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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즐겨라 - 요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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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즐겨라
젊은이 설교 홈 myhome.naver.com/chapelainkhj 천안외대 김홍진 목사
요한복음 16 : 32

  대학에서 젊은 C.C.커플이 교제를 했습니다. C.C.가 무슨 뜻인지 아시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면서 물어봤습니다. C.C.가 뭐냐고? 한 학생이 그래요. 컨추리 클럽요, 어떤 학생은 코카콜라 그래요. 예쁜 여학생이 이래요. 코밑에 코딱지요. 여하튼 이 C.C.가 아름다운 교제를 하다가 여자가 자기 이상과 비전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남자에게 교제를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학생이 "나는 너 없으면 못살아. 죽고 말거야!"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이 찾아와서 상담을 한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지요?" 여러분, 이 남학생이 어떤 학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 여학생과 헤어지면 죽는다면 이 남학생하고 사귀면 안됩니다. 왜요? 여학생이 없어도 당당히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존감이 없는 남자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학생이 없어서 못산다면 이 남학생은 마마보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학생이 없어도 홀로 가치가 있는 존재로 서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남학생은 홀로 됨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홀로 있는 경험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이 남자 저 여자와 사귀면서 해어지면 곧 바로 또 다른 남자 여자를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격장애 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요? 홀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홀로 있는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금방 사귑니다. 좋은 성격 같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홀로 존재하지 못하는 정서장애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좀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닙니다만. 애인이 죽었어요. 보세요. 남이 죽는 다고 같이 죽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동반자살" 틀렸습니다. 등신입니다. 그이가 죽었다면 내가 살아야하지요. 죽기는 왜죽어요.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홀로 있음에 대한 두려움과 홀로 있음에 대한 무의미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동반자살이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음, 이것은 결코 우리 인생에서 쉬운 과정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홀로 있으면서 외로움을 느끼고 고독에 빠집니다. 그러나 홀로 있지만 고독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길은 없을까요? 혼자 이지만 외롭지 않고, 홀로 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이지만 고독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수는 없을까요? 그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정답을 드립니다. 기대하십시오. "홀로 있음을 경험할 때 하나님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하나님을 즐기면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인생은 홀로 존재합니다. 인생은 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홀로 가는 삶입니다. "목사님 저는 홀로가 아닌데요. 저는 집에 부모님과 형제 자매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늘 함께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홀로 라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가 없습니까?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들과 많은 것들을 주고받고 하지만 결국 내가 홀로 라는 사실을 언뜻 언뜻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읽은 오늘의 본문을 봐도 예수님도 홀로 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늘 함께 있었지만 최후에 십자가를 지러갈 때는 홀로 되었습니다. 혼자서 그 골고다의 거친 언덕을 걸어야 했습니다. 홀로 버거운 십자가를 지어야 했습니다. 홀로 십자가에서 거친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도 역시 홀로 였습니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그는 또 다른 나가 아닙니다. 타인입니다. 타인 앞에서는 내가 홀로 존재합니다. 인생은 홀로 있게 마련입니다. 인생은 홀로 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도 같이 죽어줄 수 없습니다. 사는 것도 내가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남이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습니다.

  홀로 사는 삶을 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결혼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도 홀로 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하지만 내가 그가 될 수 없고, 그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내 자신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홀로의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 친구도 만납니다. 그러나 친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친구는 친구고 나는 나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즉 홀로 서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에 대해서 홀로 라는 표현을 하고 있음을 아세요. 욥기 9장 8절에 보면 하나님도 홀로 계신다고 했습니다.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분도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인생은 홀로 서 있기에 그 책임도 홀로 져야 한답니다. 홀로를 경험할 때, 홀로를 순간순간 느낄 때, 어떻게 인생을 그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홀로 있음을 경험할 때, 어떻게 홀로의 삶을 멋있게 살아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여러분은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회피하기 위해서 노력합니까? 홀로 있음을 즐기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이 홀로 라면 이 홀로를 느낄 때 인생을 살맛 나게 가꾸어야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가능할까요?
  둘째,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홀로 있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로 있음을 싫어합니다. 홀로 있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홀로 있으면 고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홀로 있음을 즐기지 못합니다. 홀로 있음을 잘 관리하지 못할 때, 홀로 있음은 외로움과 고독의 출발이며 인생에 먹구름을 씌워줍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 홀로, 혼자 있음을 어떻게 승화시켜야 합니까? 바로 홀로 있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홀로 있음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홀로 있음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음이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호로 있음의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도 홀로 있음의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시간만 있으면 일부러 홀로 있음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혼자 있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홀로 당당히 이 세상에 서서 홀로 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데이빗 루이스만이라는 사람이 유행시킨 말 가운데 '고독한 군중'(The loney crowd)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고독합니다. 홀로 있음을 누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음을 견디지 못할 때 외로움으로 빠집니다. 이것이 고독입니다. 고독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때의 홀로 있음은 우리를 비극으로 이끌어갑니다.

  고독이란 무엇입니까? 고독이란 "사람이 많이 있어도 혼자라고 사실을 경험할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 외로움으로 빠지면 고독입니다. 혼자라는 사실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홀로 있음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홀로 있음을 참 멋있게 승화시킨 기독교 문호가 한 명 있습니다. 단테입니다. 신곡을 쓴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의 소년 시절은 그의 사모하던 연인 배아뜨리체의 죽음 때문에 홀로 되는 고독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 후 그의 생의 제 2기에는 프로렌스시에서 추방됨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홀로됨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제 3기에는 유적과 홀로 방랑의 생활을 보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철저하게 홀로 있는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저 유명한 신곡을 썼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고독의 잔을 마시던 단테는 그의 시련을 통해서 홀로 있음을 초월하는 위대한 삶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원리만이 유일한 세력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홀로 있음을 즐길 줄 아는 삶, 오히려 홀로 있음이 큰 축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홀로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홀로 있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홀로 있음이 결코 외로움만은 아닙니다. 홀로 있음이 결코 고독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홀로 있음을 즐길 때 우리에게는 홀로 있음을 느낄 때 가장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회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셋째,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하나님을 즐기면서 지내십시오.

  청년 여러분, 홀로 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고독을 씹으며 사람을 그리워합니까?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려고 합니까? 홀로 라는 느낌을 받을 때 고독해지려고 합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홀로 있음을 즐길 때  이것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라고 주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음을 느낄 때, 이 때가 바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진실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칼 로저스는『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책에서 고독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상태입니다. 누구누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고, 식구가 많고, 일이 많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고독을 느낍니다. 나 자신이 불안스럽습니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될 때에 여기서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둘째로, 고독은 자기를 내어줄 만한 상대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느낀다고 합니다. 자기 전체를 내어 맡길만한 대상,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내가 목숨을 걸고 마지막 생을 쏟을 만한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불안하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로저스 박사의 의견대로라면 고독한 방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헤어 나오는 방법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가져야 합니다. 홀로 있어도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 앞에 나아가 신앙을 가질 때 자신을 존경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인생 홀로 있음을 느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즐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헨리 나우웬 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의 은총이 네게  있어 라고 말하는 작고 세미한 소리가 있습니다. 이 소리야말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홀로 있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나우웬은 고독을 경험해야 한다고 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요? 이 속에서 하나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는 너를 사랑해"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홀로 있음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음성을 말입니다. "내가 말을 배우기 전부터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부터 주님은 나를 도우셨지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지요"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들 이야기 중에 소속감을 가질 때 자신이 고독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eed of belongings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속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속이 필요합니다. 끈끈한 정을 가져야 합니다. 친구와 더불어, 직장과 더불어, 나라와 더불어, 민족과 더불어, 이렇게 소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소속감이 나의 고독을 해결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줄 자 그 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홀로 있어도 즐길 줄 알고 고독에 빠지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홀로 있음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즐긴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그는 세상이 폐괘하고 타락했을 때 홀로 하나님을 즐긴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를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압니다. 그는 세상에서 살지만 홀로 있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홀로 나무를 산으로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지만 노아는 방주를 홀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오직 홀로 말입니다. 그는 홀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하나님을 즐겼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방주를 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방주 문들 닫고, 홍수가 나서 온 땅이 덮일 때 노아는 하나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왜 홀로 있음을 느낄 때 하나님을 즐깁니까? 그 분은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사람들이 핍박하고 잡으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한복음 16장 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할렐루야!

  맺는 말

  음악에서 독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혼자 연주하고 혼자 발표하고 노래 합니다. 독주가 고독한 것입니까? 독주가 외롭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협연보다 독주가 자신을 즐기는 시간입니다. 독주 때에 더욱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가지고 자신의 특징적인 음악을 멋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음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성자가 홀로 수도생활을 하며 많은 고행을 하며 섬기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세상 떠났을 때에 그가 천국 문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나오셔서 이 수도사를 맞아주었습니다. 나무도 감사해서 그는 주의 영접을 받는 순간 자기가 걸어온 한 평생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멀리멀리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한 평생 산 그 길이, 오솔길 험한 길 고갯길이 전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발자국이 두 줄입니다. "저는 혼자 외롭게 살아왔는데, 가족도 없이 살아왔는데 어째서 발자국은 두 줄입니까?" 하고 그는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느니라." 그런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본즉 줄곧 발자국이 두 사람 발자국으로 나오다가 더러는 한 사람 발자국으로 나올 때가 있어요. 그는 다시 주님께 여쭙니다. "발자국이 한 줄로 난 저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째서 저기는 한 줄의 발자국뿐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 때는 네가 너무 힘겨워해서 내가 업고 건너갔느니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혼자 산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홀로 있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홀로 있음을 선뜻 느끼십니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언뜻 내가 홀로 라는 사실이 다가옵니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즐길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홀로 있음은 고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홀로 있음은 외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홀로 있음은 하나님을 즐기도록 주신 선물입니다. 청년들이여, 이 홀로 있음을 축복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을 즐기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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