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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황무지에서 장미꽃 같이 / 삿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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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황무지에서 장미꽃 같이 
> 본문: 삿 11:1-11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워지는 노래가 두 가지가 있는데, Amazing Grace'와 'God bless America' 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로 잘알려진 405장 찬송과 '하나님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로서 9월11일 테러사건 이후 누구보다도 자신들만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확신이 깨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떠났던 성경이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다시 자리매김을 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 분주했던 그들의 발걸음이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보고를 들으면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겐 강할 때와 약할 때가 있는데, 강할 때에는 사실 여러 가지 외형적 요인, 즉 돈이나 권력, 혹은 지식으로 포장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약할 때에는 그 모든 형식적 포장에서 떠나 있기에 가장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생이 길르앗에서 나은 아들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성장해 가면서 적자의 위치에 있는 형제들이 서자의 위치에 있었던 입다를 쫓아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쫓아낸 이유를 성경은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이유였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힘없이 적자라는 아들들에 의해서 쫓겨났습니다.

3절에 보면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아마도 핍박을 받고 '돕'이라고 하는 땅으로 피신을 한 입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입다의 주변에 잡류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잡류란 불량배, 건달,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성경은 잡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입다에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입다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암몬이라고 하는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의 군대가 강하므로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여러 방향으로 의논하고, 또 의논한 결과 "입다를 데려와야 되겠다" 고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결정을 한 것입니다.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위기가 왔을 때 자기들의 힘으로 감당이 안된다고 판단한 그들이 입다를 초대하자고 한 것은, 그만큼 입다가 돕땅에 있으면서도 탁월한 리더쉽과 용맹을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시오" 전쟁의 장관이니까 군대 장관이겠지요. 초청을 받은 입다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입다의 마음에 아직도 분노가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분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분노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것을 누르고 누르고 살아가다 보니까 화병이 생기게 되지요. 며느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식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해요. 이웃 때문에도 그럴 수 있고,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입다에게도 분노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에는 나를 우습게 여기고 적자가 아니라고 쫓아내더니 이제는 나보고 군대 장관이 되라고.." 그런 표현이지요. 길르앗 장로들이 머리숙여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십시오" 이제는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셔서 승리할 때 정말 나로 머리가 되게 하겠습니까?" 입다가 확인을 하자 길르앗 지도자들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신뢰가 인정받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래전 기억으로 지나갔지만 옷 로비 사건으로 유명한 세 여인, 그들은 모두 한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같은 그룹에서 성경 공부까지 하던 사이였습니다. 언니, 동생하며 화기애애하던 때의 남편은 장관이었고, 대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잘 나갈 때의 부인들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화기애애했지만 남편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괜찮게 보였던 이들의 모습도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남편이 무너진다고 덩달아서 아내들까지 무너지면 안됩니다. 아내가 혹 무너진다고 해서 남편이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과연 신앙이 있는가는 무너질 때 알 수 있어요. 잘 나갈 때는 누구나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 잘하고, 헌금 잘하고, 뭐 여러분 모든 봉사의 자리에 잘 참석할 때 잘나갈 때 그러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이 부도가 나고, 도망 다녀야 되고, 삶이 깨지고, 믿음이 깨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여전히 동행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믿음입니다. 잘 나갈 때의 신앙은 그래서 그렇게 인정받기 어려워요. 마치 시집, 장가가기 전의 믿음과 같습니다. 결혼해 봐야 알아요.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그래도 결혼할 때 배우자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믿음은 삶이요, 행동이지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두 가지의 부분에서 은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환경의 장애를 뛰어넘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셨다면 환경의 고통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남편이 잘 될 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구요, 언제나 자식들이 일등만 할 수 없어요. 한 반이 40명이면 일등은 하나밖에 없는데 모두 일등만을 원하니 그게 문제 아니예요. 그럼 40등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해줘야지. 누군가는 40등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삶 속에서는 고통이 있습니다. 환경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마음속에 "내가 부모를 좀 더 잘 만났다면 내가 이 모양은 아니었을 텐데.. 좀 부자 부모를 만났다면.. 집이라도 좀 몇 채씩 남겨주고 가셨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혹이라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것입니다. "정말 내가 좀 더 배웠다면 이 모양은 아닐텐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거예요.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분들에게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은혜로 초대하신 줄 믿습니다.

입다는 운명이 기구했어요. 기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이나 받았겠습니까? 사람 대우도 못받고 살다가 결국은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산악지역에서 도움이 안되는 잡류들과 살아야 했습니다.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닌 삶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세계의 여러분야에서 분부신 횔약을 펼치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외적 조건의 열악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하고 있어요. 키가 작은 분들이 정치, 경제, 학계, 예체능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축구선수였던 마라도나의 자서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는 저보다도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만 월드컵을 재패할 수 있도록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입니다.
그의 글을 보니까 남들과 같이 오후 훈련이 끝나면 다른 선수들은 샤워하고, 잠을 자거나, 텔레비젼을 보거나, 여가를 즐기고 있을 때, 그는 다시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날 훈련 중에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부분을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또 연습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갑절이나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여러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 환경의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목회자 부모님을 만나서 신앙적으로 무척 행복했지만 환경적으로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초등학교 6년을 무려 6번이나 옮기면서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일 중의 하나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서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으니까 인사하세요" 그러면 나가서 자기 이름 대고 인사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어요. 4번이나 그 일을 했어요. 1,2,3학년까지 반장으로 잘 나가다가 그후 학교를 3번이나 옮겼으니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졸업시험 때 강단 마루바닥에 엎드려 시험을 치루면서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한 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고 속상한지 몰라요. 학교 공부가 끝나면 부유한 친구들이 삼삼오오 과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철봉대에 매달려서 그 속상함을 달랬습니다.
턱걸이를 하니까 잘 안되지요. 헌데 배치기를 하니까 됩디다. 그래서 턱걸이를 시작했는데 한 20개씩 했어요. 안되면 배치기를 해서 올라갔어요. 친구들은 과외 공부를 가는 동안 나는 철봉을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나는 좀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내가 축구를 하면 국가대표가 될거야" 그래서 중학교를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가기 원했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그런 것을 알아서 이렇게 뭐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중학교를 가니까 하키부가 있습디다. 용산고등학교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우승을 다투는 그런 하키부였어요. 그런데 하키는 하기가 싫더라구요.
제가 단거리를 11초 9를 뛰었더니 육상 선생님이 "너 육상부 해야 된다" 며 수업시간에 불러내었지만 그것도 마음에 싫어서 안나갔어요.
축구부가 있었으면 나갔을 텐데..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축구와는 거리가 멀게 주님께서 길을 인도하신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목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마 중학교때 축구부가 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축구라고 하는 기술로 국가대표는 못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얼마전에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목회자 국가대표단 단장'이라는 직책을 통보받은 것입니다. 드디어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축구 선수로서가 아니라 스포츠 선교 사역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에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저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 장애의 파묻혀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속상해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면 안됩니다.
오늘 입다는 자기 주변에 잡류라고 표현된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들과 함께 거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되지는 않았어요.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말라" 곧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 시민인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게시니 두려움이 없도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두 번째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쓰임을 받을 때를 기다릴 줄 알자" 마음속에 복수심만 불타고 자존심만 가득 차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창세기의 요셉을 기억해 보세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아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여기 입다가 형제들에게 쫓겨나듯이 요셉도 형제들에게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꾼으로 일했고, 노예로 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은 요셉의 변함없는 신뢰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말입니다. 할렐루야!

요셉에겐 그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머리가 되게 하셨을 때 자기를 미워하고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팔아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왜 놀랐습니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악몽과 같은 기억.. 우리는 그를 팔아먹었는데, 우리는 그를 미워했는데, 우리는 그를 때렸는데, 우리는 그를 빈 우물에 처박았는데 그가 애굽의 머리가 되어 자기 앞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가 복수심만 불타고 분노에만 불타서 자기의 행동을 했다면 그는 큰 그릇은 아니지요. "형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통하여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해요. 나를 미워하는 그들에게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은혜도 원수로 갚는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여러분들 같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세상은 은혜도 원수로 갚지만 우리는 원수도 은혜로 갚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그랬어요. 입다가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그릇이 컸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평화의 도구로, 구원의 도구로, 축복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오늘 입다는 자신을 초대하는 그들에게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부르시는구나" 국가를 위해서 준비된 자신이 쓰이기를 원했고, 민족들을 위해서 자기를 미워했던 그 형제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때때로 고난의 자리에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향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분노와 자존심의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고 자존심보다 더 귀한 것,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믿음으로 서기 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옵소서. 내게 능력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실 때 그 사명에 맞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필립 브룩스 목사님이 기도했듯이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요청하듯이 여러분들도 이 시대에 황무지에서 장미꽃 핀 것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인물들로 새롭게 준비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때때로 환경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좀 더 나은 여건이었다면.."
주님,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돕땅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과 함께 기거했던 입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원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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