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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 받는 기도 /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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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응답 받는 기도
성경말씀 : 마가복음 11:20-25

오늘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서 기도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였습니다. 일요일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날 저녁, 베다니 마을로 가셔서 유숙하시고, 이튿날 아침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데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길가에 무화과나무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혹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잎사귀 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나무에게 이르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심으로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저들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날이 저물자 주님께서는 베나니 마을로 가셔서 유숙하셨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보니 어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쭙기를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같이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흔히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입니다.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나눕니다. 이 경우, 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 받는 수단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의 기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고 한갓 독백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된 신, 곧 우상들에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한 기도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는 “엘 샤다이”라는 호칭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대로 생겨났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하심을 창조 사역에만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타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큰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대를 이을 자식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나이 100세 되었을 때 90세난 사라의 몸을 통해서 독자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9절 이하에는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애굽인들을 벌하시고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해 내신 일이라든지, 홍해를 갈라 그 가운데 난 길로 건너게 하신 일이라든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이신 일이라든가, 요단강의 흐름이 그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일이라든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 보여 줍니다.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입증하는 기록을 삭제한다면 성경이 빈 표지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님에게 열 살 난 아이가 있는데, 서울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우표책을 사주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달이 넘어도 우표책이 오질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자기 친구들에게 “우리 할머니께서 나에게 우표책을 주셨어”라고 자랑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할머니에게서 우표책을 아직 받지 못했지 않니? 그런데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어떻하니?” 그러자 아이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더니 “엄마, 할머니께서 이미 약속하셨어요. 그러니 얻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아이에게 “얘야, 할머니께서 약속을 잊으셨나 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재빨리 대답하기를 “아니에요. 엄마, 할머니는 절대로 잊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지금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쓰면 어떨까요?” 아이는 곧 할머니에게 감사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할머니의 답장이 왔습니다. “내 사랑하는 손자야, 나는 결코 너에게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단다. 나는 네가 갖고 싶어 하는 우표책을 사러 갔으나 이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별도로 주문을 하였으니 우표책이 오는 대로 보내주마. 사랑하는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아이는 환한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것 보세요. 엄마, 내가 뭐라고 말했어요? 할머니께서 약속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신실함이 부족해서 한 번 약속하고서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 민수기 23장 19절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의 느낌과 경험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상관치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또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므로 항상 우리에게 유익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사정과 형편을 아실뿐 아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신 로마서 8장 28절 말씀과 같이,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잘못되면 “이것은 제가 하나님께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혹은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구하니 네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마, 그러나 그 결과는 네가 책임져야 돼” 그렇게 행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어찌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 아닌지를 살피신 후에 제일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고 간구하심으로 최선의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인내를 가지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즉시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도는 곧바로 응답되지만, 어떤 기도는 응답이 더딘 것도 있습니다. 응답의 시기를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꼭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처음 얼마 동안 기도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기도를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낙심케 만듭니다.

우리 역시 사람인지라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낙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다려도 후사가 없자 자기의 충복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으려고 하였고, 10년이 지나도 후사가 없자 여종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낙심했다는 증거입니다.

욥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요 동방의 의인이었으나, 어느 날 졸지에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잃고, 그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망을 잃지 않았으나 점점 고통이 심해지자 낙심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라고 탄식했습니다.

다윗도 계속해서 많은 환난과 역경에 처하게 되자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됩니다’고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시 42:6).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왕비 이세벨의 위협을 당하자 낙심하여 광야로 도망가서 어느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죽기를 구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위인들도 때로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발휘해서 낙심을 이기고 위기를 벗어나서 승리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과부가 자주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이 과부의 요청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혹 뇌물이라도 갖다 바치면 몰라도, 빈손으로 와서 하소연만 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과부는 낙망치 않고 계속 찾아가서 하소연했습니다. 한 동안 과부의 요청을 무시하던 재판관의 마음에 번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과부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그 과부가 도무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 재판장이 한 말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의한 재판관을 자비하신 하나님과 대조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지만 결코 과부를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칭찬하신 사람은 재판관이 아니라 과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 일면식도 없는 재판관, 그것도 불의한 재판관으로 소문난 사람을 찾아가서 호소하는 과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웬만한 사람 같으면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불퇴전의 끈기로써 그 완고한 재판관을 굴복시켜 그의 원한을 해결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분이 아니시고 긍휼하심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응답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기도하되 낙망치 말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나 금방 이루어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지 가장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솔로몬은 말하기를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했습니다. 곡식이 자라는 것은 좋지만, 계절과 시기에 맞게 자라야지, 미리 웃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때가 언제인지 잘 모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그 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즉시 응답해 주시지 않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이었다’고 회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단 없이 기도하되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아름다운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알아둘 것은 기도는 응답받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응답을 늦추실 때가 있습니다. 간절하게 구하지도 않았는데 선뜻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 모르고 낭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부르짖어 간구한 결과 응답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귀한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귀한 만큼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 그만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복권 열풍이 한창인데, 복권이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된 사람치고 결과가 좋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자 그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랑방탕하다가 결국 인생을 망치고 만다고 합니다. 그러나 땀 흘려 재산을 모은 사람은 돈이 많다고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소중히 여겨 선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응답을 원하십니까? 응답을 받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심으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고 하셨습니다. 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불화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기도해 보았자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어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할지라도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또는 기도할 의욕이 생기지 않거든 우리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용서가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할 담력을 얻게 되고, 우리의 기도는 의인의 간구로 인정받아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온 몸이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해 줌으로써 기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문제를 만나도 기도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기도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하시거든, 먼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그 다음, 인내를 가지고 끈기 있게 기도하십시오. 불의한 재판관을 굴복시킨 과부와 같이 응답을 받기까지 물러서지 말고 간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기꺼이 용서함으로 기도를 방해하는 막힌 담을 헐어버리십시오.

오늘 말씀해 드린 이 세 가지 원칙을 기도 생활에 적용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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