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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
창11:1-9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바벨탑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의 내용입니다. 이 바벨탑 사건은 창1장부터 11장 사이에 기록된 4대 사건(천지창조, 인간타락, 대홍수 심판, 바벨탑)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심판, 하나님 없는 문화의 심판”  이것이지요.

a.창조가 무엇입니까?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골1:16 -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시148: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나이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까? 모두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자기의 본분을 지켜 나갈 때 그것이 바로 질서이고, 바로 그 질서가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과정을 한 번 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00이 있어라 하시매 00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의가 이런 패턴입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의 모두 이런 패턴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런 패턴이 아닙니다. 좀 다릅니다. 둘째 날입니다. 둘째 날 창조를 소개하는 창1:6- 의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며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세기 기자가 둘째 날 창조의 정황을 소개하는 패턴이 다른 창조와는 도금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없을까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기만 하셨지, 나누인 물이 어디로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기만 하셨지, 아직 무질서입니다. 무질서의 세계를 보시고 하나님은 좋았다고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날에 들어와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셋째 날에 들어와서야 질서가 잡힌 것입니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질서이며, 바로 그 질서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무슨 예기이겠습니까? 인간은 인간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보세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질서가 깨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어울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그런데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지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이나 바벨탑 사건이나 그 내용과 본질이 거의 같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한 번 봅니다.

a.맨 처음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이며 문화적인 일치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로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인간세계에 특별나게 범죄한 사건의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준 사실만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b.그 다음입니다. 2절의 말씀이 이겁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났다.” - “동방으로 옮기다가” > 우리 말 번역은 동쪽으로 옮겨가는 뉘앙스입니다만, 그러나 원어적인 정확한 표현으로는 “동방으로부터 옮겨가는 것(from the east)”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동방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동방(케뎀)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된 경우에는 거의 에덴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지요. 인간들이 에덴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향입니다. 인간이 점차적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어울리며 찬양과 경배를 올리는 삶을 살아야지,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아름다움인데,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점차 멀어져만 가고 있으니, 이것이 불행의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노아시대의 범죄를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판을 완전히 다시 짜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무지개를 증표로 삼아 주시면서 “이제 다시는 너희들을 물로 심판하지 아니하겠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인생들에게 약속하셨는가 하면, 아제 다시는 물로서 너희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기사가 창9:8-17까지(10구절) 나오는데 이 10구절 안에 “내가 다시는 너희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이것은 너희와 세우는 언약이다. 언약이다. 언약이다.” 언약이라고 하는 용어가 6번 나옵니다. 심지어는 이것도 부족해서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다. 영원한 언약이다.” 이렇게까지 강력히 강조하여 인생들을 안심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점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강조하여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냥 단순히 “다시는 너희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이렇게 한 마디 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좀 심하다 할 정도예요. “이것은 언약이다. 영세까지 세우는 나의 언약이다. 영원한 언약이다. 이것은 언약의 증거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지난 날에 물로서 심판을 받은 경험이 있으니까 아마 하늘에서 빗방울만 떨어져도 깜짝깜짝 놀라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저들의 이러한 불안감을 불식시켜 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로 영원한 언약을 세워 인생들을 안심시켜 주시면서, 그리고 인생들과 함께 가까이서 어울리며 교제하면서 아름다운 관계, 질서를 유지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시면서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꾸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동방으로부터 자꾸 멀어져만 갑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나뭇잎 사이에 숨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을 찾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꾸 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언약을 세워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꾸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도망갑니다. 에덴으로부터 자꾸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 말씀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못 믿겠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니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들끼리 힘을 합해서, 우리들끼리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들끼리 한 번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그것이 가당하기나 한 것입니까? 아버지 품을 떠나 집을 나간 탕자가 행복했습니까? 오히려 먹고 마시고 방탕하고... 그러다가 급기야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뒹구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목자의 돌봄에서 떨어져버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그 양이 행복했던가요? 자기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지기의 본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리 떠나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사단이 뭡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세상으로 내어 쫓긴 자가 아닙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내어 쫓긴 자, 그가 바로 사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심판입니다. 우리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 치고 행복한 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옥이 또 뭡니까? 지옥을 설명하라면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언뜻 떠오르는 머리 속의 상상이 무엇입니까? 유황불이 펄펄 끊는 곳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잘 압니다. 그런데 다른 차원에서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이렇게 외칩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저 나사로를 통하여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내 혀끝을 서늘하게 하옵소서.” 그랬더니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이곳과 그곳 사이는 큰 구렁이 있어서 갈래야 갈 수도 없고, 올래야 올 수도 없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더 이상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생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 없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없는 문화를 한 번 발전시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본문 2절을 한 번 더 보면 “시날을 만나 거기 거하고...”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한다.”라고 하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앉는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냥 거기서 저들은 눌러 앉아버렸습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아담과 하와가 나무 숲 사이에 숨듯이 저들은 하나님 없는 먼 곳으로 도망하여 아예 거기에서 둥지를 틀고 눌러 앉아, 오히려 벽돌을 구우며 성과 대를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인간의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큰 어리석음, 인간의 범죄의 원천을 찾자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한 번 잘 살아 보자.” 이것 아닙니까?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어떻게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이 관계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없고,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절대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애기입니까?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어떻게 한 번 성공해 보자. 하나님 없이 어떻게 한 번 행복해 보자.” 이것은 마귀의 구호입니다. 마귀의 사상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유혹합니다.

마귀 -“이 선악과를 한 번 먹어 봐라. 얼마나 맛있다구.”

하와 - “안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어. 먹으면 큰 일 나!”

마귀 - “아냐! 바보야. 너 언제까지 하나님 그늘 밑에서 하나님 간섭 받으며 그렇게 살거냐! 이거 따 먹고 독립해라.”

그 말에 뿅 간 겁니다. “이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하나님 간석 받지 않고 네 마음대로 신나게 살 수 있다.” 이 말에 그만 넘어간 것 아닙니까?

우리 이 사실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아름다움, 인간의 가장 큰 보람, 그게 뭔지 아십니까? 주님의 얼굴 뵈오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여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보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타락의 극치를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절 -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a.“서로 말하되”-원어적 의미로는 저마다 서로서로 동료들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반대하며 나선 사람이 없습니다. 범죄함에 있어서 아주 긴밀한 동료의식을 발휘합니다.

b.“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벽돌로 돌을 대신하자.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자.”-

*‘돌을 대신하자. 진흙을 대신하자.’ 돌과 진흙은 하나님 창조의 자연산입니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자.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자.’ - 벽돌보다 더 단단한 돌을 만들고, 진흙보다 더 접착력이 강한 역청을 만들어, 그리고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하나님을 한 번 찔러 보자는 것입니다. 나뭇잎으로 자기의 죄를 가리우려 했던 아담과 하와와 똑 같습니다. 인간의 머리, 아이디어, 문화로 하나님과 맛 서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얼마나 오만 방자합니까?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범죄한 인간들 보세요. 그런데요. 저들은 하나도 의심치 아니하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을 한겁니다.

또 보세요. 공산주의가 뭡니까? 하나님 없는 인간 유토피아를 건설해 보자는 인간의 시도가 아닙니까? 공산주의 혁명을 하면서 저들이 어떻게 경건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죽였는가 하면, 3가지 방법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 산 채로 묶어서 발가벗긴 채로 차에 매달아 모스크바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서로 서로 끈으로 엮어 놓고 탱크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산 채로 생매장해 버렸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의 씨를 말려 버리고, 그리고  피의 숙청, 피의 혁명을 통해서 하나님 없는 인간 왕국을 건설해 보려고 했지만,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성공했습니까?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저들의 시도는 실패를 자인하고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을 추구하려는 어리석음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고 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똑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니 저들의 도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보세요. “흩어짐을 면하자.” 의기투합하여 똘똘 뭉쳤는데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결국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도모는 헛수고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 두 집의 차이가 뭡니까? 믿음 위에 세운 집인가? 아니면 믿음 없는 인간의 노력으로 세운 집인가? 이 차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엄포가 아닙니다. 위협, 공갈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치고 성공한 자가 누구입니까?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게 됩니다. 그때 가인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 하소연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래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 요15:4- 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면서 그 마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열매가 없습니다. 있을 리 만무입니다. 헛수고 인생이라는 얘기입니다. 행복을 찾지만 행복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흩어버림을 당하는 인생 밖에는 달리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떠나 소돔성의 풍요로움을 쫓아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심판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 어떤 형편이든지, 어떤 조건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만족했습니다. 그것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어떠했습니까? “너희 밟는 것을 다 네게 주리라.” 할렐루야!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개입시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기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실력을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키고, 물질만 풍요로우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불에 구워 내구력이 강한 벽돌을 구웠지만, 진흙을 대신할 만한 강력한 접착력이 있는 역청을 만들어 성과 대를 높이 쌓으려 했지만, 성공했습니까?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인간의 오만함과 불순종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물질을 의지할 것도, 지식을 의지할 것도, 문화를 의지할 것도, 사람을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아니하는 인생은 지금은 흥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고야 말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나 성공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론은 났습니다. 여호와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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