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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라진 사람들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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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사람들
(행4:13-22)
 
저는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가운데 지난 10여일동안 미국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저는 제가 미국에 정착해서 살던 곳과 또 처음 목회하던 곳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머물었던 곳은 '보스톤'이란 도시입니다. 보스톤은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이 뿌리를 내린 전통적인 곳으로서 미국에서 가장 영국적인 도시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3년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목회했던 '커네티컷'란 동네입니다. 뉴욕과 보스톤사이에 위치한 커네티컷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예일대학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3년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이번에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 갔습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롭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인데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항에서 보스톤시내로 들어가는 도로가 아주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커네티컷 동네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집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빠르지는 않지만 미국은 나름대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이 세상의 행적은 지나감이니라"

  여러분, 세상은 바뀝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도, 만물도, 건물도, 문화도, 사람도 바뀝니다. 그리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달라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반드시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신앙이 있다는 증거는 바로 나의 변화에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가 예수 믿고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6월 한달동안 성령에 대한 교훈을 찾았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활동과 능력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중요한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특징입니다. 성령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변화'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교회가 달라졌고, 성령이 임한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이 특징을 바로 보지 않고 성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물같이, 불같이 오시면 반드시 달라집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중심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의 달라짐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령과 함께 우리가 달라져야 할 사람인 것을 기억하면서 도대체 당시 그들이 궁극적으로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처음으로 공회에 잡혀 당시 종교인들과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선입관이 있긴 했지만 제자들을 보던 공회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침없이, 기탄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자들은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는데 어째 이렇게 말을 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갈릴리 어부들로서 학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자 지혜로운 사람, 말 잘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믿으면 지혜로운 사람, 똘똘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이요,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할머니 권사님은 공부를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다른 것은 읽지 못해도 성경만은 줄줄이 읽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을 잘 못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사람앞에 서기만 하면 떠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니까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른 것입니다. 지식은 세상에서 나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늘로부터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지혜는 그가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지혜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은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물질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판단력'입니다. 오늘 말씀 19절에도 사도들의 옳은 판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을 때 잘 판단합니다. 지혜가 있을 때 잘 선택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판단의 연속입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인생을 복되게 사는 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 판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과 함께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잘 판단하고 잘 선택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공회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공회는 무서운 자리입니다. 누구라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공회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한순간에 운명이 달리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제자들은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두렵거나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외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담대한 지 모릅니다. 말하지 말고 전하지 말라고 위협할 때,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1, 2, 3차, 계속해서 잡아드려 위협하는데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이 임하기 전 제자들은 한마디로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했을 때 불안과 초조함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신다고 했을 때 근심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그날 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에서 보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두려움과 비겁함과 나약함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이들이 사도행전에서는 다릅니다. 특히 본문에서 보이는 그들의 당당함은 오히려 공회원들이 놀랄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똑같은 사람들이었고,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두려움으로 몰아갔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큰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인간을 약하게 하고, 한계에 부딪치게 하고, 한없이 초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죽음앞에서 인간은 하염없이 슬픈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요, 한계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십자가, 오직 은혜뿐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갖고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때 보다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령은 어떤 경우에서도 낙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 은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안된다, 끝났다'고 단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도 하늘은 막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용기는 자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땅에 희망을 잃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은 '헬렌 켈러'라는 사람이 태어난 날입니다. 헬렌 켈러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196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인들은 어떤 사람의 죽음보다도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 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녀는 태어난지 19개월만에 중병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보통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과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불행속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기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장애인만 아니라 정상인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빛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용기를 잃고 좌절할 때마다 그녀의 삶과 책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는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질병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젼과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져야 하고, 어떤 경우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이사야 41장 10절은 우리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줍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함께 두려움 없는 용기로 환경과 세상을 이기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자기를 조절하는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정황으로만 보면, 그냥 말로 끝나서는 안될 상황입니다. 말같지도 않는 말로 변론하고, 흠잡는 사람들에게 전에 같으면 참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정을 자기 기분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너무도 자기를 잘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궁극적으로 달라진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거칠고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조절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조절의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들은 자기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감정을 표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화가 치밀면 무슨 짓을 못할까를 본성적인 면에서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조절이 되지 않아 터진 결과에 늘 후회하고 아쉬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 순간의 감정의 폭발이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이 누구나 잠재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본능이기에 결코 없앨 수가 없습니다. 오직 조절하는 것만이 해결하는 길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하게 합니다. 성령은 자기를 조절하는 힘을 줍니다. 저는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가장 큰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하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나 방언이나 은사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틀리지 않습니다만 사도행전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성령의 힘은 '신비'가 아니라 '조절'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을 조절하게 하고, 행동을 조절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삶을 조절하게 하고, 욕구를 조절하게 합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쓰고 싶은 것, 이 모든 것을 조절하는 힘이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어떤 열매보다도 가장 귀한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조절, self control' 입니다. 자신을 잘 조절하는 것이 삶을 보다 윤택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열매가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절제'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죽을 지언정, 결코,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그런 말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그는 말도 말이지만 무분별한 행동으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기분대로 살지 않습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내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합니다. 급하지 않고,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인간의 기질과 성품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기질대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베드로가 달라졌다는 것은 '기질'이 아니라 '조절'입니다. 바로 이것이 능력입니다. 능력은 자기를 조절하고 절제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한번 더 참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활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한 믿음의 모습은 조절입니다. 성령과 함께 이런 조절의 힘이 생기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면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 지혜로운 사람으로, 용기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기를 잘 조절하는 사람으로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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