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 18:21-35

  • 잡초 잡초
  • 424
  • 0

첨부 1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18:21-35

오늘 본문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본문의 첫 절인 21절에는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물음이 나오고, 22-35절까지 전체 속에는 예수님의 답변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을 다시 보면 22절은 21절에서의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일차적 답변이고, 23-34절은 그 답변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며, 마지막 35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먼저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그냥 어쩌다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잘못에 대해서 세 번까지는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랍비들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앞서서 용서의 중요성을 배운 베드로는 자기 깐에는 랍비들의 생각보다 두 배를 생각했고 거기다 조금 더 보태서 완전수인 일곱 번을 채워가지고 이 정도면 최대한으로 용서하는 것이겠지 여기며 예수님으로부터 그 확인을 받고자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의 기대와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490번이 됩니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그것도 같은 잘못에 대하여 490번이든 일흔일곱 번이든 거듭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용서의 한계를 정확한 횟수로 정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시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끝까지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변이 베드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뿐 아니라 그와 나머지 제자들을 당혹케 할 것을 아시고는 당신이 답변하신 말씀의 뜻을 그들에게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유를 요약하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가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왕 혹은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이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인간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자들을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달란트와 데나리온이란 화폐단위에 관해서 알아두어야 합니다.

달란트는 로마제국 내에서 알려진 최고액의 화폐단위였습니다. 그리고 만이라는 숫자는 헬라어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숫자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숫자단위만큼의 가장 큰 화폐단위인 만 달란트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입니다. 아마도 만 달란트라는 것은 그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의 무한대의 금액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속에서 만 달란트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종의 간청을 듣고는 아무 조건도 주저함도 없이 용서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용서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면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은전으로서 한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정확한 환산기준을 알 수 없고 이에 관한 견해의 차가 대단히 큽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 60데나리온에서 최대 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율은 최소 6000배에서 최대 100만 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6000만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만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100억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만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만든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5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라고 가르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의 가르침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맞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하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을 먼저 앞세우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라 가르치신 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말씀이 그 뜻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즉 나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 죄를 용서 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사람은 자신도 이미 남의 죄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앞서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단지 용서의 양적 한도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의 깊은 의미와 그 근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이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의 무제한성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 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용서의 당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토록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배은망덕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된 자라는 심판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악한 종"이라는 질책을 들을 일들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불쌍히 여기심과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도 우리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험하게 다루며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즐기지는 않는지? 우리는 간음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요8:3-11)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자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돌팔매질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러댔고,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봐 여론에 밀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막15:15)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군상들의 행태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 자신을 통렬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용서의 빚을 사람들을 향하여는 일생을 통해 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용서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은 언제나 용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도 크나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상담전문가들이 종종 발견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문제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 용서하려고 하지 않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의 의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병원마다 그 안에 "용서"센터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진 미국의 주간지 "Time" 최근호에 따르면 어느 교수가 25년간 두 종류의 사람들을 비교 연구했는데, 늘 고민을 안고 살고 항상 불평을 일삼으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보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고 매사를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균 7년 반 수명이 더 길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의 건강에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물론 용서를 악용하거나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앞세우며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 하지는 않고 끊임없이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일을 자행합니다. 그래 놓고는 공동체가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어서 어떤 조치를 취하면 그들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남이 해야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고함칠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건덕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어떤 잘못은 무조건 덮어두지 않고 제재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가공동체의 안보를 위해 당연한 법적 조치나 교회의 건덕상 필요한 치리의 문제를 개인적 용서의 문제와 마구 뒤섞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말에 현혹되고 휘둘리는 어리석은 군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어떤 선결행위가 없어도 먼저 행할 때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할 때 더 아름답습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하고 끝까지 할 때 참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간구하심으로써 그 온전한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라면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고 우리의 완악해진 심령들을 쪼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면 그 사실에 대해 통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합시다. 용서할 줄 아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