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3.1절] 민족역사의 부활 (1) - 신 32:6 - 7

  • 잡초 잡초
  • 315
  • 0

첨부 1


민족역사의 부활 (1)
신명기 32 : 6 - 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계승이라는 필연적 속성과 호흡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옛날을 기억하고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고 아비에게 묻고 어른들에게 묻는 것은 역사계승의 일차적 순서가 분명합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지난 일을 구체적으로 객관적 사관(史觀)에 의해 생각하고 그것을 아비에게 물으면 그들이 자식들에게 설명하고, 어른들에게 물으면 후손들에게 일러주는 것은 역사계승의 적극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순수역사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묻고 듣는데서 끝나면 안됩니다. 곧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에서는 역사에 대한 개념 설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이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역사계승의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역사계승이라는 필연적인 과제 앞에 우리는 역사에 대한 개념설정부터 다시 해야만 합니다. 금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 6. 28∼1982. 11. 3)는 그의 저서「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반세기 동안 각 분야에서 비판 없이 견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그의 정의는 너무 막연합니다. 역사란 어떤 이상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라고 정의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 곧 기독교 역사입니다.

역사계승은 필연적으로 발전이라는 과제와 깊은 우정관계에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왜곡된 역사나 실패한 역사는 반드시 바로잡는 역사 복고의 과정이 없이는 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실패한 역사의 복고작업은 역사계승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근대사에 우리 나라에서 실패한 역사는 크게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역사입니다. 둘째는 남북분단으로 야기된 동족상잔의 비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실패한 역사입니다. 실패한 역사는 반드시 복고되어야만 합니다. 대단히 어렵겠지만 전자는 친일파 청산으로 후자는 남북통일로 성화 되어야만 합니다. 복고운동만은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먼저 일제 강점기의 역사부터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Ⅰ.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 역사에 대 한 추억(追憶)입니다.

본문 32장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계승이라는 대명제를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의 종교정책을 한국교회가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추억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 장로교 외국선교사회의 총무였던 Arthur Brown은 재미 일본대사관에 쓴 편지에서 일본 통치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게 통치되는 것보다 훨씬 낫고 또 한국이 자기 손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썼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할 뿐 아니라 당시 한국 교회의 대세적 여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일제가 한국을 수탈한 것이 아니고 근대화시켰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일본의 극우익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본인들과 소위 친일파 인사들의 부동의 정서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 강점기가 체험이 아닌 역사로 아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준비라도 하듯이 지금 일제는 자기들의 국체(國體)의 정당성을 후손들에게 역사교과서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공공연하게 우리를 수탈한 것이 아니고 근대화 시켰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근대화가 무엇입니까?

1) 정치적 입장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제가 입헌제의 국가로 체제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독립국가 그 자체를 말살시켰습니다.

2) 경제적 입장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세적 경제 조직과 생산방식으로부터 산업자본주의 공업화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수탈이 자행되었고 소위 일제가 공업화라고 하는 것도 내용적으로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를 함경남도 장진호, 부전호 부근에 설치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사실은 세계패권의 야망을 품었던 일제의 군수공업이었습니다.

3) 사회적 입장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로부터 동등한 시민권을 가진 국민들이 근대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국민의 가장 기본권인 생명과 신체, 재산, 언론, 집회, 결사, 출판, 저항의 자유권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권, 국민주권, 국민참정권 등 그 어떠한 권리도 일제하에서는 허용되지 아니했습니다.

4) 문화적 입장입니다. 문화적으로는 특권 귀족층 중심의 귀족문화로부터 일반 평민 국민중심의 근대 민족 문화로의 변혁적 발전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한국 문화 말살정책이 거침없이 자행되었으며 그 한 예로 일제하에 간행된 출판물들 가운데 무수히 남아있는 검열 불통과의 흔적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다음에 있습니다.

5) 종교적 입장입니다.
(1) 천황제 국가의 보존수단으로서의 종교정책 일제하의 종교정책은 천황제 국가 특유의 종교정책이 여지없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1882년 1월 24일에는 내무성의 하달로 신관의 교도직 겸임을 금지하고 일반의 장의에 관계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일제의 국가 신도는 다른 종교와는 구분되는 공법적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천황을 국가의 최고 지위에 두는 신성가족 국가로서의 천황제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신성가족 국가를 명분화한 것이 바로 그들의 명치헌법입니다.

따라서 헌법은 국가 신도를 철저히 국가의례를 주관하는 제도로 법주화하고 여타의 종교를 국가의 신성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고 그 통치에 순응케 하기 위한 교화적 수단으로 삼게 했습니다. 명치체제는 종교의 사회화를 현실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의 사회화란 종교는 무릇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교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지 이러한 사회적 목적에 유용한 한 종교적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종교적 관용주의를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후일 사이비 이단의 온상이 되어 특히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들이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 일제의 주권 찬탈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종교정책 제 1차 세계대전은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14년 8월은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대외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총독부는 2개 사단 병력을 상주시키는 등 한국 내에서의 병력을 증강했습니다.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과 교전 상태임을 들어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을 하고 태평양 독일령 군도와 산동반도 남단을 점령하고 나아가 극동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습니다. 1915년 1월 18일 사실상 중국의 보호 국화를 의미하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는 일제의 침략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미국을 포함하여 서구 열강은 초기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대체로 묵인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팽창이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저지시키려는 그들의 정책과 일치하였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안전이해(Security interests)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미국도 역시 일본에게 일정하게 양보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통치가 점점 일본이 요구하는 쪽으로 장악되어 가자 서서히 자신들의 국체(國體)의 우월성을 교화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여와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를 창건하는 저들의 솔직한 의도는 한국의 일본화입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신을 우리의 조상신으로 삼아 황민화를 달성하려는 것입니다. 이 신사의 창건과 함께 1916년 1월 총독부 훈령 2호로 공포된 교원심득(敎員心得)은 이러한 황민화 정책의 의도를 일상적 교육 현장에 있는 교원들에게 주입하여 자라나는 세대에게 완전히 일본인으로서 정신 개조를 할 목적으로 제정 발표되었습니다.

(3)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정책 일제 식민지배 36년간 한국교회는 무참히 유린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박해는 1936년부터 1945년 어간에 일어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이 기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므로 발발되던 어간입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장에 거류하게 된 일본인들이 그들의 거주지역에 소규모의 신사를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합방 2년 후인 1912년부터는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신사의 건립을 계획했고 1918년에 서울 남산에 조선신사건립을 착수하여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이름의 신사를 완공했습니다. 이때부터 신사참배 강요는 공식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1931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면서 천황제를 배경으로 군국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남차량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① 국체명칭과 경신사상 함양 ② 선만일여 ③ 교학진작 ④ 농공병진 ⑤ 서정쇄신이란 5대 지침서를 내걸고 천황제의 견고한 확립과 영토 확장을 꾀하기 위하여 황민화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강요했습니다. 일제는 면(面)에 1개의 신사 설립을 적극 추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조선말 대신에 일본어를 사용케 하고 창씨개명, 전시정신 함양, 시국체제 확립에 분주했습니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 의도는 첫째,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무장을 꾀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일제 무단 정치의 권력 유지의 방법으로 황국신민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내선일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넷째는 신앙자유를 유린하는 종교적 침략 행위이며 나아가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전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패권주의를 앞세운 일제는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학생들은 이것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1932년 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평양지역에서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물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여토록 도지사가 공식 통첩을 보냈으나 숭실 전문학교를 위시한 10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사찰을 강화하는 등 노골적인 탄압이 가해졌습니다. 일제가 이러한 강경책을 쓰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간의 분열을 조장하여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식민지 교육을 본격화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를 논리화시켰습니다. 일제 명치유신 정부는 현대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에 맞도록 헌법을 제정,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함께 일제의 종교 행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신도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바로 신도를 신교(信敎)의 자유화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도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법적으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도신사는 내무성 신사국에 속하게 하고 신사참배는 국가의식 또는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으므로 국민은 의무적으로 참배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간악한 술책에 지나지 않고 신도신사 그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 정부는 소화(昭和) 13년 9월(1938)에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종교통제 정책을 실시하면서「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그런 몰지식한 짓을 하면 안녕 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공익을 해치는 자이므로 종교 단체법에 의해서 처분하고자 한다」고 종교국장은 국회의 질문에 의기양양하게 답변했습니다.

일본 문무성 종교국은 이 종교 단체법에 의해서 신도신사를 전 국민에게 강요할 방침을 세우고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라는 명목 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신도인이 되게 하려 했습니다. 신교의 자유에 따라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민의례라고 위장했으나 실상은 신도이념으로 천황을 중심하여 국민의 단결과 황국신민 운동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명치 헌법상의 신교(信敎)의 자유는 사실상 정권과 상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며 그것도 국가의 통치 행위에 도움을 주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원칙이 철저히 한국교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일제의 종교정책 방침은 바로 정권에 의한 교권의 보호를 약속하고 그 대신 정권의 지배 정당성 논리의 교화를 담당하는 기구로 교권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황제 국가가 요구하는 씨자적(氏子的) 소명의식에 충실하게 하고 선량한 신민으로 모든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황민화 정책이며 그 점에서 일관된 일제의 종교정책은 곧 황민화 정책으로 등식화되었습니다.

일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할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황도기독교(皇道基督敎)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권에 대한 정권의 지배 정당성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일제가 종교단체법에 따라 문무성은 교회정치와 교리에 대한 비토권과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안녕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에게 가벌할 것(제 16조, 26조)이라고 법적으로 제재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의 의무는 궁성요배, 신사참배를 의미합니다. 범칙하는 종교단체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목사는 그 직을 빼앗겼습니다.

(4) 일제의 기독교 말살을 위한 종교정책 한국기독교는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부터 교회 본연의 자세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8월 1일 장로교마저도 시국 설교와 기도회를 승동교회당에서 개최하고 내선일체를 재인식할 것과 일본의 전승을 위해 매일 아침 기도할 것 등을 결의하였습니다. 일제는 이에 대해 즉각 반응을 보이면서 이것은 이전에 보지 못한 장로교의 사상적 대전환이라고 환영했습니다. 이제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는 일제의 패권주의를 향한 도구로서 전락했고 친일적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와 민족을 배반하면서도 일제에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집요하게 한국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해 왔고 그것은 한국기독교와 그들의 국책(國責)에 따르는 일본화였습니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일제는 기독교의 황민화정책과 한국기독교 교파를 일본과 통합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건너온 종교지도자들이 "기독교의 신체제"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한국교회의 신앙 사상까지 저들의 국책에 순응토록 하는 일본 예속화 작업을 위한 음모였습니다.

어리석게도 한국교회는 교파별로 일본내에 있는 동일 교파와의 합동을 결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국내 교파간의 합동을 위하여 1942년 1월부터 교파합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1942년 3월에는 각 교파가 그 고유한 교파명을 버리고 조선혁신 교단을 조직하고 1943년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란 명칭을 일본기독교 장로교단이라고 개칭했습니다. 1945년 6월 25일 부총독실에서는 55명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새 교단구상을 제의했고 여기에 모두 찬성의 의사를 보였으며, 1945년 7월 19일과 20일 사이에 교파 합동 준비위원회가 정동교회에서 있었습니다.

27명의 장로교 대표자들을 위시하여 감리교, 구세군 등 59명의 각 교파 대표자가 모여 조선 교단을 일본 교단에 완전히 소속시켜 버렸습니다. 예배 직전에 일본 국기와 가마다나 배례, 일본국가 가미가요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하게 했고 기도와 설교도 일본말로 해야 했고 국방헌금, 교회 종 헌납, 주일을 근로봉사일로, 예배당을 공동 작업장으로 삼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일제로부터 수난 당할 때 신사참배 반대 운동자들은 투옥되고, 한국을 떠나는 선교사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1942년 3월에 총독부는 기독교 각 교파의 해산 통합의 일환으로 일본 기독교 조선 혁신 교단을 조직했습니다. 찬송가도 일본의 정신에 맞도록 모두 수정했습니다.

성경은 유대 민족의 독립을 기록한 출애굽기,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사용은 폐지하고 나중에는 결국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일은 모두 한국교회내의 어용 지도자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일 오후, 주간, 수요일 밤 기도회 등을 금지시키고 도시 교회를 통폐합시키므로 남는 예배당을 군용으로 징발하였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 궁성요배등 국민의례나 교회당 성종헌납, 국방헌금 등에 불복 또는 무성의하다 하여 투옥되거나 함구령, 금족령 등으로 활동을 억제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와 특권에 따르는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기 로마 사회의 고위층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이 강했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었습니다. 예컨대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린 16년간의 제 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와 콘술(집정관)의 전사자가 13명이었습니다. 특히 전쟁과 같은 국난을 맞이하여 기득권자들의 솔선수범은 국민을 통합하는데 절대 필요합니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고위층 자녀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 전쟁에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 헬기 조정사로 참전했습니다.

6.25 사변 때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서 35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아들은 야간 폭격 임무 수행 중 전사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은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이 6.25 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통이 없는 나라입니다. 한국 기독교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통이 계승되어 오지 못했습니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 교인이 15명, 불교가 2명 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20여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3%밖에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때 천도교의 수는 300만 명으로 기독교의 10배가 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이 근간을 이루는 나라에서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다라 철저히 이기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과 다수의 인사들이 반미운동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미국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방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방문시 공식석상에서 이른바 우리나라에 공산주의가 허용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한다는 식의 발언은 지금으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는 유럽의 사회주의나 일본의 공산당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는 바로 친북입니다.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지만 북한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우리의 주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남북 전쟁은 휴전상태이거나 준전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수출의 21.4%를 미국으로 하고 있고 연간 무역수지 흑자를 50억불(약 6조원)의 흑자를 보고 있는 시장이 미국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기술과 원자재에서 대일의존도가 높습니다. 얼마만 해도 미국에서 돈벌어다가 일본에다 바쳤는데 지금 동남아나 남미 아프리카에서 벌어다가 일본에 갖다 바치는 형편입니다. 만약 독도에 대한 무력시위가 일어날 때 종전과는 다른 양상의 일이 벌어질 우려가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을 복음화시키는데 사력을 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일제 강점기에 실패한 역사를 복고하는 작업입니. 이 일야말로 이른바 또 하나의 햇볕 정책입니다.

-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