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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음란은 영혼의 치명적인 독약이다 /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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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본문 : 요한계시록2:12-17
제목:  "음란은 영혼의 치명적인 독약이다."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사랑이 먼저냐 공의가 먼저냐 하는 대화가 얼마 전에 한번 있었습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공의라는 것에 의하여 상막한 삶을 살게 될 때가 많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오히려 이용하려는 생각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법을 논하면서도 또 맹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공의보다는 사랑이 앞서야 사실 사는 맛이 나겠지만 세상에서 이 세상 공의가 없으면 세상은 문란과 혼돈스러워집니다.

더구나 영적인 진리만큼은 더 말할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며 절대적인 공의가 앞서야만 합니다. 세상은 공의가 바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공의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공의를 떠나서는 절대로 사랑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공의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법은 절대적 공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공의이며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공의를 지키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를 성취하시며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계신 것입니다. 창조이래로 한번도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져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에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율법을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하려 왔다고 하십니다.

오늘 버가모교회는 충성스럽고 어찌보면 순교의 피가 흐르는 정말 서머나교회와 같은 충성된 성도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교회였으며 용서와 서로간의 위로가 있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여기서 말하는 위로와 용서라는 것은 그 형편과 처리를 고려하며 위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인 것 같이 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들이 실수하는 것중 하나가 무엇인가하면 너무 사랑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나님이 아실 거야.’  ‘어쩔수 없지 뭐.’ ‘기도합시다’

아니면 ‘주중에라도 예배를 드리세요’  ‘아직 믿음이 적어서.’등등

잘못된 것을 인간의 편의주로 인정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이유가 아니라 육신에 빠져서 세상을 사랑하는 우상과 행음앞에 종노릇하는 영혼일 뿐인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열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께 병행합니다. 목숨까지 받힐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상합니다. 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와 발람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음란을 말합니다. 장로님이신데 첩을 두고 살고 있다면, 성도와 교회 직분이면서도 열심히 예배생활을 하고 있는데 술고 여자에 빠져 살고 있다면, 요사히 기론되었던 찬양사역자가 음란에 빠져서 헤메고 있다는 말처럼, 교회에서 교우들끼리 성적인 문란함이 있다는 말을 종종듣습니다.

요즘 교회 중에서 교회 내에 지도자가 분륜의 관계로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말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이렇게 변질되고 변색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바로 타협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말앞에 우리는 한없이 죄를 용납하며 삽니다.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믿음이 이직 부족하다는 이유로 할말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오직 인간의 이해와 위로만이 존재되며, 생명은 없어지고 종교성만이 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타혁적인 신앙은 범사에 독약입니다.

절대적 신앙만이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며 복을 누리며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열심히 기독교의 진리가 무색해 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신앙의 노선이 정상이 아닌데도 시험들까봐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마음이 아플까봐, 또 시험들어 나오지 않을까봐서라고 합니다. 안나오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바른 소리를 못하고 적당한 타협적인 수준에 있음으로,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바른 소리하고 제대로 외치며 권면하며 교회 부흥이 늦혀지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협적인 신앙은 성도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병과 타협하는 이는 없습니다. 절망과 타협하는 이도 없습니다. 살기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정작 몸부림쳐야할 일에는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내 가족과 교회에서의 모든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세상의 미혹의 영의 자식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닥아야만 합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행음하게 하였다는 것은 곧 타협적인 신앙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진리가 무너지고 혼합된 진리를 가르침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의 참회만이 영혼이 살며, 영혼이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자비는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잘못된 삶과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에 대하여 명분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혼이 이미 변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을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더욱이 믿는 자의 타락과 타협의 심판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심판입니다.

어떤 이는 버가모의 충성된 성도들처럼 정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 볼 때에 세상의 영에 취해서 영혼이 건강하질 못하고 겉모습만이 교인일 뿐입니다. 이시대와 버가모교회에게 주어진 말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은 음란입니다.

첫째로 영적인 음란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이 하찮아서 세상 것들 앞에 하나님의 자존심을 마구 구겨버립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 세상에 밟히우는 것고 같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섬깁니다. 이러한 신앙은 백퍼센트 미혹을 당하며 변질된 영혼을 소유하게 됩니다. 작당주의는 썩은 영혼을 낳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니골라와 발람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행음하게 됩니다. 이시대는 음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통한 음란 사이트와 여기저기에 산재되어있는 밀실문화등, 이것은 잘못된 성문화가 정착되고 잘못된 성문화는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성적타락과 영혼의 파괴을 유발시킵니다. 성적인 타락은 영혼 멸망의 지름길 인 것입니다.

성적타락된 것이 멸망의 징조이며 이미 깊은 질병에 걸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가장 두려워하며 경계해야할 사탄의 유혹은 바로 음란입니다. 모든 길은 섹스로 통합니다. 톤의 결말도 섹스입니다.  건강과 풍요와 여유로움의 결과도 섹스로 통합니다.

사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죄용서함만이 해방될 수 있습니다.

버가모교회의 사는 길은 우상숭배와 음란에서의 해방이며, 사는 길은 주님의 보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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