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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부터 복을 주리라 (학 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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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복을 주리라
(학2:10-19)

바른 문화를 이끌어가는 ‘낮은 울타리’라는 월간지에 실렸던 베스트 수필가운데 ‘새롭게 태어납니다’라는 감동스러운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던 저는 중학교를 중태하고 어느 가정집으로 식모살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댁의 가장은 의과대학 교수이면서 유명한 병원 원장이었고, 하나뿐인 아들도 의과대학생이었습니다. 사모님도 딸도 인정 많고 덕있는 분들이어서 저는 남의 집살이 하는 것 같이 않게 살았습니다.

여러해가 지나 제가 스무살이 된 어느날, 저는 뜻밖에도 그댁 아들로부터 정식으로 청혼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과 심한 충격으로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집을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주인댁 부모님도 당연히 반대를 했고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는 아들에게 부모님의 승낙이 내려졌습니다. 후에 부모님께서도 아들의 뜻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주셨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두렵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는 저에게 아버님이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아내로 택하고 너를 며느리로 맞이한 우리에게 갚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가 의사인 남편의 아내답게 되는 것이고, 병원장의 며느리답게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 이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 되거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아 자신감을 갖고 그 아버님의 며느리답게 그 남편의 아내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원하는 대로 공부를 시작,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대학의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가문이 원하는 며느리와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뼈를 깍고 살을 저미는 아픔이 함께 하는 과정이었으나, 오직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모든 가족이 저를 인정해 주고 그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이 오늘도 저를 기쁨과 보람으로 살게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힘이요, 저는 재산입니다.”

이 수필을 통해서 보면, 모든 가족들이 가정부를 인정해 주고 감동을 주는 행동하였기에 지금의 떳떳한 며느리자 아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처럼 ‘감사와 감격’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활속에서 서로가 감동을 주는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더욱이 그 감동에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학개라는 선지자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민족들을 감동시켜 침체된 이스라엘 민족들을 새롭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학개서는 단 두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예언서입니다. 선지자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시대는 바사왕 다리오 1세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 보낸지 얼마 후의 일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을 재건하다가 주위의 적들의 모함과 방해에 의해 공사를 중단하자 15년쯤 지난 후에 성전재건 공사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전을 재건할 때가 아니라고 핑계하며 성전을 황폐한 채로 내버려 두고 있는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다시 재건을 서둘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학개의 이 설교는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마침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재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귀한 하나님이 교훈을 깨닭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전을 가까히 하여 예배를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솔로몬왕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어 계속되어지는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포로생활을 하였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후에 이스라엘민족들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페스샤가 앗수르와 바벨론을 침략한 이후에 포로완화정책을 써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바벨론으로 잡혀온 이스라엘백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민족성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앗수르에 지배를 받던 북이스라엘 민족들은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북쪽에서 민족성을 상실하여 혈통까지도 혼혈아가 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 같은 포로생활로 고향을 떠나있던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의 민족이 이렇게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왕국이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민족성을 잃고 혼혈민족이 되어버린 이유중에 가장 큰 이유는 앗시리아 포로생활 중에서 백성들이 종교와 문화에 순수성을 지킬 수 있도록 백성을 지도할 만한 지도자와 제사의 중심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북이스라엘 민족은 유다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실제적인 성전뿐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없었기에 민족성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여러분들께서 교회를 가까히 하면서 예배를 귀하게 여기면 여러성도들께서는 가장 귀한 것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려야 할 행복을 행복을 잃지 않게 되며, 바른 가치관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며, 진실과 공의와 사랑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까히 하면서 예배를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가까히 함과 동시에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가까히 함과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위로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며, 내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들은 처음의 감격과 처음의 열정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성전 재건작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귀국 후 2년2월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는데, 이때의 감격으로인하여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려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스라엘백성들은 성전의 지대가 놓이는 것을 바라보며 감격하여 통곡하기도 하였습니다. (스3:13)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처음의 이 감격이 여러 가지들의 어려운 장해로 인하여 무디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열정적인 감격은 사라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주춧돌만 덩그랗게 남겨 놓고 방치한 채로 먹고 마시는데만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학1:4,9). 그러한 상황에 나타난 예언자가 학개입니다. 학개는 백성들을 꾸짖고 수룹바벨과 예수아의 마음에 부흥을 일으켰습니다(학1:14). 학개는 성전이 파괴되어 예배할 수 없었던 그 날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여러 성도들은 처음의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과거의 처음의 열심을 내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18).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성전 재건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여 노래부르기도 하였고, 감격하여 눈물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흥분과 열심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박국은 촉구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처음의 감격과 처음의 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의 열심과 처음의 감격을 잃은 이스라엘백성들은 안일한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데만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유다인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었던 원인은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신 은혜에 감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망각하고 무려16년간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처음의 은혜받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의 기쁨과 처음의 감사, 처음의 사랑, 처음의 만남, 처음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처음의 열심과 처음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회복하면 오늘부터 복을 주십니다.

주님께 돌아와 감정을 회복하고 처음의 열정과 감격을 회복하는 자에게는 지금부터 복을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학2:19)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 "

당시에 성전재건이 중단되고 있을때에는 농사마저도 어려워 그들의 생활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이십석이 날 논에서 겨우 십석이 나오고, 오십말을 생산할 포도밭에서는 이십말의 생산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할 처음의 열정과 감격스런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16절에서와 같이 곡식더미의 소득이 적다할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하였으며, 19절에서 곡식종자조차 없으며, 모든 나무에 열매가 없다할지라도 돌아오면 오늘부터 축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7절에서와 같이 폭풍과 곰팡이와 우박으로 치시기까지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것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복중에 가장 큰 복은 주는 자의 복입니다. 우리는 꽃방석을 넘나드는 벌과 나비를 통하여 주는 자의 축복과 사랑의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꽃은 벌과 나비에게 아낌없이 단꿀을 제공하고, 나비는 화분을 옮겨 열매를 가능케 합니다. 동물이 주는 탄소로 식물이 살고 식물이 제공하는 산소로 동물이 사는 진리를 통하여 주는 자의 축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자기의 마지막 것을 제공한 과부는 3년 6개월 가문에도 그 밀가루가 다하지 않았으며, 엘리사 새대의 과부도 그러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으나 남에게 유익을 주는 생이 되어야 합니다.

1902년 6월11일,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이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 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대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수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내속의 ‘나’를 비워야 마음속에 안식과 평화가 깃듭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아 좌절하며 낙심하지 말고, 어떠한 환경속에서라도 성도들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성전을 구축하시고, 당시의 수룹바벨과 여호수아, 모든 백성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여라(×3)’고 하신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속에서 순종하며 은혜를 회복한자들에게는 지금, 오늘부터 복을 주십니다. 주님의 성전을 가까히 하심으로 잃어버렸던 감격과 열정을 회복하여 오늘부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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