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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 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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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고린도후서 5:8~10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아끼던 친구 목사님이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는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늘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작은 방에서 머리맡에 자명종 시계를 두고 하루 종일 초침이 돌아가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서울 대학을 나오고, CCC에서 은혜를 받은 다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빨리 개척하여 서초동에 조그마한 교회를 건축하고 200명 가까운 성도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나중에 장례식을 제가 다 치러 주었지만 그는 저보다 나이가 아래입니다.

초침이 돌아가는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제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항상 생각하게 만드는 심오한 영상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그 영상을 계속 마음에 담고 기억하면서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그 때는 나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젊은 사람도 데려가시는 것을 보니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죽고 나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친구는 준비가 다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지만, 나 같은 것은 아직 준비가 안되었으므로 집행유예로 시간을 더 주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서야 할까? 이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면서 지난 20년을 살았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은근히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 있는 육체의 장막을 빨리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는 천국에 한번 갔다 온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황홀한가를 1/100 정도는 체험하고 내려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기가 막힌 상황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막 뛰었을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게 되길 소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8절)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바울을 긴장시키는 문제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죽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굉장히 중요할 것이다. 내가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 바로 10절에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할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심판대 앞에서 내가 산 것을 놓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는 것, 이것이 너무나 진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10절 말씀을 현대 번역으로 더 아름답게 번역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차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 그분 앞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했든 지 악한 일을 했든 지 땅 위의 육체로 사는 동안에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바울을 내가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9절) 세상에 살든지 하나님이 불러 가시든지 간에 우리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과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필로티무메다'(philotimumeda)라는 헬라어 용어로 그저 한번 해본다, 노력해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야망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야망을 가진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아실 것입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잘해보겠다는, 1등을 꼭 해보겠다는 야망을 가진 학생들이 얼마나 땀을 흘리며 씨름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이처럼 야망을 가진 사람은 남보다 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합니다.

여기에서 '힘쓴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한번 살고 싶다. 천국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몇 십 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내 삶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나의 야망으로 삼고 내 인생을 한번 뛰어 보겠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그런 인생을 두고 칭찬하고 기뻐하실 것이기에 그것만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것, 세상에서 쌓았던 것, 세상에서 얻었던 모든 명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만 남습니다.

요즘 신문과 TV 화면을 통해 참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서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살던 박 모씨를 보십시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정도를 따라서 국정을 했더라면 그런 꼴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어떤 면에서는 거짓말을 하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밝혀지자 지금 그 모습을 어떻습니까? 과거의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과거의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스로 '떨어지는 꽃잎'으로 표현했지만 꽃잎도 떨어질 때는 예쁩니다. 그런데 사람이 떨어지는 것은 예쁘지 않습니다. 인간 검사 앞에서도 지나간 날을 평가 받을 때 뭔가 잘못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지난번 말씀 드렸듯이 이번에도 5월에 미국에 갔는데 그 형제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라지 세일(garage sale) 할 때 가서 가치가 있는 고물들을 수집하는데, 한번은 사람들로부터 명성을 얻었던 사람의 고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생전에 받았던 상장, 상패, 훈장 등을 큼직한 박스에 가득 채워 넣고는 단 10불에 팔 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가지고 와서 집에 장식물로 여기저기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그 사람은 상장이나 상패 하나를 타기 위해 몇 년을 씨름하면서 노력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고 나서 보니 그것은 다 휴지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나를 위해서 살았던 인생은 어떤 것이든지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종종 교회를 다니면서 '나는 천당에만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이분이 구원 받길 사모하는 사람이구나! 믿음이 좋아서 저런 말을 하는구나!'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밑에 고약한 데가 있습니다. '천당에만 갔으면 좋겠다.' 그것은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 한번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마음껏 즐겨보고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천국 문 안으로라도 들어간다면 다행이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생각은 내 식대로 내 기분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왔다가 가는 세상, 후회 없이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값을 지불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는 자기를 포기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부담스럽기에 일단 제쳐놓고, 내가 원하는 인생 살면서도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제가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한때 주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이상한 질문입니다. 차라리 '많겠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 질문을 받은 주님께서 매우 심각한 말씀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주님은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사실 평안할 때 예수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무슨 값을 요구합니까? 아니면 무슨 선한 공로를 요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우리를 보고 믿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라고 믿고 고백하면 됩니다. 예수 믿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의 신앙생활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안 들어가요. 왜 좁은 문일까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우리의 관심은 '천국에만 들어가면 좋겠다' 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보답하는 인생을 살까?'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화두가 됩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하나님,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더러운 것을 주께서 이렇게 구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을 값없이 안겨주셨는데, 이 귀한 은혜를 받은 내가 한 생을 살면서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이것이 항상 관심사입니다. 이 관심사대로 살려면 입으로 "주여, 주여" 만 해선 안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생명과 바꾸는 위기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값을 지불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천국에 들어갈 자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많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양심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오늘날 한국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수백 명, 어떤 수치에 의하면 천만 명이 넘는다고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 천국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천국은 오염되어 살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지 실제 삶을 보면 얼마나 추악한 냄새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나라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들어가서 제멋대로 사는 데가 천국이 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좁은 문을 들어가서 험하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험한 길입니까? 하나님 기쁘게 하기를 소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지금 가고 있는 사람인지 그것이 귀찮아서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을 가면서 입으로만 할렐루야 하는 사람인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금 마음 속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20세기에 영국이 배출한 탁월한 설교자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하나로 꼽힐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주석가이며,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이라는 교회에서 80세가 넘도록 사역했습니다. 그 분의 책이 많이 번역 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들고 펴 보아도 은혜 받을 수 있는 책들입니다. 그가 그렇게 평생을 주님 위해 살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영국 황실의 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은 후 그 직을 던져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일생 동안 성직자로서의 거룩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가 이제 병이 들어 임종이 임박한 상황에서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후배 목사님이 그를 찾아 가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한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사셨는데 그러면서 평생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가장 진지한 생각이 있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목사님이 늘 진지하게 생각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실 수 있으면 해 주세요.' 그러자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에게 한가지 진지한 생각이 있었지. 그것은 내가 목사로서 일 하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텐데, 그 때 하나님께서 나의 한 생을 돌아보시면서 어떻게 평가하실 지가 가장 진지한 질문이었다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나를 보고 '너, 한평생 나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구나.' 하고 칭찬하실 것인지, 아니면 '너, 목사가 되어 가지고 한평생 너 자신의 성공과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구나.' 하는 책망을 하실 것인지 이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이해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에는 목사들이 어떻게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번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지자, 제사장, 성직자가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갔는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를 보면 타락한 사람들이 성직자 중에 많이 나옵니다. 목사라고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교회를 위하여 생을 투자하며 시간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목사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중심을 모르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했는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이었는지 판단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잘못하면 목사도 자기를 위해서 인생을 즐기고 살다가 온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하나님 앞에 발가벗은 자가 되어 설 땅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평신도 입장에서 어떠해야겠습니까? 되는 대로 살다가 천국만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기독교는 내 식대로, 내 기분 대로 그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다니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영원한 나라에 있습니다. 거기 가서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연습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예행하는 곳입니다. 리허설 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리허설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영원한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리허설을 하면서도 자기를 위해서 살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용납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2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를 키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너무나 좋은 선물을 자녀를 통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나중에 성공하는 자, 유명한 자가 되길 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생각해도 인격자로 존중 받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아라. 사람답게 대우 받는 사람 되어라.'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저는 최근에 출판된 클린턴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의 자서전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읽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중산층 사람들의 성장 과정,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사고 의식 등을 들여다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자서전을 통해서 그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 방법, 세계를 보는 안목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힐러리 여사의 자서전이 우리 나라에서 출판이 되자마자 사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힐러리 여사의 아버지는 1930년대 살인적인 미국 대공황을 겪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경제가 밑바닥까지 떨어져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힐러리의 아버지는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가난의 잔인함을 뼈 속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 대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둘인데, 이 자녀들에게 소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강한 사람, 이런 사람으로 키워야 되겠다.' 이것이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그 딸을 철저하게 자기의 생각대로 키웠는지 모릅니다.

어릴 때 양치질을 하다가 치약 뚜껑을 열어 놓고 나가 버리면, 그 다음에 아버지가 들어와서 그것을 보고는 치약을 창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딸 아이가 양치질을 하려면 창 밖에 나가서 치약을 찾아 한참동안 수풀 속을 헤매야 했습니다. 뚜껑을 열어 놓으면 치약이 흘러 나와 낭비가 되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때 배인 그 습관 때문에 힐러리 여사는 주스를 마시다가 남으면 입구를 랩으로 싸 두었다가 다시 내어서 마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립하는 정신을 키우기 위해 13살 때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했습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남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 이것이 힐러리 여사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부모는 자녀들에게 이런 저런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망은 자기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형상을 닮은 사람, 다른 말로 바꾸면 자기 아들인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서 나타내 보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마다 기뻐하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즐거이 부르실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인간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엄하며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러한 형상을 우리는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형상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닮기 보다 마귀를 닮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들판에서 형제가 일하다가 형이 돌멩이를 들고 동생을 잔인 무도하게 때려 죽이는 일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마귀와 같은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모릅니다. 백년, 이백년, 아니 천년, 이천년 슬퍼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슬퍼하시면서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구나. 다시 나를 닮은, 거룩한 형상을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겠구나.' 하고 작성하신 후 자기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짊어 지우시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저주를 그 몸에 다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고 예수님처럼 되는 거룩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원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원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살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도록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계속 닮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계속 일하십니다. 우리의 성격을 바꿉니다. 우리의 개성을 개조합니다. 우리의 기질을 바꿉니다. 우리의 나쁜 습관을 전부 뜯어 고치게 만듭니다. 더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면서 주님처럼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작업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믿은 연륜이 많아질수록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자가 되어야 누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지금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교회에서 말씀을 계속 배우게 하시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오는데, 그 9가지를 다 더하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형성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항상 기뻐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화평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오래 참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친절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선하게 만드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가 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절제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누구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를 위해 예수님이 참으셨지요. 저도 참을게요. 싫지만 참아 볼게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기쁘시게 하시를 소원하는데, 제 속에 좋지 못한 야망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을 닮아서 한번 용서할게요.' 이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사람 옆에 가면 편안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닮은 구석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비록 겉으로는 드러내 보이기 어렵지만, 내면으로는 예수님 많이 닮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예수님을 닮도록 작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자기도 모르게 날마다 예수님 닮아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명령합니다. "주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여기에서 합당이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길 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참 중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모여 앉아서 어떤 절차를 따라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만이 예배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한 마디로 예배는 예배란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도 하나님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너무 감격스러워 입으로 자기도 모르게 '주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 이것이 다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가정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조여 드는 답답함을 느낄 때에도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것, 결국은 이 나그네 생활 끝나면 이 세상에서 내가 누리지 못한 모든 영광과 축복을 하나님이 주실 텐데. 이런 아름다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찬송들이 터지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또한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고 거룩한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하는 사람은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절대 등한히 여기지 않습니다. 더 열심을 내는 사람은 수요일도 나오고 금요일도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무슨 집회가 있으면 '오늘 주님 앞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싶다.'는 갈증이 나와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한평생 하신 일을 보면 3D 업종에 속하는 일들입니다. 날마다 환자들과 씨름 하는 것, 가난한 자들과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과 같이 지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 주느라고 땀방울 흘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난의 화살을 받아가면서도 꿋꿋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주님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쉬운 일입니까? 제자들을 위해서 밤새도록 산에 가서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시는 것, 쉬운 일입니까? 제자들을 위하여 아침밥을 친히 준비하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대야를 가지고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이들을 품에 안고 아이들을 봐 주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섬겨야 될 대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이 좀 남아 도니까 생색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지.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내가 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서 남을 섬기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 기쁘게 하는 삶을 살려면 전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선교를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고 제일 하고 싶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네 이웃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중요한 일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은 영광입니다. 선교하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고한 일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선교사들이 저렇게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자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잠깐 초라하게 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광스럽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웃을 위해서 계속 기도합니까? 내 옆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때 담대하게 입을 열어 전도합니까? 세상의 것을 가지고 으스대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너무나 그 영혼이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일이 있습니까? 선교사를 위해서 날마다 정해 놓고 기도합니까? 세계를 가슴에 품고, 캄보디아, 중국, 러시아, 이렇게 나라 이름을 매일 하나씩 불러 가면서 기도해 줍니까? 내가 땀 흘려서 번 돈을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기쁨으로 사용합니까? 만약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타니 야스또라고 하는 일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일본의 가네보라는 회사의 회장입니다. 평범한 말단 사원으로 그 회사에 들어가서 나중에 회장이 되었고, 회장이 된 다음에는 그 회사를 일본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그 분이 쓴 조그마한 책이 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아내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데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한 생을 사세요. 출세요? 그건 안 해도 돼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세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다 회사에서 목이 잘리면 과감히 그만 두세요. 그러면 나하고 둘이 전도하러 다니면 돼요.' 오랜 후 그 남편이 아내를 놓고 쓴 글을 보면, 그 때 "출세 안 해도 돼요."라는 그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부인들은 출세, 출세 하면서 남편을 뒤에서 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스트레스 받아 일찍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출세 안 해도 된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살자."라고 말하니까 너무나 마음이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이 야스또 씨가 예수 믿고 나서 세상을 보는 안목,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쉽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될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까?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불이익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좌천을 당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위기를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살자 하나님께서 그를 그 회사의 최고 자리에 올리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먼저 됩시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됩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시다. 많은 일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예배와 섬김과 전도, 그것을 통해서 내 직장과 가정, 학교,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 그리고 나중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주님이 칭찬하시고 모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는 날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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