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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송할 이유 (시 10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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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할 이유 (시편108편1-13)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심장의 맥은 리듬이요, 말은 선율이요, 억양은 음정, 이미 음악의 기본적인 요소를 갖춘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하여 왼 만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은 곧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음악에서의 가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주 자그마한 일에도 기뻐하며 즐거워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하찮은 그런 것에도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두가 축하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 기꺼이 노래하며 춤을 출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얻게 되는 자그마한 기쁨에도 우리는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삶 자체가 찬양이었고, 마리아도(눅1:46-56), 사가랴도(눅1:67-79), 시므온도(눅2:29-32),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까지도 찬양으로 마침을 볼 수 있습니다.(마26:17-29,30)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함께 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찬송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어진 시간에 하루 세끼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신체에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만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송은 언제 하는가요?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한다면 넌센스일까요?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찬미하였다고 하는데 시간을 정해서 했겠습니까? 유대교는 제사를 정해진 시간에 드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어느 때든지 드려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고 말함으로 시의 문을 엽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편 기자의 감격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감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합니다(3절).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그분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미쳤다고 말합니다(4절).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이 온 우주에 가득 찼음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분의 놀라우신 인자와 진실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최고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구원(108:5~13)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이 들리는 것입니다(5절).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통치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봅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라고 말합니다(10절). 역사의 현장 속에서 시편 기자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라는 사실입니다(12절). 이 고백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의지해 우리의 삶을 보장하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믿기에 그분을 의지하여 담대히 행동합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구원의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노래

훌륭한 가수는 악보를 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서전을 노래합니다. 자기의 실패, 성공, 뉘우침과 기쁨 그리고 참회와 결심을 모두 묶어서 부를 때 찬송가나 성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네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앙의 간절함이 찬송 속에서 피어날 때 비로소 성가가 되며 그것이 '새 노래'가 됩니다.

찬송의 세 가지 힘

찬송을 흔히 세 가지의 힘으로 말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 밖으로 뻗어 가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주님 가까이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찬송은 위로 올라가는 힘입니다. 또한 나에게 위로와 평화와 회개와 기쁨과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 주는 찬송은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으로서의 찬송을 '신앙의 길잡이'라고 한다면 내 속으로 들어와 기쁨과 용기를 주는 찬송은 소망을 향한 길잡이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찬송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길잡이' 역할인데 이것이 밖으로 뻗어 가는 힘입니다. 찬송은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우울할 때 마음을 위로해 주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며, 지저분한 생각들을 정돈해 줍니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 사람은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이며 예배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넘치기를 바란다면 열심히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극장에 영화 보러 가듯이 교회에 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고, 소설책을 읽듯이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고, 강의나 연설 듣는 것처럼 설교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고, 노래방에 가서 유행가 부르듯이 찬송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찬송을 하다가 찬송가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리는 감격 속에서 찬양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사 한 절 한 절이 다 내게 주신 하나님 은혜 같아서 벅차오르는 감격과 넘치는 찬양의 경험을 하신 분은 찬양의 신비를 아실 것입니다.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노래

찬송과 기도는 영적 생명의 호흡입니다. 찬송과 기도가 활발한 교회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잘 자랍니다. 찬송은 개인의 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혼의 노래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영혼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찬송은 감사와 기쁨의 넘침입니다. 찬송은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표징입니다. 호화스러운 집에서 저주와 분노와 체념 속에 사는 것보다 초라한 집에서 찬송을 부르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찬송은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찬미합니다. 찬송은 영혼의 깊고도 맑은 울림일 뿐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고정된 것일 수 없고 남이 대신 불러 줄 수도 없고 남의 것일 수도 없습니다. 참된 찬송은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혼으로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믿음의 선조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체험한 은혜를 노래로 만든 것들입니다. 모든 찬송이 하나님 사랑의 감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부르면 은혜롭지 않은 찬송이 없습니다. 믿음이 살아 있고 영혼이 살아 있다면 늘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은혜의 체험이 새로운 찬송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 시(詩)와 노래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영혼이 얕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생겨난 우리의 찬송을 부를 때 우리는 우리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이끌어 갈 활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정치, 종교, 문화적으로 독특하게 형성된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신명이 있고 곡조가 있고 가락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옥한 마음 밭에 믿음의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깊이 내려, 은혜로운 찬송이 꽃피어야 합니다.

찬송에는 힘이 있고 가락에 신명이 담겨야 합니다. 찬송은 악한 귀신을 몰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행과 저주와 어둠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능력입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어두운 세력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옥에 갇혀서 찬송을 불러 이겼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생각, 파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불안과 걱정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본질, 바탕 근원은 기쁨입니다. 삶의 껍데기, 표피적인 데서 이런 저런 근심걱정으로 지겹고 따분하고 답답하게 지내지만 생명의 본 바탕에 이르면, 죄를 벗고 하나님 앞에 맨 몸으로, 맨 영혼으로 서면 기쁨이 솟구칩니다. 오히려 세상적 기쁨의 이유나 근거가 없을 때, 순수한 생명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독하고 답답한 상황, 절망적이고 두려운 상황이고 시들어 말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놀라운 것은 속에서 자꾸 기쁨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 뺏기고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상황에서 배짱이 생기고 기대와 욕망을 버린 상태에서 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도 맑은 샘물도 푸른 강물도 하나님을 노래하고, 푸른 나뭇잎과 붉은 꽃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생명의 기쁨이 피조세계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하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감옥에서의 기쁨, 기쁠 것 없는 상황에서 직접 인생의 바탕과 접할 수 있고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찬송은 죽음에 대한 생의 승리입니다. 죽음의 골짜기, 시련의 골짜기에서 기쁨의 찬송이 터질 때 지옥의 권세는 무너집니다. 믿음으로 탄식과 한숨과 저주가 기도로 찬송으로 바뀝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희망을 갖고 줄기차게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물은 흘러가야 썩지 않습니다.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썩은 물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머물러 있게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통해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과 살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끊임없이 찬송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어떤 은혜이든지 은혜를 받으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피조물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은혜의 특성입니다. 피조물들의 본래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표현이 바로 찬송입니다. 은혜 받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언제나 찬송이 넘칩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의 덕을 기리는 것입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감사하고 널리 전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찬송을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시와 노래 그리고 예물이 되기도 합니다.

찬송할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늘보다 높고 넓으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하늘에 가득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께 찬송하여야 할 이유는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고 언제나 더 유익한 것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무도 크고 넓기 때문입니다.

찬송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다운 보석들로 꾸미는 것도 아름답고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이 더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찬송으로 먼저 채워야 합니다. 찬송으로 채워지지 않는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찬송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늘로 향하는 새의 날개

여러분, 새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새의 다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만일 새가 그 가느다란 다리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새는 참으로 힘이 들것입니다. 새가 먹이를 찾아 나설 때,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아설 것이고, 험한 골자기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며, 넓은 강물이 새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입니다. 또 무서운 짐승이 따라올 때는 꼼짝 못하고 잡아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새는 그 다리만으로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새는 아무런 희망도 없기에 그 좋은 목소리로 아무런 노래 한번도 불러보지 못하고 한 숨만 쉬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만약 새가 그 가는 다리마져 부러졌다면 이제 어찌하겠습니까? 새는 그 가는 다리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둥지에 누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의 다리를 왜 그렇게 가늘게 만들었는가 하면. 또 다른 대책으로 새에게 아주 강하고 아주 놀라운 바위를 넘을 수 있고, 산을 넘을 수 있고 짐승을 피할 수 있는, 심지어 저 사나운 호랑이도 올라갈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를 주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땅으로 향하는 새의 다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늘로 향하는 새의 날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위를 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똑같은. 이와 똑같이, 우리 사람들에게도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는 영혼이 새의 날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새의 가는 다리로 생존의 몸부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몸부림을 하고 있으며, 어쩌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면 이제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 우리를 뒤쫓아 오는 무서운 맹수, 저 절벽, 저 강만을 바라다보고 많은 사람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새가 어떻게 해서 날았다고 교훈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새는 그 가는 다리마져 부러졌을 때에야 날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새가 처량한 가는 다리에서 더 처량한 부러진 다리가 되었을 때야 새는, 도리어 저 바위를 피할 수 있었으며, 저 산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는 다리였는데 아예 부러지기까지 하셨습니까? 동정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잘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새가 날아오른다고 해서 새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나 낭떠러지나 산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날개가 펴진다면 그것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가는 다리로 힘겹게 살던 새가 다리가 부러져서 날개를 얻게 되었다는 탈무드의 우화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교훈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우리의 가는 다리만 보고 절망하고 살지 맙시다. 또한 그 다리마저 부러졌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계기로 삼으십시다. 능력의 날개를 활짝 펼치는 일 가운데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하므로 희망찬 영혼의 날개를 힘차게 펼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며, 설교는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움직인다.” 고 합니다.

다음의 질문에 신앙고백적인 대답을 찾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 찬송합니까? 그리고 찬송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찬송 생활이 여러분의 생활의 전부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의 주제들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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