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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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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14~24)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사 기도하시던 중에 그 모습이 변형되는 기적을 보이셨을 때 베드로가 황홀경에 사로 잡혀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산꼭대기가 무엇이 좋기에 “여기가 좋겠사오니”하였겠습니까.
우리 소망의 성도들도 그 어디든지 “주 예수와 함께 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17과 18을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까요?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 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벙어리 귀신이 들렸나이다.
“거꾸러지며, 거품을 흘리면서 이를 박박 갈면서 숨이 넘어가나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고치질 못하더이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는 제자들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제자는 손을 얹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소리를 치며 외쳤을찌도 모릅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의심 많던 도마나. 기회주의자였던 가롯유다는 잘 안되니까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병은 고쳐지지를 않았고 애만 더 고생고생 시킨 듯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의 트집만 잡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아! 낫긴 뭘 나아 아 보라니까? 진작 병원엘 데려간다든지 약을 먹이든지 아! 저 말죽거리에 유명한 점쟁이한테 갔어야지.
생긴 것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
그래서 14절을 보세요!!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여기 변론이란 말은 “떠들어대며, 난리법석을 떨더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 그 자리에 문제의 해결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정말 난감한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을 하는데도 어려운 난관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런데 왜 이런 난관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까?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요?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첫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자기들의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이전에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기적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 6:7절에서는 “12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내가 낳은 자녀들이니 내 방식대로 교육하면 잘 될 것이라고 열심히 가르칩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 내 자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데로 키울 수 있도록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으로 나의 자녀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학교에 다니니까?
아! 성적도 잘― 나오고 있는데 뭘
아! 선생님께서도 뭐! 염려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것입니다.
아! 힘들면 비싸더라도 거 뭐야! 족집게 과외 있잖아!
에이! 그래도 안 되면 호적에서 파 버리지 뭘! 하십니까?
아니죠!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무릎을 꿇고 두 손과 두 무릎에 아버지의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서 아버지여! 내 자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교회 앞으로, 목사님 앞으로 데려와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머리가 될 찌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복을 선포해 주세요.

창 27:38절을 들어 보세요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 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 높여 울었다”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이와 같이 간구하는 아버지 아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그 축복을 내 자녀에게도 주시옵소서. 주여! 모세가 받았던 그 노년의 축복을 우리에게도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매월 한번씩 자녀축복새벽기도회를 합니다. 어린 유치부에서부터 청년까지 거의 1시간 동안 계속되는 축복기도회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도제목을 드리고 감사예물을 드리면서 강단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면서 한 무릎 한 무릎 씩 담임목사 앞으로 나아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이런 마음이 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주시겠는가?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복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것이로구나”그러나 그 시간에 잠재우는 것이 더 좋아서 곤히 잠든 것이 안쓰러워서 축복의 자리를 멀리 했다면 그 자리는 곤한 잠자리가 아니라 변론이 일어나는 문제의 자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문제가 생기기 전부터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면서 온 몸에 피 썩는 냄새를 풍겨대던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질 정도로 가까이 가까이 나와 있을 때에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가까이 따랐던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생명의 어부요 제자 중에서도 수석 제자가 되었습니다.
약 4:8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더라”
엡 2:17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린 지난 한 주간 주님을 어떤 모양으로 가까이 하셨습니까?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바울이 어떻게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학벌입니까? 재산입니까? 세상적인 명예 권세였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런 것들은 분토처럼 다 버렸다”하였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었을까요
바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갈 2:20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가까이 정도가 아니죠?
어디에 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랬더니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았다. 죽은 자도 살려내며 끝까지 변질되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의의 면류관까지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변질이 사라질 줄 믿습니다.
떠들어대며, 나리 법석을 떨어야 했던 일들도 다 조용해 질 줄을 믿습니다.

21절을 보세여!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 부터니이다”
참으로 오랜 고통거리였습니다.

22절에 보면
아예 귀신이 그 아이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자주 자주 던졌다”고 하였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죠!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면 흑인피부가 백인이 될 수 있을까요?
더 뜨겁게 기도하면 남자가 여자로 바뀔 수 있을까요?
마이클 잭슨을 보세요.
흑인의 얼굴을 백인의 피부로 바꾸니까 얼굴이 다 괴사가 되지 않습니까?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도 있고 아예 주민등록 번호도 바뀌었지만 그들의 여성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홀몬 주사를 맞아야 하기에 생명이 길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흑인이 백인으로, 백인이 흑인으로 바뀌는 것보다 더 안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악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 그것은 자꾸만 자꾸만 그런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 이 죄악의 성품입니다.
이 아비를 보세요!
오랜 세월 안 해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진작 예수 그리스도께 오질 않았을까요?
이제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 왔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서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외쳐 됩니다.

24절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별 방법을 다 썼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남편, 자녀 문제요? 그거 울고 불고, 변론하고 소리치고 싸우고 집나가도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부부싸움의 모습이나 아이를 몽둥이로 야단치는 모습이 불쌍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하는 모습에서 긍휼을 받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오래된 악한 성품이나 습성이라도 고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다 해결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내가 저질렀던 이전의 그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시며 흰눈처럼 희게 해 주신다.
태풍과도 같은 성령의 바람을 보내셔서 하늘의 구름이 공중의 분진을 다 날려보내듯이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나의 더러웠던 그 모든 것들은 다 물러가게 해 주신다.
우리로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불 속에도 던지고, 물속으로도 내 팽게치던 아이가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다같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할렐루야!

혹시 우리 주변에 포기했다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절망을 소망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당당하게 외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낙심하셨습니까?
아예 절망적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지금 나아오십시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외치십시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사도바울은 고후 1:8-9에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을 때 이는 죽은 자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시 50장에서는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너로 건지리라.”하였습니다.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질 않고 믿음으로 부르짖지 않는 것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서 다같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 처참한 모습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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