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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삼상 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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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사무엘상 7:12-14

미국 스탠포드 대학 경영대학원의 제임스 콜린스 교수와 제리 포라스 교수는 6년 동안 1980년대 이후에 설립된 기업들 중에 여러 개 건강한 기업이 어떻게 해서 현재까지 초일류 기업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연구하였습니다. 회사 창업부터 중소기업과 대기업으로 성장하며 초일류 기업이 되기까지 내부 상황 뿐 아니라, 전쟁과 공황 그리고 기술 혁신의 시기, 가치관과 문화가 변화하는 등 외부 상황 속에서 계속 일류기업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두 박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창업되었다가는 곧 사라지는 다른 기업들과는 다르게 독특하고 차별하며 지속적인 경영철학이 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경영철학이 대단한 것이리라는 예상과 달리 고전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1800년대에 나온 경영철학을 재 포장한 것도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경영학에서 신화처럼 여기던 전통적인 흐름과 관념이 이 기업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각각 기업들에 새워진 신념 12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창립 4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출발했던 많은 교회들, 또 이전에 생겨난 교회들 중에는 그 영향력을 점차 잃어버려 지금은 작은 교회가 되기도 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없어진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동안 교회를 오늘까지 성장시켜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근본 요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드리는 예배가 그동안 성장해온 것을 축복하고 감사하는 45주년 행사로 끝낸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변하는 이 세대에서 또 다시 쓰임 받는 교회로, 하나님의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한 모습으로 출발했다가 중도에는 이내 부서지고 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시대 변화 앞에서 계속해서 쓰임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다시금 주어지는 새로운 역사 앞에 쓰임 받기 위해 어떤 교회로 설 것인가를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오랫동안 점령당하여 괴롭힘을 받는 상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려 20여 년간 좋은 자리 다 빼앗기고, 수고하고 노력하여 얻은 수확물도 블레셋에게 다 빼앗기는 수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고통이 있었고,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경제는 바닥을 치고, 정치는 혼란 가운데 있고, 사회는 질서와 원칙을 찾아 볼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셨고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단장품을 제거하며 회개운동을 벌이면서 공동체는 하나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물리치시되, 아무 무기도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제무기로 무장한 블레셋 영토 깊숙한 곳, 벳갈까지 쳐들어가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멩이를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이 기념비를 세우고 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삶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니 삶의 목표가 생겼고, 나뉘어졌던 민족이 하나가 되었으며, 한 마음이 되면서 안정을 누리고,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속에서 블레셋이 공격해 오는 것을 감당하며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공동체가 바뀌게 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 해답은 ‘에벤에셀’이라는 고백에 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그들의 기나 긴 역사 속에서 전환점을 맞게 된 이유를 찾아보고, 오늘 우리교회가 맞이할 전환점도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에벤에셀’ 고백 속에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서 ‘여기까지’라는 단어는 ‘아드 헨나’로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장소와 시간의 종결을 의미하는 전치사 ‘아드’와 여기 혹은 지금을 의미하는 부사 ‘헨나’가 결합했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라고 말할 때는 지리적이고 장소적인 인도하심 곧, ‘여기, 이 곳까지 인도하셨다.’ 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도 방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블레셋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그들이 블레셋 지경까지 깊숙이 들어가서 오히려 그들을 섬멸했습니다. 그랬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늘 지배를 받다가 원수들의 지경까지 가서 그들을 섬멸하고 돌아왔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속에 감사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렸던 것이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합지졸인 노예를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에 두셨는데 하나님 잃어버리고 감사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살펴봅시다. 우리들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성경은 죄와 허물의 지배를 받던 우리라고 얘기합니다. 죄가 들어왔을 때 우리는 죄의 저주 속에서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력하고 애써 수확한 것들을 죄 때문에 엉뚱한 곳에 다 갖다 주었던 우리였습니다. 고통뿐인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어둠과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백성, 적진 깊숙이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잔치 상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세상과 죄악, 정욕의 지배를 받던 우리가 오늘날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찬양을 하게 되고, 하나님 이름을 높이고 말씀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이 고달픔과 지침, 낙심과 절망이었지만 주께서 인도하셔서 오늘 이 예배의 자리까지 인도해 주셨다는 감사와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의 두 번째 의미인 ‘지금 여기’에서 또 한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루사이에 다 죽고, 법궤가 빼앗기는 수치스러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은 패배의 기억 위에 승리 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삶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진 백성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살아온 지난날들이 우리에겐 소망 없는 삶이었지만, 지금 삶을 돌이켜 볼 때에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여기까지, 지금 이 시간까지 인도하셨다는 고백이 바로 ‘에벤에셀’의 고백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우리 속에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하고 싶거나 해야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이 아니라 지난날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변화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어떤 과거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들게만 생각했던 과거, 오늘 내 삶을 지배해서 어둡게 만드는 그런 과거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바라볼 때 오히려 그 아픔과 상처 때문에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상처 아픔이 오늘 이만큼 성숙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됨으로 오늘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또한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감사 없이, 20년간 노예로 고통스럽게 살던 것만 생각하고 오늘 전쟁 한 번이긴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오늘을 살 때도 그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한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영적 건강에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라는 고백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신 것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당연하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교회적인 감사가 하나님께 올려져야 합니다. 바로 이 감사의 고백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속에 우리를 구원하신, 오늘 이 자리까지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셨다면 지금쯤 다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왔든지 간에 ‘내가 이 자리에 있다니! 나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자리야……. 하지만 지금 내가 엉뚱한 자리 대신 이 곳에 있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야!’하는 감사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중요한 키가 됩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소서.’하는 간절함이 담겨있는 고백입니다. 14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회복된다’고 하는 ‘왓타쇼베나’라고 하는 접속사는 ‘와우’라는 접속사와 ‘돌아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원형 ‘슈브’의 미완료 형태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잃어버린 것이 되찾아지고 떠난 것이 되돌아오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을 때, 그 백성은 다른 많은 것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의 땅으로 주시면서 많은 것을 허락하셨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니 땅의 축복, 그 선물들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수고한 소출마저 자신들이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가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물질도 주셨고, 지혜도 주셨으며 필요한 권세와 다른 모든 것들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근원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후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가정이 선물이 아니라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권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남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보니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사업 터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마음인 희망과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세파에 휩쓸려 자신이 가진 꿈이 아니었고, 자신이 꿈꿨던 가정이 아니었고, 자신이 꿈꿨던 미래가 아니었던 삶을 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게 되었지!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저것이 내 모습이며, 저 땅이 내 땅인데 하며 그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소서.”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하나하나 되찾게 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에 이것들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청종하면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백성이 되고 너 있는 곳에서 장수하며 장구하리라’ 그런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자기를 찾고 자기를 선택할 때 축복의 땅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땅은 어디서 어떻게 회복되기 시작했습니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진정 하나님께 돌아오려거든 단장품을 제거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던 우상은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유목 생활을 하다가 농경생활을 하면서 가나안의 농사짓는 것을 배우는 도중에 그 문화와 풍습 속에서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는 풍요의 신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생업의 현장에서 종사하다 보니 하나님의 법과 사랑 보다는 생업 현장에서 요구하는 법을 나도 모르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차차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소중히 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 보다는 생업을 위한 시간과 물질을 위한 투자 등, 세상적인 것들이 어느새 우리 속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제거해야 할 단장품입니다. 단장품이 있으면 우리는 자꾸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될 때 다른 축복도 하나 둘 씩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해 버릴 때 하나님을 다시 섬기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귀한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 자신에게 있어 고백되어야 할 것은 왕위도 권세도 아니라 구원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때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무엇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까? 연합하여 기도하는 운동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이 아니라 원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물질적인 풍요와 이 땅의 안락함을 추구하면서부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동체가 연합하여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초창기에 아름다웠던 것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어른들이 지금도 ‘그때가 좋았지’ 하시며, 교인 중 한 사람이 어려우면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찾아가 함께 위로하고 도왔던 추억들을 말씀합니다. 그 때의 교회는 한 사람이 아프면 함께 아파하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이것이 있습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고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진정한 공동체에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 삶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 역사하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 그것을 다시 찾게 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사람과 공동체는 주님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과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벤에셀’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태도와 자세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온 태도를 엘리 제사장에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9절에 보면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 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또 3: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처소에 누웠다고 되어있습니다. 4:18절에는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지금까지 엘리가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장소는 자기 의자였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처소가 아니라 자기 처소에 있었습니다. 자기 의자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백성들이 제사장에게로 찾아오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때 엘리는 자기 의자에 앉아서 백성들이 오는 것을 맞이하였습니다. 이것을 저는 ‘의자의 리더십’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리더십입니다. ‘교회도 크게 지어놨고 시설도 잘 되어있으니 우리 교회로 오시오. 장애인들도 오고, 가난한 사람도 오시오.’ 하는 식이 엘리의 리더십이었다는 것입니다. 엘리는 백성들을 바로 이런 모습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봅시다. 사무엘은 7: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라고 나와 있는데 예전에 제사장 같으면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백성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멍든 백성들, 또 자기 처소에서 무엇을 할지 모르는 백성들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되는데 백성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지방을 순회했습니다. 올 수 없는 상황, 다가갈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을 저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와 먼저 믿은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감당 할 때,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 ‘내가 그래도 중직잔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중직자의 자리에 세워주셨겠습니까?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세워주셨겠습니까? 아니면 처음 나온 사람들, 아이 업고 나온 사람들, 장애인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들 손 잡아주면서 하나님 사랑을 함께 나누게 하시기 위하여 세워주셨겠습니까? 이런 분들을 찾아다니고 만나고 얼싸안는 등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로 오라 할 것이 아닙니다. 찾아 올수 없는 그들에게 찾아가서 위로하고 하나님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리더십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새 시대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좋은 기업 경영책을 가지고 있던 기업들도 변화하지 않을 때 죽고 말았습니다. 시대의 변화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리더십의 모습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찾아가는 교회, 먼저 일어나 어디든지 찾아가서 힘들고 지치고 병든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고 손을 잡아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섬길 때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종을 멀리 메소포타미아까지 보냅니다. 종은 그곳에 도착하여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 주인의 며느리 될 사람은 제가 물을 달라고 할 때 저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마침 리브가가 옵니다. 종은 리브가에게 자신에게 물을 줄 수 있냐고 또 이 동물에게도 줄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이 대목에서 한 번 계산을 해 봅시다. 낙타가 먹을 수 있는 물이 80l입니다. 그런데 종이 10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갔다면 800l의 물을 먹여야 하는데 물 뜨는 바가지로 한번에 20l를 뜰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40번을 끌어올려야 800l가 됩니다. 한번 물을 긷는데 3분이 걸린다고 한다면 40번 끌어올려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총 시간은 무려 2시간, 약 120분을 소요해야 낙타에게 물을 다 먹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리브가에게 이런 섬김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멀리 있는 한 소녀를 하나님 역사 무대의 중심으로 데리고 오셔서 믿음의 조상 그 반열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반드시 대접하거나 꼭 말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접했고 그 손님은 천사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자녀 축복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섬기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맡기시고 그를 통해서 축복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앉아서 있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나누어 주고 찾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변해야 할 사역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나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은 술 취한 여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자기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안타깝게 부르짖을 때, “저 여인이 술을 먹은 게로군.”하고 생각하겠습니까? 만약 교회 본당에서 어떤 사람이 마구 울며 몸부림치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다가 목사인 제가 “참 이상한 사람이군.” 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의 관심은 자기 자리에 앉은 모습대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리에 앉으면 남이 안 보입니다. 자기 밖에 안 보이고 누가 자신을 대접해 주지 않나 섬겨주지 않나 밖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자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영안이 어두워집니다. 몸부림치는 여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의 관심은 아들들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됩니다. 내 관심이 하나님 사역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는 몸부림치는 한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사무엘은 백성들이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오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나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읽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곳에 참 많이 오셨습니다. 한 분 한 분에게 갖가지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곳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무척 많습니다. 한 주일간 어떤 일들이 우리 마음을 뒤집어 놓고, 어떤 사건이 우리 삶의 자리를 흩트려 놓았을지 모르나 그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 앉아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단지 예배드리러 나오셨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위로를 얻어 그 고통 가운데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세워주신 하나님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하는 인생 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그 아픔을 함께 다스려 주며 더불어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교회라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말 못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살피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붙들어 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성공하는 사람은 IQ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력, 분석력,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EQ 지수가 높아야 성공 할 수 있다고 합니다. EQ는 감성지수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의 마음으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속에 어떤 아픔이 있을지, 어떤 기쁨이 있을지 헤아리고 위해서 기도하며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속에는 이처럼 놀라운 의미가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 이후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훌륭한 무술 인이 있었습니다. 이 무술인 밑에는 제자가 있었는데, 제자의 무술이 드디어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졸업할 시점에 이르러 검은 띠를 딸 때가 되었기에 검은 띠를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스승이 검은 띠를 앞에 놓고 마지막 시험으로 질문을 하나 합니다. “자네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네. 대답을 잘 해야 할 것이네. 자네는 검은 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제자가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은 수련 과정의 끝이며 제가 오랫동안 노력한데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졸업을 한 해 연기 시켰습니다. 다음 해 또 졸업시험을 칩니다.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검은 띠는 뛰어남의 상징이며, 무술에 있어서 최고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스승의 얼굴빛은 또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음해에 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시 똑같은 스승의 질문에 맞닥뜨렸을 때, 무술의 경지에 다다른 제자는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검은 띠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자기 극복, 꾸준한 노력, 보다 높은 수준을 추구하는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는 바로 그 시작점이 검은 띠입니다.” 그제야 스승은 제자에게 검은 띠를 주며 격려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45년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많이 성숙했습니다. 어려움도 극복했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자랑과 축하로 끝난다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성숙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하며 나를 다듬어가고 교회를 가꾸어 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새롭게 나를 변화시키는 출발의 시간 그것이 바로 검은 띠의 의미이듯이, 45년의 성숙한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또한 우리 교회가 이 시대 앞에 새롭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 또 한번의 출발을 결심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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