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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서자도 안버리신다 / 창 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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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서자도 안버리신다
본문 : 창세기 21:8~21

  이 세상 전쟁 역사에 가장 시간이 오래가는 전쟁이 있습니다. 이 전쟁
은 수천 년이 지나도 끝나지를 않는 그런 전쟁이 지구상에 존재합니다. 바
로 성지라고 하는 이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끝나는가 하
면 또다시 시작이 되고 잠잠한가 하면 별안간 터지는 화약고로서 수천 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이 가나안 땅의 전쟁의 역사는 지난 카터 대
통령 때 피차 다 완전 해결을 보고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터지
고 있어서 요즈음 또 매우 험악한 사태가 되어 버렸고, 본 교회에서 성지순
례를 좀 함께 가는 프로그램을 하면 어떠냐고 그렇게 교인들이 물어봐서 다
른 것은 문제가 다 안되는데 현지의 사정이 너무 험악해서 위험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상당히 힘이 들 거라고, 그래서 이게 좀 잠잠해져야 성지순례
를 가지 별안간 지나가다 버스가 폭발을 해서 온통 사람이 다 죽어버리고
하는 이런 판국에 가기가 좀 힘들 거라고 그렇게 답변을 한 적이 있습니
다.
  왜 이렇게 끝이 없는 전쟁을 그 성지라고 하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곳
에서 하는 것일까? 한 역사 신학자가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
다. "창세기 21장 때문에 그렇다." 그랬습니다. 이 전쟁은 아브라함의 가정
에서부터 터졌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보면 여러 번 애굽에 갔
던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식구가
하나 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10대 소녀 하나를 노예로 얻어왔습니다. 아
마 돈을 주고 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 사라의 몸종으로 일을 하
게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아브라함의 집에 와서 몸종 노릇을 하는 이
하갈이라고 하는 애굽 소녀는 불쌍한 소녀입니다. 부모를 잘못 만났는지,
정세적인 현장이 어려웠든지, 집안이 가난했든지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가
정에 몸종으로 팔려와서 인종이 다른, 다른 가정의 몸종 노릇을 하고 살고
있으니 꿈이 많은 소녀 시절에 얼마나 슬픔이 크겠습니까? 아주 불쌍한 소
녀입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의 일부라서 노예 제도를 허용했기 때문에 마
음대로 사고 팔고, 심지어는 죽여도 그렇게 법에 큰 죄가 되지 아니하는 문
화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그 문화권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 소녀를 아주 필요하게 사용해야 될
그런 이유가 생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딸을 많이 주어서 바다
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 약속을 믿고 이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이 1,600 km나 되는 사막을 걸어서 하란을 거처 가나
안 땅에 왔는데 75세에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10년이 지난 85세가 되어
도 깜깜 무소식입니다. '아니, 어린아이를 주시려면 1년이면 넉넉한데 하나
님이 약속한 것을 꿈도 안꾸고 계시니 속았나?' 이런 생각도 하고, 아브라
함은 어느 날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
속은 하셨지만 자신을 바라봤을 때 나이가 벌써 할머니 나이가 되었단 말입
니다. 이미 생리가 끊어진 자신이 자연 과학을 뛰어넘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그런 판단이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
짓말인가? 그러면 나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은 약속을 해놓고 지키
지 않으신단 말인가?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취급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 하갈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약속한 아
들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데리고 살아
서 어린아이를 낳으라고 시킵니다. 이때 이 하갈은 본인의 의사가 절대 아
닙니다. 노예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는 팔려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십대의 소녀가 85세가 되는 할아버지
를 사랑했겠습니까? 시집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전혀 본인의
의사는 아닙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문화에도 씨받이라는 그런 문화가 있어
왔습니다.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하갈을 아브라함의 씨받이로 사용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닮은 훌륭한 아들, 이스마엘
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사라도 아주 만족하였습니다. 아마 그대로 계
속 살았다면 이 아브라함 가정은 그런 대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
겼습니다. 본처인 사라도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기 때문에 이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장 1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고하되 이
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집안 구조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라는 본처
이지만 둘째 아들을 낳았고, 하갈은 첩이지만 아브라함의 첫 아들을 출생시
킨 이상한 관계로 되어버렸습니다. "이 집안의 이 불편한 구조는 수 천년
을 내려오면서 끝없는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 신학자
들의 해석입니다.
  사실 이 사라는 이삭을 못 낳았으면 눈치 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삭
을 낳고 나니까 달라졌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마도 이삭의 돌잔치를 하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
였더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좋은 날, 이 집안은 이제 싸움판이 된 것입니
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쫓으시오!" 이건 뭐, 처음에는 자기가 다 시켜
서 해놓고 아들 하나 낳았더니 생각이 달라졌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이제 이 가족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어
려운 전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불
행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
입니다. 이삭을 낳은 것은 14년 후가 됩니다. 젖을 떼려면 1∼2년을 걸리니
까 이스마엘의 이때 나이는 아마도 16세∼17세 청소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갈은 적어도 20년 이상은 그 집에서 살았고 아브라함과 부
부 관계로 살아온 것만도 17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
하나님은 사라의 편에서 일을 하십니다. 12절 말씀에 나옵니다. "사라가 네
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사실 이 비극은 사라가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이 젊은 하갈을 데리고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요, 하갈이 늙은 영감에게 시
집가고 싶어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고 막 시켜 가지고, 강제로 자
기가 벌려놓고 이제 내쫓으려고 하니까 이거 어떻게 되는 거냐 말입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하나님이 사라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고 하는 결론 때문에 자신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관심이 떡 한 그릇, 사막이니까 물 한 가죽 부대를 만
들어 주면서 "나가다가 목이 마르면 마셔라! 배가 고플 때 이 떡을 먹어
라! 죽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나가거라!" 이렇게 되었단 말이에요.
이로써 하갈은 20년 종살이에서 죽도록 일을 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
게 가서 애까지 낳아주고 마지막 얻은 것은 떡 한 그릇, 물 한 통! 그 집
을 울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애굽 친정에 돌아가자니 20년 종살이하고 거
지꼴이 되어오는 그런 사람을 친정에서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또, 혼혈아
하나를 데리고 가기도 싫고, 안가면 안되는 상황이였습니다. 14절 '브엘세
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어떻게 해야 되나? 유대땅 브엘세바는 사막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새빨간 흙더미뿐이지 물이나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가 없는 사막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현장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마음에 아
브라함을 향하여 얼마나, 그리고 사라를 향해서 원망이 컸겠습니까? 지워지
지 아니하는 원한이 한으로 사무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
를 두고 마주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이때 하갈의 통곡은 정말 통곡입
니다. '사람의 가는 길이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벌어진 상황은 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상황인데, 이 고통은 사
라가 받아야지, 자기들 좋을 대로만 행동하는 히브리인은 정말 잔인한 족속
인가?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
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초적 조상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원한의 역사
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져서 17, 18살된 처녀들이 자기 몸에 자살 폭탄을
들고 버스에 뛰어 올라서 그 폭약을 터뜨려서 자기 몸을 산산조각으로 공중
에 날리면서 히브리인을 죽여버리는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게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
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 무엇이 급하다고 하갈을 데리
고 사고를 치느냐? 나는 네가 저지른 사건과는 관계없이 내가 계획한 나의
일을 그대로 실시하겠노라. 사라가 이제 아들 낳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계
획이다." 그러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때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인가? 하나
님은 때로 인간의 실수로 저질러진 비극도 하나님이 선한 인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도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신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하갈아! 울지 마라! 일어나라! 내가 너의 억울함을 다 기억하겠노라.
그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이것은 사라의 실수다! 그러나 내가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약속할 것이다." 그때 하갈이 눈을 떠보니
까 사막에서 샘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 물을 마시고 일어났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며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
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그가 바
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
를 삼게 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너는 아버지가 히브리인이지만 너는 모
계 사회의 조상이 되라." 인종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백인에 속합니다.
애굽인들은 히브리 인종과 아프리카의 중간형을 타고났습니다. 성경말씀 창
세기 16장 12절에 "이스마엘이 출생하면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고 하
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 이스마엘 후손들은 지금도 들나귀와
같이 중동의 뜨거운 사막을 끝없이 방황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은 아브라함의 실수로 빚어진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이 책임지지 아니하니
까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
이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는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국민은 계속해서 내어쫓
으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들은 절대로 내어쫓기지 않으려는 투쟁을 그렇
게 험악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자도 절대 버리시지 않으시
고 살려주십니다. 오히려 아브라함 집에서 평생 서자 취급받으며 서럽게 사
는 것보다 훨씬 떳떳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민족 형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
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오는 하나님
의 속성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구약 성경에 "아브라
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약간의 민족주의로 보이는데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이
요, 이스마엘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혼혈아의 하
나님이시다!
  우리는 성경과 우리 인류의 역사, 혹은 우리 세대의 경험에서 쫓겨난 자
식들의 역사를 말할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선민 사상에서 이
방인들을 모두 내쫓아버렸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책임을 빼앗아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는 이방 사람들에게 그 사역의 촛대를
옮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의 역사에는 히브리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그 사명의 감당자가 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흑인들이 미국에 온
것은 노예로 잡혀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예로 잡혀온 그들의 하나님이 되
셔서 그 땅에서 그들이 절대적인 성장을 해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그 노예
후손들에게 임했는데, 지금은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흑인입니
다.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우즈 같은 사람은 세계적 영웅의 자리에 있습니
다. 사실 솔로몬은 밧세바가 낳은 서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버
리지 아니하시고 지혜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이 뭐예요? 하나님은 약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서자를 절대로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민자들의 현장을 오랫동안 보고 살았습니다. 미국같은 나라는 백
인과 앵글로색슨과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다! 그 사람들이 주권을 다 가지고
있는 철학을 가지고 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그런 사람과 같이 그렇게 문화
가 형성이 처음에 되었습니다. 아프리칸이나 또, 아시아인들은 낮은 임금
의 블루칼라 일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이민을 왔고, 백인 우월주의라고 하
는 KKK단과 같은 극단이 생겨 가지고 공공연하게 사람을 핍박하고 그런 사
회에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아시안 이민자들은 그 사회에
서 "현대판 하갈과 이스마엘의 위치다!" 이렇게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이 소수계의 인권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여 미국 사회에
서 말콤X나 마틴루터킹 목사 같은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 운동
을 도와준다고 해서 케네디는 암살 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십여 년
전 우리 한국인 이민자들의 Identity가 그 사회에서 나타났습니다. 4. 29
폭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은 '라드니 킹'이라고 하는 흑인이
백인 경찰관들에게 매를 맞은 것이 참을 수 없는 하갈적인 감정의 폭발이었
다! 그러면 그 매맞은 흑인 사회는 백인 경찰서를 찾아가서 때려부수고 불
을 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라드니 킹'을 때린 경찰관을 무죄라고 선언한
법원을 가서 때려부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똑같
은 위치에 있는 한국인들의 가게를 모조리 때려부수고 불을 질러 버렸어
요. 그러면 한국인들의 위치는 또 뭐예요? '라드니 킹 족속들에게 또 매를
맞아야 되는 슬픈 민족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백인의 하나님이요 앵글로의
하나님이요 흑인의 하나님이 되시고 소수 민족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
게 되었습니다. '왜 사라가 잘못했는데 사라의 편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우
리는 죽어 가는 브엘세바 들판의 이스마엘을 보고 통곡만 하여야 되는가?'
그런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부조리는 누구의 책임이냐고 신
학적으로 사회적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시원한 대답은 없고 끝
없는 편견의 철학만 있어왔습니다.
  일제시대의 한 젊은이가, 조선인이 소록도에 끌려 왔습니다. 몸에 문둥
병 증세가 나타났다고 강제 격리 수용을 하기 위해서 잡아온 것입니다. 그
는 20대 젊은이로 강제적으로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나무 판때기 위에
누웠습니다. 왜 누웠냐 하면 "네가 아이를 낳으면 또 너 같은 아이가 나올
지 모르니까 잘라버린다!" 손과 허리와 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당하
고, 마치 짐승의 정관을 거세하듯 정관 거세를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꼼
짝 할 수 없는 나무 판때기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누
구인가? 왜 세상에 내가 나왔는가?" 그 나무 판때기는 지금 소록도에 보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한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의 꿈꾸던 사랑의 꿈은 나에게 깨어졌다. 여기 나
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면서 이렇게
누웠노라.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
다. 정관을 좌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
라던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이 현장을 보고 히포크라테스는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그 시는 지금도 현장에 붙어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
인가? 오늘 말합니다. "하갈아!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스마엘
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울지 말고 일
어나 아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라! 보라! 저 사막에 샘이 터지는 것을 보
라! 마시라!" 사막에 버려진 두 생명 그들은 마침내 하나의 큰 민족 형성
을 했으며 매우 강하고 억세고 활력을 지닌 들사람이 되어 이삭의 후손들에
게 절대 만만치 않은 존재로 튼튼한 자리 매김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혈관
속에는 투쟁과 정복과 강인한 뜨거운 피가 지금까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 같아서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전쟁은 끝이 안 날 것 같습니다. 하
나님은 이삭의 하나님, 그러면서 이스마엘의 하나님으로 오늘 약속하고 계
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위치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나는 하
나님의 백성이지만 서자인가? 나는 항상 슬프게만 살아야 되는가? 나는 누
구인가? 나는 항상 사막에 버려지는 존재이며 슬픈 통곡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항상 경제적인 약자요 건강의 약자요 민중에서의
약자로 살아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일어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
게 할 것이다! 울지 마라! 저 사막의 들판을 한번 바라보라! 샘이 터지고
있지 아니하냐?" 백인의 하나님,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소수 민족의 하나님
이 되시며 이삭의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온 세상이 바라
보는 매우 강인하고 억센 민족으로 그들은 자랐기 때문에 히브리 민족은 그
들의 위치를 인정할 때에만 그 땅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사막에서 터져 나
오는 생수를 마시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갈
과 이스마엘도 절대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였
지만 "뒷책임은 내가 져주겠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경험하는 때
가 있습니다. 사막을 방황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주저앉지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
의 의사가 아닌 그 많은 인간의 고통에 내가 참여자가 되어 줄 것이다! 내
손을 붙잡으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손을 잡고 사막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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