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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마음 (겔 3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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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마음 (겔 36:24-28)


<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

어떤 청년은 교회에 올 때마다 항상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그런데 사는 모습은 이성관계도 복잡하고 전혀 성령 충만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매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그 기도를 계속 듣던 한 자매가 너무 안타까워서 어느 날 그가 기도하는 옆자리에서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하던 대로 "하나님! 저를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니까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령 받고 나서 바로 성령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요즘 신앙생활에서 더 큰 문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흘리고 다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령 충만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의 여러 가지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면 성령 충만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증거는 마음의 변화일 것입니다.

본문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마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이 시간에는 4가지로 "우리 마음을 이렇게 바꿔 달라고 기도하자!"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 더러운 마음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어려운 지경에 빠집니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방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낼 때 우리는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그때에는 우리 힘으로는 더 이상 그 수렁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를 이전보다 더욱 축복된 존재로 다듬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된 존재로 다듬어 가실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입니다(25절).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깨끗한 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그만큼 길이 열리고, 기도가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천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이다! 사랑이다!"라고 하는 구절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은 선하다! 선하다! 선하다!"라고 하는 구절들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한번도 "하나님은 전능하다! 전능하다! 전능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거룩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왜 우리가 얻지 못합니까?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고, 금식기도하고, 서원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아뢰면 반드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하늘의 만나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충분히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를 보관하거나, 한꺼번에 많이 거두려고 하니까 만나는 썩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지만 우리가 욕심을 가지고 구하는 것은 주지 않으십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축복을 얻는 제일 비결입니다.

2. 불평하는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때만 기도합니다. 잘 나가는 때에 기도하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의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적게 감사하고,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가지지 못한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불안과 두려움뿐입니다. 감사가 적을수록 삶은 불안해지고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감사가 많을수록 삶은 밝아지고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희망과 생동감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가 넘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해 희망이 넘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감사하는 마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어떻게 달라질까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불평을 그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세상을 완전히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즉시 달라질 것이고, 직장도 달라질 것이고, 가정도 달라질 것이고, 교회도 달라질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환경이 어려워도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삶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마음이 있으면 환경이 좋아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니까 삶의 좋은 열매가 맺힐 틈도 없습니다. 그저 좋은 환경을 찾아 방황하는 가련하고 외로운 삶만 펼쳐질 것입니다.

약 100여 년 전에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을 팔고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존스타운(Johnstown)으로 이사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마차로 이틀 길이었습니다. 첫째 날 밤, 그 농부와 가족들은 한 동네의 우물가 옆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사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존스타운 사람들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되물었습니다. "제임스타운 사람들은 어땠지요?"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제임스타운 사람들은 친절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서로 돕기를 좋아하고, 교회와 목사님을 아주 사랑했지요. 그곳을 떠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것이죠." 그러자 그 동네 사람이 말했습니다. "존스타운 사람도 똑같아요. 아주 친절하고, 서로 돕기를 좋아하고, 교회와 목사님을 아주 사랑하지요." 그 말을 듣고 그 농부 가정은 기대를 가지고 존스타운에 가서 아주 만족하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 몇 달 후에, 한 기능공도 제임스타운에서 존스타운으로 이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동네 우물가에 여장을 풀고 농부와 만났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존스타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똑같이 되물었습니다. "제임스타운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 기능공이 대답했습니다. "말 마십시오. 제임스타운 사람들은 천하고, 비열하고, 뒤끝이 나쁩니다. 목사님은 위선자이고, 선생님은 사랑이 없고, 여자들은 말이 많지요."

그 말을 듣고 동네 주인이 말했습니다. "존스타운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그들도 천하고, 비열하고, 뒤끝이 나쁩니다." 그러자 기능공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곳에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만 모였군요. 세상이 왜 이렇게 비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찌푸린 얼굴로 존스타운에 들어가 살다가 그곳에서 1년도 살지 못하고 다시 오하이오로 이사갔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기능공처럼 자기 시야와 생각과 태도가 비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항상 세상만 비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희망은 안 보이고,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항상 "어디에서 희망을 찾나?"하고 살다가 인생을 낭비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농부처럼 어디에 가든지 좋은 면을 보려고 애쓰고, 항상 자기가 처한 곳에서 희망을 만들며 인생을 보람있게 보냅니다.

여러분! 농부처럼 살겠습니까? 기능공처럼 살겠습니까? 붉은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붉게 보입니다. 그러나 푸른 안경을 쓰면 세상이 푸르게 보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선택이 축복을 좌우하고 행복을 좌우합니다. 문제 속에서 어떤 분은 "못살겠다!" 혹은 "못하겠다!"고 하고 가야할 길을 포기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문제 속에서 믿음이 견고해지고, 인격이 성숙해지고, 사랑과 겸손을 배웁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고,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냐를 밝혀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인생은 마음과 태도에 따라서 승리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 승리하는 삶을 원합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반드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3. 비판하는 마음에서 격려하는 마음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새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입니다. 말은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때 더러운 말을 하면 안됩니다. 친구끼리는 욕을 해도 좋다고 하는데 욕은 친구를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짜증을 내는 말도 하면 안됩니다. 짜증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짓밟는 행동입니다. 비판하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비판의 칼을 대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판의 칼을 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4장 29-30절은 말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서로 세워주는 것이지 서로 잡아뜯는 것이 아닙니다.

왜 비판을 합니까?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른 것은 오히려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더 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왜 인간이 이처럼 놀랍게 과학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엄지손가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보다 두껍습니다. 또한 다른 손가락은 세 마디로 이루어져 있는데 엄지손가락은 두 마디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둔하고 기능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과 방향이 정 반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 반대편 손가락이 없으면 인간의 능력은 현저히 약해졌을 것입니다. 엄지손가락은 반대 방향으로 일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간은 무엇인가를 붙잡을 수 있고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엄지손가락이 될 필요도 없고, 모두 새끼손가락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일치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더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다름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면서 함께 일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눈과 귀는 아주 다른 기능을 하지만 서로 보충하면서 아주 잘 지냅니다. 우리도 그처럼 서로의 비전을 성취할 수도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격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손을 잡아주고, 미소를 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전화 한 통화 해주고, 카드를 써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케네디는 대통령 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국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들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그 원리를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하며 사십시오. 교회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까 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배우자가 뭐하고 있나 하고 묻지 말고, 여러분들이 배우자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십시오.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해주나 묻지 말고 여러분들이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할까 물으십시오. 우리가 비판하는 마음보다 격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4. 냉소적인 마음에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항상 의문 나는 일이 생깁니다. 물론 그런 의문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문을 통해서 배우고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교회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회의에 진지하게 접근하면 우리는 조금 더 배우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예 "교회가 다 썩었다. 교회는 다 그래!"라고 냉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의보다 냉소가 훨씬 안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별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 영혼이 냉소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희망을 부정합니다. 뚜렷한 희망의 증거가 있어도 그 증거를 부정합니다. 좋은 교회가 있다고 증거를 대도 그 증거를 애써 부정합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는 인생이 되고 그 영혼이 어느 곳에서도 안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곧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냉소는 삶에서 감사를 빼앗고 삶을 절망하게 만들고 사람을 쫀쫀한 인생으로 만듭니다.

어떤 분은 사람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가끔 개를 집안에서 정성스럽게 키우는 분들에게 "왜 개를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가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개는 최소한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 없잖아요!" 그 말에는 사람에 대한 냉소와 경멸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개를 너무 좋아하다가 개 같은 사람이 되었나?" 자기도 '충성스런 개'가 아니라 '그토록 경멸하는 사람'이면서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배반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여러 번 만나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배반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깊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에게 배반감을 주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잠깐 실망(失望)은 할 수 있어도 사람에 대해 절망(切望)하면 안됩니다. 그래도 개가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이 희망임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사람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냉소를 버리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단이고 선택입니다. 어떤 분은 엄청난 고난 중에서 믿음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고난 중에서 그들의 믿음을 포기합니다. 인생은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영혼은 결코 감사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에 3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독일의 루터 교회와 카톨릭 교회 사이에 있었던 최악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전염병과 경제난으로도 전쟁에서 죽은 사람만큼 죽었습니다. 그때 마틴 링카르트라는 목사님은 전염병으로 한 해에 6천 명을 묻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약 15명 꼴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과 아내도 함께 묻어야 했습니다. 극도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평화가 있었던 시기는 사역 첫 해인 1618년과 사역 마지막 해인 1648년뿐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에 그는 찬송가 20장을 지었습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 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 믿음의 손길을 펴는 축복 >

많은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축복은 믿음을 가진 축복입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의 안전을 내걸어야 하고, 때로 삶의 위기를 초래합니다. 그래도 믿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최상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요단강 물이 넘칠 때 요단강을 걸어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단강에 들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닿자마자 요단강은 갈라졌습니다(수 3장).

이제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감동을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조금 더 불편할 것 같고, 조금 더 불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기주의 껍질을 깨는 삶이 잘못되는 법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가 내 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선교해야 합니까? 이기주의의 껍질을 깨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선교에 힘써야 합니까? 교회가 성도들에게 이기주의의 껍질을 깨라고 하면서 교회 자신은 이기주의의 껍질을 깨지 못해 혼자만 배를 불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성전 이전을 하면서 돈이 많이 드니까 아예 몇 년간 선교를 포기합니다. 그 정도로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런 상황에서의 성전 이전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번에 광고를 드릴 때 월드 크리스챤 네트웤의 정길진 목사님이 제 3세계 학생들 1년 식비만 1600만원 든다고 했을 때 우리 교회의 한 분이라도 그 일부를 담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애타는 하소연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몽고의 임준호 목사님이 얼라이언스 성경훈련센터(ABTC) 건물을 구입하고 잔금을 치르는데 물질적인 후원이 필요하다고 광고했는데 역시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교회의 필요에는 혹시 둔감할지라도 선교사들의 필요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여러분들에게 한번도 건축헌금을 하라고 도전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전에는 아무리 부인해도 '자기'라는 틀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꼭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교에는 '자기'라는 틀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자기'라는 이기주의의 틀도 깨야 하지만 '자기 교회'라는 이기주의의 틀도 깰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틀을 깨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내 소유를 펼 줄 알아야 합니다. 쥐는 삶보다 펴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지로 가라고 부름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하라고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힘써 내 믿음의 손길을 펼 때 하나님은 반드시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늘의 가치'를 위해 '내 손에 쥐고 있는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문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있어도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불평에서 감사로, 비판에서 격려로, 냉소에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한량없는 기쁨을 주실 것이고,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서도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선교후원 이곳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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