. 여기쯤 어딘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 않고 지정된 장소에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 곳에서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릴 지정된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1) 예배를 위하여 나아갔습니다.
본문 22장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라고 했습니다. 지시하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3일 동안 걸어서 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 지시하신 곳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들과 사환을 떼어놓고 부자(父子)는 모리아산으로 가고 있었습니다(창 22:6). 마침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창 22:8-9). 사환들을 떼어놓고 두 사람만 제단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신약 예배의 생명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예 떼어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2) 예배를 위하여 준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까지 나아갔습니다(창 22:3). 번제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제물을 태울 불과 그 제물을 잡을 칼은 아브라함이 친히 손에 들고 나아갔습니다(창 22:6).

3) 영의 인도함을 받은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번제물로 드리면서 자기 아내 사라와는 아무 의논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오겠다"고만 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지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아들이 물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놓았다"고만 대답했습니다(창 22:8). 모리아 산을 향하여 가는 사흘동안 아브라함의 육과 영의 심한 싸움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것이 결정이고 집행이지 다른 순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4) 결단하는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 제사에 숙달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장소에 제단을 만들고 이삭을 결박해서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칼을 하늘로 치켜올려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할 때입니다(창 22:9-10). 이때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면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리라는 것을 믿었지(히 11:19) 내가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무슨 다른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보다 분명히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증거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식보다, 돈보다,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증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호와 이레 계시입니다.

본문 22장 13-14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 되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손에 잡혀 하늘로 치켜든 칼이 이삭을 향해 내려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연속해서 들려오는 음성 앞에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 일도 그 아이에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창 22:12). 그를 불러준 이는 바로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창 22:11). 하나님이 여기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났습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창 22:12). 그리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서 그 수양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묵시적인 계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세상 죄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배의 절정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 있습니다(요 1:29).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과정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하나님의 심정을 맛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결박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결박될 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결박된 삶을 살지 않는 성도는 구원받은 증거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드리라고 하시는 줄만 알았지 수양을 준비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자신이 자식을 죽이는 살인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연보가 재산의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세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금식기도가 밥을 굶기 때문에 건강에 해가 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신앙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철야기도가 막연히 잠을 못 자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또한 신앙세계가 아닙니다.

모리아 산에서 수양을 못 만나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는 살인자가 됩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 중에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하고 가면 헛고생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셔서 보좌우편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심판의 주로 오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가면 우리의 소망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삶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의 보은 행위입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계시입니다.

본문 22장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아울러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는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실 줄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후법(後法)이 우선 적용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줄 아노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Ⅳ. 아브라함을 통한 축복계시입니다.

본문 22장 16절에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했습니다.

1) 큰 복을 주심입니다.
본문 22장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복입니다.

2) 영적 후손의 복입니다.
본문 22장 17절에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지난날에 주었던 언약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도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후손의 씨를 많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3) 승리의 복입니다.
본문 22장 17절에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문은 성내의 사람들이 안전을 도모하는 방어문입니다. 문을 얻는다는 말은 성읍을 점령하고 그 성읍을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원수들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할 것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 외에 보다 깊은 영적 의미는 장차 신약에 나타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복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7-9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Ⅴ.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는 자들의 사명계시입니다.

본문 22장 13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고 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만난 수양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신 이삭을 대신할 제물입니다. 이 수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에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죄에 대한 보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속죄를 위한 자기 희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도 모르시고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친히 자원해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아오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 10:38, 마 16:24, 막8:34, 눅 9:23에{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는 자기 십자가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보은의 행위입니다. ① 자기 신앙고백의 사명입니다. ② 예수를 따라가는 사명입니다. ③ 자기 부정의 사명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한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얼마만큼 하지 않느냐 그때 주님이 하고 싶은 것을 하십니다. ④ 자기 희생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은 결과를 먼저 보고 덤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그 계시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으로, 모리아산 골고다에서 그의 삶의 절정을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모리아산에서 그의 존재의의와 목적을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의 삶의 절정은 하나님의 요구를 성취시킬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는 와서 듣고 나를 만나고 가라 !
너희는 와서 듣고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고 가라 !
너희는 와서 듣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가라!
너희는 와서 듣는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한 축복을 체험하고 가라!
오늘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 교회에 와서 너의 존재 의의와 사명을 확인하고 가라"고 하십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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