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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 / 눅 16:8~13 (출 3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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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의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 
본문 : 누가복음 16:8~13 (출애굽기 32:15~20 참조) 
 
  교회의 역사를 더듬어 볼 것 같으면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중세를 거쳐서 근세에 이를 때까지 진리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모든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 진(眞)이라고 하는 잣대를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진짜냐, 가짜냐?" "참이냐, 거짓이냐?" 다른 사상이나 이념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정통이 생겼고 또 이단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통이냐, 이단이냐?"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교회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근세 이후 지금까지는 선(善)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윤리, 도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판단 기준이 다만 도덕과 윤리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알코홀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는 아무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사귀는 사람도 교회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의 분위기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해지고 싸늘해졌습니다. 너무나 굳어졌기 때문에 교회는 그 매력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와서 교회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美)의 시대입니다. 아름다운 것, 멋진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또 약간의 잘못이 있어도 좋습니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고 또 멋만 있으면 교회는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교회는 향기가 있어야 하고 또 멋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의 교회는 멋이 있고 또 매력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일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멋이 있고 매력적인 사람일까요? 불평과 원망을 늘 일삼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나름대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일까요?

  앞으로의 교회의 주역이 될 아름다운 사람은 첫째로 좀 부족한 것 같더라도 자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일찍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필요한 요소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만 자족하는 마음이 강조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옛날 헬라 철학자들도 자족하는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적은 것으로 넉넉지 않는 자는 아무것으로도 넉넉할 수 없다."

  사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이 타 들어갈 뿐입니다. 그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을 정복한 후에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을 묻는 부하에게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어서 운다네." 그렇다면 이 지구를 그의 손에 넣어 준다고 할지라도 정복하지 못한 우주가 있다고 하면서 그는 울었을 것입니다. 온 땅을 정복하지 못해서 울었던 그는 결국 그 욕심 때문에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배고픈 여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시 울타리의 틈새가 너무 좁아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여우는 며칠을 굶었습니다. 배를 홀쭉하게 만든 여우는 포도원에 겨우 들어갔습니다. 포도를 실컷 따 먹고 나오려니까 배가 불러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또 다시 며칠을 굶고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우가 중얼거렸습니다. "나올 때나 들어갈 때나 배고프기는 마찬가지군..."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싼 관에도 서랍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수의에도 주머니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져온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가져갈 것도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물론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돈은 쓰기에 따라 악이 될 수도 있고 또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칼이 도둑의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되지만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좋은 요리 도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결코 가난을 예찬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별로 자랑할 것도 못됩니다. 또 가난이 미덕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은 죄도 아닙니다. 사실 재물이 없을 때보다는 재물이 지나치게 많을 때 타락할 기회가 더 많지 않습니까?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현장인 에덴 동산에 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

  다음으로 앞으로의 교회의 주역이 될 아름다운 사람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자 백성들이 아론에게 와서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일어나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그러자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귀고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아무리 침묵이 금이라고 하지만 침묵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불의 앞에서 침묵은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론이 백성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출 32:5) 그들은 하나님을 제사에 굶주린 분으로 생각하고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듯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착각도 아주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산에서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모세가 그 꼴을 보고 크게 노했고 급기야 그 귀한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시켜서 백성들을 징벌했는데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약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정말 화가 나서 그 귀한 돌판을 던졌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단순히 화가 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어느 목사가 화가 좀 난다고 해서 강대상을 발로 찰 수 있겠으며 또 성경책을 집어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돌판은 보통 성구사에서 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십계명을 기록하신 돌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린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아직 십계명이 전달되지 않았어요. 제가 그 돌판을 던져 깨뜨렸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죄라는 것도 모른답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가볍잖아요. 죄라는 사실도 모르는 저들에게 벌을 주시면 아니됩니다!" 어느 마을에 약혼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만 실수로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재판을 받기 전날 밤 그녀와 약혼한 남자가 조용히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약혼증서를 찢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이 약혼한 여자의 신분보다는 처녀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 좀 더 유리할 것 같아서 이 약혼증서를 찢소." 증서를 찢음으로서 참 사랑을 보여 준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용서를 간청하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것이 저 혼자만의 생각이겠습니까?

  끝으로 앞으로의 교회의 주역이 될 아름다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는 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혼자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 그는 불의하지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처한 형편과 처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름 백 말 빚진 자에게는 쉰 말을 빚진 것으로 고쳐 쓰게 하고 또 밀 백 석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 빚진 것으로 고쳐 쓰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그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이 비유는 신약 성경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서를 위조한 청지기의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짓을 한 청지기를 잘했다고 칭찬한 주인의 생각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도덕성을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이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심을 주시는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말씀을 통해서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교훈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유를 잘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이 천지 만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안 듣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소유를 얼마나 지혜롭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미래는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교회를 세워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바울 사도처럼 받은 바 은혜에 만족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울러 모세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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