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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혼자 하는 생각1- 아버지의 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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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환 박사(형치과 병원장)

지난 7월 2일은 5년 전 아버지께서 소천하신 날이다. 아버지에 대한 많은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삶에 중대한 계기가 된 어떤 사건이나 교훈들을 기억해 보려면 딱히 생각나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당시 아버지의 소천 소식은 우리나라의 모든 일간지에 부고로 게재되었다. 같은 날 돌아가신 유명인사 중 누구보다도 크고 상세하게 게재된 그 기사의 타이틀은 ‘독립유공자 유OO 옹 별세’였다. 예상치 않았던 그 일은,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모든 장례절차를 무사히 마친 후, 아버지의 시신은 국가에서 준비한 예전에 따라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장성들보다도 더 훌륭한 위치에 의젓하게 묻혔다. 그 옆에는 그 배우자의 자리까지 있어, 후손들을 더욱 감사하게 만들었다.

의장대의 도열 사이로 태극기를 덮은 아버지의 관이 지나고, 조총부대를 포함한 많은 관계자들의 참여 속에, 대전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장례의전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생각했다. ‘그래, 아버지를 위해 이 많은 것들이 준비되고 동원되었다. 이것은 누가 보기에도 영예로운 것 아닌가?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이런 것을 기대라도 하셨습니까?’

건국훈장 애족장, 아버지가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으로, 국가로부터 유가족연금, 손자녀 학자금혜택 등 아직도 독립유공자로서의 예우가 상당하다. 무엇보다 명예가 있다. 혹자는 목숨을 잃고, 혹자는 감옥살이를 하며, 또는 이국 벌판에서 사투를 벌이며 수고한 이들에게 보여 준 해방된 조국에서의 예우, 그것은 국가가 지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정부수립 초기의 보훈행정이 적절했다고는 인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나라가 발전하고 위상을 갖추어갈수록 그 예우가 체계적으로 되어 감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가 조국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기간은 팔십평생에서 십분의 일도 안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3년 전인 1942년, 동경에서 조선인학우회사건으로 단기 5년, 장기 8년형을 선고받고 해주감옥에서 해방을 맞으셨다.

대학에서 교수, 아마추어 조각가, 화랑경영, 그리고 긴 와병. 세상에서의 호칭은 그 분의 20년 가까운 교직으로부터 온 유OO 교수였고, 우리들은 사실, 국가유공자라는, 심지어 원호대상자라는 뭔가 애조를 띤 호칭보다는, 그 호칭을 좋아했고 은근히 자랑스러워 했다.

빼앗긴 조국을 위한 아버지의 희생. 그것은 분명히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했던 장한 일일 수 있겠으나, 어찌 보면, 나를 낳아 준 조국에 대한 당연한 일이었다. 내 가족이며, 내 민족, 내 나라 아닌가? 그렇지만,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또는 그 처한 상태가 좋아 광복 자체를 바라지 않았기에, 또는 광복이 올 것이라는 최소한의 믿음도 없던 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이들의 희생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국가에 공을 세울 일이 있을까? 우리의 조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다면, 물론 나는 국가유공자의 후손이기에 당연히 국가를 위해 피를 뿌리리라. 그래야 한다. 우리가 목숨으로 지켜야 할 조국은 분명히 있다. 이 땅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곳에 있고 이 민족이 있었기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크고 중대한 조국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알게 되면, 세상의 것들은 이미 우리의 관심사를 벗어난다. 그것들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영적인 사건이기에, 영적인 존재들의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주셔서 겪게 되는 내면적 변화가 거듭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그는 세상을 포기하게 되며, 세상에서는 그를 점차로 때로는 급격히 포기하게 된다. 세상의 일로는 그를 붙들 수 없게 되며, 세상사가 관심사가 아니기에 취미도, 일을 하는 목적도 모두 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의 제일로 여기는 가치인, 목숨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어떤 하나의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광야의 생활을 시작한다. 거듭남이란 홍해, 즉 바다를 건넌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징으로 물에 한 번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나 같은 의미의 세례를 받는 것 아닌가? 애굽을 포기한 자 만이 가나안을 얻을 자격이 있다.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위해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 “유한한 것으로 영원한 것을 사라. 세상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사라. 발은 땅을 딛고 있어도 삶은 하늘의 삶을 살라.” 말은 하지만 실제로 한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하늘나라의 독립유공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것이 아버지가 남기신 가장 큰 교훈이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국내 8대 일간지에 부고가 실릴 일은 없지 않을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보다 훨씬 위대한 일들이 있지 않은가? 즉, 영원한 조국의 국가유공자가 되는 길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늘나라를 기다리던, 기다리지 않던, 노력을 하던 안하던, 그날은 반드시 온다. 그렇게 믿고 있지 않다면, 미안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종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공평하신 분임을 믿는다. 공평이란, 평등이란 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육십배 백배로 갚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나의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 모든 것을 주신 분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그뿐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자녀에게 그 분이 주시려는 것은 어떤 엄청난 것일까? 가령,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어떤 학생을 구해준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일은 어찌 보면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그 일을 몰라 주다고 해도 그 청년은 그 한 생명을 구한 일 자체로도 이미 기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학생의 부모님이 와서 엄청난 사례를 하고 국가에서 그를 용감한 시민으로 크게 표창했다고 하자. 그 또한 기쁜 일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받는 큰 보상,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 아닐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실까?

우리 집 안의 막내, 유동윤 목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 세 자녀, 부인과 함께 인도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아주 좋은 조건들을 뒤로 하고 어려운 선교지로 떠나는 그와 가족들을 보내며, 그를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이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기에, 그 삶을 이 땅에서 영위하고 있는 것이 하늘에서의 삶보다 더 좋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죽음이 어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불멸이다.” 요한 웨슬레의 말처럼, 빨리 데려가셨다면 우리가 이룬 일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표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랬듯, 스데반이 그랬듯,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바울이 그랬듯. 하나님을 만족시킨다는 것. 인간으로서 그 이상의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의 묘비명은 단 한 줄이다. 전 국회의원 아무개, 개그맨 아무개, 영화배우 아무개, 사업가 아무개. 인생을 농축하면 단 하나의 이름이 튀어 나온다. 그렇지만 앞의 이름들은 모두 세상의 이름이다. 영원한 나라에서는 통하는 이름이 아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영예로운 이름은 ‘순교자 아무개’인 것이다. 국가유공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좌 곁에 그들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영예로운 유공자의 이름은 ‘선교사 아무개’가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선교사이다. 예수님을 도와 영혼을 추수해야 하는 추수꾼들인 것이다. 교회의 목적도, ‘믿지 못하는 이웃들을 모아(선교하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혼들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 아닐까?

“가능하면 순교하십시오. 저 곳에서 만납시다.” 순교를 떠나는 이들에게 때론 육성으로 때론 마음속으로 축복삼아 빌어주는 말이다. 혹 알겠는가? 그의 부고와 환영사가 하늘나라 8대 일간지에 크게 실릴런지.

하늘나라는, 아버님이 생의 한 조각을 바쳐 죽기까지 조국에 헌신하셨듯이, 우리의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드려 죽기까지 헌신한 가치와 이유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희생이 클수록 영예로울 것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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