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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 /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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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
빌3:12-16

많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속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간섭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고귀하게 생각하며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따지고 보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붙잡혀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에 끌려 살고, 어떤 이는 강한 육신의 욕망에 끌려 살고, 어떤 이는 술에, 약물에 끌려 살고, 세상의 명예나 권세에 끌려 삽니다.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학자는 르불랑이었습니다. 화학 공정에는 소다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소다를 만들기가 당시에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자연히 값도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수백만 프랑의 상금을 걸고 싸게 소다를 만드는 법을 찾았습니다. 여기에 당선된 이가 바로 르블랑 교수였습니다. 획기적인 원리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는 정부의 지원으로 공정 탑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소다는 싼값으로 대량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수백만 프랑의 거액이 내 수중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 혼란 야기되었습니다. 돈을 약속한 정부는 넘어지고 르불랑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꿈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르불랑 박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온가족과 제자들이 며칠 걸려서 겨우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설계하고 만든 공정 탑 속에서, 권총으로 자기 이마를 쏴 자살한 시체로 말입니다. 그는 돈과 명예 속에 붙들려 살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렇게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사는 인간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존재를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 사도도 예전에는 자신의 사상과 세상 적인 명예에 붙잡혀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헛된 철학과 그의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0도로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귀중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였습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다. 나는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선언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성경을 기록할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사인을 하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항상 이렇게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값 주고 사신 존재이다"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몸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으며, 자신의 마음의 중심과 사상과 생각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외치기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로 살아가는 바울은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였을까요?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 시간부터 바울의 인생은 비로소 빛나기 시작하였고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누리기 시작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독일의 나치 정권에 항거했던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본 히퍼라는 사람이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옥중 서신을 썼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한편의 시 형식으로 썼는데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고, 자신의 인생을 다른 것에 붙잡혀 살 때는 세상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삶을 살고, 예수님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빌3:7-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것이 그의 진정한 인생의 자유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붙잡혀 고통하며 살던 그의 삶이,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맛봅니다. 진정한 자유의 삶을 외치며, 진정한 삶의 목적과 가치에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사단의 세력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삶에 붙잡혀 세상의 물질에 노예의 삶이 되어서 살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돈의 노예가 되도록 하며, 세상의 권세나 명예의 노예가 되도록 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욕정과 욕망의 노예가 되도록 하여 마귀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결국 소중한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요즘 지상과 매스컴을 통하여서 보도되는 내용들 중에는 뇌물 수수 혐의를 받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을 여러분 보시지 않습니까? 마치 아간과 같이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에 붙잡혀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떤가를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붙잡혀 삽니까? 혹시 세상 것의 노예로 살거나, 썩어지고 사라질 헛된 세상 것에 얽매어서 하나님의 말씀도 떠나고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 붙잡혀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소홀히 여기고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3:12-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마다 목적이 있고 푯대가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그 목적에 노예가 되어서 참된 쉼과 평화를 놓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만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려고 발버둥치면서 거기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달려가야 할 온전한 방향을 설정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목적을 세우고 무조건 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도 돌아보지 않고 달립니다. 그러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을 비관하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또 설사 그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치 일곱 빛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이 헛것일 뿐이며 만족할 수 없고, 목적을 이루었을 때는, 시작할 때보다 더 허전하고 허무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개발국가 보다 부유한 복지국가에서 자살율이 높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적이 아니라 삶의 온전한 방향의 설정입니다. 이 방향만 분명히 세워 놓고는 달리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푯대"란 내가 세운 목적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노예 된 자로서 예수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예수님을 향한 방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14절에 "그리스도 안에서"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에 성숙한 성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잡혔다"라는 말은 포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모든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잡혀서 노예로, 포로로 수동적으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과 내가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과는 천지 차이인 것입니다. 이제는 마지못해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강권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를 거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손목을 잡으심으로 내가 예수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젠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도우심을 받아 내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앞에 있는 신령한 푯대를 잡으려고 좇아가자는 말씀입니다. 그 누가 좇아가라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적극적으로! 스스로 잡으려고 능동적으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삶이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이제는 송아지가 코뚜레에 코가 꿰어서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삶! 신앙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잡으려고 좇아가는 모습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직도 신앙의 코뚜레가 필요하신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자발적으로 주님의 푯대를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서 그 푯대를 향하여 스스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속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이요, 축복의 길로 가는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께 목표, 푯대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루고 잡으려고 계속적으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달려가시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붙잡힌 삶을 살 바에야 바울처럼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가 되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에 진정한 행복과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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