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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식탁 / 마 15: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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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식탁
(마 15:22~28)

우리말에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자로는 먹는다는 뜻의 ‘식(食)’자와 입이라는 뜻의 ‘구(口)’자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식구란 함께 밥을 먹으며 사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식구라는 단어는 한국적인 문화에서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가정은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한 솥에서 퍼낸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식사 문화가 그렇지 않습니까?

서양에서는 각자 자기 접시가 있어서 자기가 먹을 음식을 그 접시에 덜어다가 따로 따로 먹지만 한국적인 전통에서는 식구들이 모두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밥상 가운데 찌게와 반찬들을 두고 서로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서 그것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렇게 식사 때마다 밥상을 중심으로 해서 둘러앉은 식구들이 모두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한 솥밥을 먹으면서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거듭 거듭 확인합니다. 물론 요즘은 많이 변했습니다. 이곳은 한국과는 조금 다르지만 한국은 무척이나 바쁜 사회가 아닙니까. 가족들끼리 서로 바빠서 아침에 집을 나서는 시간이 다르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가족 구성원이 제대로 한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날에는 하루 세끼 전부를 가족들이 따로 따로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녀로서 가족이라는 관계를 형성하고,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은 맞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식구는 아닌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하튼 저는 한국어의 식구라는 단어가 대단히 성서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밥상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주 즐겨 찾으시던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밥상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은 부유층이나 귀족이 아닌 이상 특별한 밥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바닥에 가죽과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제가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용할 밥상이라는 단어는 식탁이 있든 없든 넓은 의미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밥상을 좋아하셨는지에 관해서 결정적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9에 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수군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먹기를 탐하는 자는 ‘대식가’ 혹은 ‘폭식가’를 의미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는 ‘술고래’를 의미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하여 사실보다 많이 과장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잔칫집에 가셨다든지,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서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기록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끝이 먹을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를 유혹했던 첫 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다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처음으로 나타내셨던 것도 가나의 혼인 잔칫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 만찬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렇듯 예수께는 사람들과 함께 밥상에 앉아서 먹는 일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밥상에 앉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면 분명해 집니다. 예수께서는 세리들, 창기들, 다른 죄인들과 함께 밥상에 앉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 보니까 한 번은 마태가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외에도 자신의 친구들을 함께 초대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부분 세리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를 했던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이 세리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을 창기나 다른 죄인들과 같은 종류의 죄인들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밥상을 함께하는 일을 거부하시거나 피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행동에 관심이 많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너희 스승은 저들이 세리들이며 죄인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가?”를 따져 물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직 죄인들과만 밥상을 마주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집에도 기꺼이 가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심지어는 자신을 팔아넘길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가룟 유다와 밥상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자신과 밥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떤 제한도, 어떤 편견도, 어떤 선입관도 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분은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밥상을 함께 하기를 꺼렸던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밥상에 앉으셨습니다. 주님의 밥상에 앉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도, 어떤 공로도, 어떤 대가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니 흉악하고 강포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밥상에서 소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밥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용납되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식구가 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밥상에서는 식구가 되었습니다. 한 밥상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밥상 공동체의 근본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 와서 귀신들인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던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져줄 수 없는 것처럼 이방 여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이 예수께 드린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그 때에 그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그 이방 여인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밥상에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밥상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여주신 밥상 공동체의 정신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에 의해 세워진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믿는 사람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밥상 공동체는 초대교회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어서 성찬식을 겸한 애찬의 시간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밥상 공동체의 근본정신을 파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인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심하게 책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 음식을 가지고 와서 성찬을 겸한 애찬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기적인 성도들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온 음식을 나누지 않고 자기만 먹었기 때문에, 음식을 가지고 올만한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굶고, 부유한 사람들은 취하도록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과 나누셨던 근본정신을 다시 언급하고, 그런 식으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므로 차라리 집에서 먹고 오라고 격한 어조로 책망했던 것을 봅니다. 주님의 밥상에서는 진정한 용서가, 진정한 용납이, 진정한 사랑이, 진정한 나눔이,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 밥상을 통해서 진정한 식구가, 진정한 가족이,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밥상 공동체의 근본정신은 바로 오늘 내 속에 그리고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보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께서 내 안에서 오셔서 주님의 밥상을 차리시고, 그 밥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한 식구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주님과 나와의 밥상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과 나눌 수 있고, 무엇이든 용납되며, 무엇이든 받아들여지는 그런 밥상 공동체가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는 밥상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밥상 공동체가 재현되고, 우리가 애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밥상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혹은 애찬 시간에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우리는 주님의 밥상 공동체의 근본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소외되고 멸시받는 세리들과 창기들과 온갖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한 밥상을 나누고, 그 밥상에서 먹고 마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포도주가 모자란 혼인잔칫집에서 모든 이들이 즐거울 수 있도록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자신을 비난하던 바리새인의 집에 기꺼이 가셔서 그곳에서 먹고 마시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주님이 죽으신 후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하다가 한 밥상에 앉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떡을 떼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가 참된 주님의 밥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사람도 용납되고, 어떤 사람도 초대되고, 어떤 사람도 환영받고, 어떤 사람도 받아들여지는 주님의 밥상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꿈꾸시는 밥상 공동체는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나그네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자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밥상 공동체가 그대로 우리 삶에 재현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기대하십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매 주일 예배가 끝나고 여러 셀그룹들의 수고로 우리를 풍성한 애찬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애찬은 단지 친교나 허기진 배를 불리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예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식탁이 주님의 밥상이 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방 여인을 당신의 밥상에 앉게 하셨던 것처럼 무한한 용납과 무한한 용서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환영이 있는 그런 밥상 공동체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의 손이 이천년 전 떡을 떼시던 그 주님의 손이 되어 누군가를 위해 떡을 떼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 떡과 함께 용서와 용납과 사랑과 환영을 주시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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