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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 (벧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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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 (벧후 2: 1-3)

 
1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
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
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
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
하느니라

(서론)
  사도 베드로는 어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이 세상의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변론가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논증을 갖고서 성경
의 권위성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절대적인 권
위를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에 있는 모든 예언
들은 이미 과거의 역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에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실현이 되었기 때
문에 앞으로도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틀림없이 다 실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
로 성경은 이 어둡고도 혼탁한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 서신의 첫 번째 장에서 강력한 언어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였습니
다. 이제 오늘의 본문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장에서는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매우 강력한 경고의 어조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순교의 시간이 임
박했음을 감지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양들의 순결한 믿음의 삶과 영혼을 위해서 
더욱 담대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
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
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으로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서 매우 강력한 어조로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
리 한국의 교회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멸망
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이 본문의 말씀
에 기록된 경고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시간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는 귀한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모든 거
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담대히 물리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
다.
 
1. 신약의 세계관
  성경의 세계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세상은 무서운 영적전쟁의 치열한 현장이
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보거나 초대교회에서 사역을 했던 사도들의 설교
와 서신서들에 나타난 가르침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사실은 완악한 마귀의 세력이 하나
님의 나라에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은 이 세
상에서 살면서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위험성을 늘 인식하는 믿음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이것을 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
금 전쟁터에 있는 군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모든 인간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곳입니다. 마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에 파송된 신문기자와 같은 처지입
니다. 그 신문기자는 얼마나 위험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길을 가다가도 폭탄이 
떨어지고 사정없이 총알이 날아오는 위험한 곳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종
군기자의 사명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위험한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라고 한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더 위
험한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가 어떻게 해
서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멀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
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
한 영적인 전쟁터에 놓여져 있음을 늘 인식하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영적으
로 근신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오늘 사도 베
드로가 본문을 통해서 강력하게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
워진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입니
다. 교회에서 몇몇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아닙니
다. 얼마든지 그러한 일이 교회내에서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
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로부터 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날의 교회에 있어서도 가장 큰 위험입니다. 지금 현재의 유럽 교회들을 살펴보면 너무
나 초라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을 대표하는 독
일과 영국의 교회도 똑같은 실정입니다. 그 원인은 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말썽을 
피우고 문제를 일으킨 결과가 아닙니다.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
로 침투하게 되었고 그 가르침에 수많은 성도들이 넘어가서 실족을 하였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인하여서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유럽의 
교회가 참으로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오는 잘못된 가르침은 대단히 간사하고 위험합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이같은 위험을 바라보면서 오늘 본문인 베드로후서 2장 1절에
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
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바로 단
어의 시제입니다. 과거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고 또 앞으로도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다가오는 미래
에도 있을 것이고 또한 현재에도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는 ‘민간’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민간’이라는 단어의 뜻은 영어로는 
‘The People’이라는 의미로, 한글로는 ‘그 백성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서 그 백성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민간’이라는 단어의 뜻은 사도 
베드로가 지나온 유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유대인들 가운데에 얼마나 거짓 선지
자들이 많이 있었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사
랑하는 성도들을 향하여서 “구약 성경을 보더라도 유대인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거
짓 선지자들이 과거에 일어났었느냐?”, “앞으로도 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형
성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너희들 중에 거짓 선생들이 또다시 틀림없이 일어나게 될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도 정신을 차리
고 이 거짓 선지자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중심을 두고서 지
혜로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2. 부정적인 측면
  그러면, 우리가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기준
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여기에 대해서는 먼
저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새것이고 현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무조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는 소위 ‘현대신학’의 희생물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유럽에 있
는 신학대학교에서는 최소한 10년 이상의 학문과 공부를 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 어학공부만 10년의 과정을 거칩니다. 우리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이렇게 공부
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교회를 망치고 맙니다. 사도 베드로가 경고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의 논리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
습니다. “어떻게 1세기의 복음이 고도로 과학과 학문이 발달한 21세기에도 그대로 똑
같이 적용이 될 수가 있느냐”는 논리입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가 살았던 1세기와 지
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엄청난 문화적인 차이, 학문과 지식의 차이, 사고방
식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도 다르고, 여행
을 하면서 타고 다니는 기구도 다르고, 입고 있는 옷도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
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1세기나 21세기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과거로 더 거슬
러 올라가서 아담과 하와가 안고 있던 문제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다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
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마귀의 지배
하에 종노릇하고 있는 문제가 우리 모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1세기나 21세기
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의 신분에 처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중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신다면 앞으로는 교회에 나오지 마십
시오. 또한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죄를 지은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
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한 종교를 만들어서 교주가 되십시오. 왜 이 시간에 힘들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교회는 의인이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겸손히 고백하는 사람만이 나
올 수 있는 장소가 교회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스스로 죄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어리
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
리가 안고 있는 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해결책은 바로 자신
의 죄를 철저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 주시
는 분은 오로지 십자가 위에서 고결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는 없다는 
진리를 믿고 그 분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혼의 구세주
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삶에 기쁨을 갖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부활의 산 소망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 영생이라고 하는 가장 값진 선물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는 이 나그네와도 같은 세상을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
게 됨을 믿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현대신학이 화려하고 좋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오직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은 현대신학이 아
무리 감언이설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현혹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넘어가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그 마음의 중심을 굳건히 세워 두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기있는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대다수
의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건대 대부분의 인기있는 것들
은 가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
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
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 시대에 살았던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 시대의 사람
들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
에서 매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멸하실 분명한 계획
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들
에게 큰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인 노아
의 가족들에게만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입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했을 때
에도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히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창세기 19장 14절을 보시면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
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아무리 롯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크게 외쳐도 사람들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까운 사위들도 
장인인 노아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그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롯과 사랑하는 두 딸밖에 없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에 다수결의 원칙이 절대적인 진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
늘 우리가 아무리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그 결정은 결코 진리
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다수의 사람들이 손을 든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가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라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많은 사람
들이 선호하고 좋아하고 따른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
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
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멸망의 길이요 낭떠러지요 영원한 지옥의 길로 들어설 뿐입니다. 
세상의 길은 마치 넓은 길이요 편하고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좁고도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중에서 세상의 넓
은 길을 걸어가시며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
까? 그렇다면, 저는 그분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 강력하게 경고하겠습니다. 예수님
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오직 지옥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형벌
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달콤하면서도 듣기에 좋은 감언이설만
을 외치는 거짓 선지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듣기에는 싫어도 여러분의 영혼
을 살릴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신실한 종이 되고 싶습니
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좁은 길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
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에 끝까지 걸어가시기 바랍니
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
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길이야말로 영생의 길이요 참으로 복된 길
임을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금 확실하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기관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꼭 진리라는 보장은 없습니
다. 
  교회의 간판을 걸었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
침이라고 해서 모든 가르침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속한 교단이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네, 물론 우리 교회
는 침례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교회는 ‘기독
교 한국침례회’에 속한 교회입니다. 침례교회의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그 교회가 정
통 침례교단에 속한 교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단들 중에서도 침례교회의 간판을 
악용하는 기관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교 침례회’와 ‘복음 침
례회’는 우리 정통 침례교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단들입니다. 사도행전 20
장 29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서 에베소 교회에 속한 장로들
을 모아놓고서 다음과 같이 고별설교를 하였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심지어는 교인들 중에서도 장로들 중
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의 제자가 되어서 악한 말과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어리석
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오류가 없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때로는 오류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의 원수노릇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나온 역사가 이같은 사실을 얼마든지 증명합니
다.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습니까! 교회라는 이
름을 걸고서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성경을 남몰래 읽
고서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그 당시의 교회가 얼마
나 많은 핍박을 했습니까! 심지어는 교회가 사단의 종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
의 길로 인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
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그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신봉할 수는 없습니
다. 또한 큰 교단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 교훈이 반드시 진리라고 믿어서도 안 됩니
다. 그 교훈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오로지 성경
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성경만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임을 늘 깨
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더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에 입각해서 생각했을 때에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깨끗이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급적 제목설교를 지양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제목설교를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개인적인 생각을 얼마든지 이야기 할 수가 있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는 강해설교가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강해설교란 어
디까지나 철저하게 성경의 본문을 연구하고 쉽게 풀어주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
서 저는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는 가능하면 강해설교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
다. 제가 알고 있는 설교학을 가르치는 어떤 교수님은 제목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5분
내로 회개하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목설교에는 
인간의 사상이 필연적으로 많이 들어가게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
상천외한 말을 하면 탁월한 언변으로 능수능란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들었을 때에 성경과 어긋나는 논리를 펼칠 때에는 믿지 마십시오. 아무리 신
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떠벌리고 있다면 그 말은 진리가 아
닙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만 귀
를 기울이시고 그 가르침과 교훈에 늘 겸손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3. 거짓선지자들의 두드러진 특징
  첫째,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
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거짓선지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를 가르칩니다. 탐심이 동기가 되어서 거짓선지자들은 사람들을 지은 말로 이용해 먹
습니다. 따라서 그 말속에는 하나님의 인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선지자들이 사
사로이 지어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인간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 하나님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은 허황된 속임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너
무나 잘 알고 있는 진화론과 종교 다원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는 진
화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이 세상의 모
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하는 종교 다원주의의 간사한 속임수에 지금
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혹되어 영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같은 
이야기들은 한낱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진리의 말씀
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할 때에 역사에서 쓰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어떠한 자료가 있으면 절대로 그냥 믿지를 않습니다. 이 자료가 진짜인
지, 가짜인지 아니면 위조품인지를 철저하게 검사하고 조사를 실시합니다. 그래서 자
료가 진짜라고 판별되면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진품으로 인정을 합니다. 이것을 가리
켜서 소위 ‘역사비평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잣대인 이 ‘역사비평학’을 가지고 성경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
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고등비평’이라고 합니다. 이 ‘고등비평’을 신봉하
는 학자들은 대부분 성경의 권위성을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을 가지고 교회에다가 적용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심리적
인 기술과 방법을 통한 안정감을 강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교회안에 발생하게 되
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심리학이 만들어 낸 못된 장난에 교회의 성도들이 
현혹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올바른 현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을 주
장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심리가 불안정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
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방법과 이야기들로 거짓선지자들은 자신들의 탐
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부르심도 없다는 진리
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거짓선지자들에게는 참된 메시지가 없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공통적으로 사
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고 듣기 좋은 말들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
면 순간적으로는 유익하고 좋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에는 인간
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
에 대해서 그들은 어떠한 언급도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습니다. 결코 인간
의 죄에 대한 회개를 거짓선지자들은 외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 대한 신
랄한 비판이 가해짐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복음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회하
며 자백하게 역사합니다.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의 문제와 그 죄의 습성에 젖어
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무섭고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
여서 하나님의 참된 복음의 말씀은 듣는 사람마다 철저하게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킵니
다.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죄는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없고, 가정이 불화하고, 사업이 힘들고,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죄의 문제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철저히 회개하
고 돌아서지 않는 한 죄의 사슬은 여전히 우리의 심령을 옭아매고 쪼여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하시고 과감히 돌
아서시기 바랍니다. 그런 위대한 믿음의 결단을 내린 분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위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부인합니다. 그렇다면 왜 거짓선지자들에
게는 참된 메시지가 없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절의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
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이 말씀은 성경의 여러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에 하나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갖고서 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아하, 우리 
예수님께서는 거짓선지자들도 자신의 피값으로 사셨구나! 그런데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멸망의 길로 얼마든지 떨어질 수가 있구
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1
절의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라는 부분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원어인 헬라어 본문을 보면, 여기에 사용된 ‘주’는 우리가 믿고 있
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예수님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퀴리오스’
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데스포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
는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또한 “자기들을 사셨다”라는 의미
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명기 32장 6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면서 애굽을 탈출하
는 과정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
대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사신 백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오
늘 본문의 1절에 관한 정확한 해석은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인 자기들
을 애굽에서 사셨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부정하는 죄를 범한
다.” 이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거짓된 주장들을 펼칩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지 않았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옥의 형벌에 
던지지 않습니다.” 등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들을 부인하였습니
다. 따라서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참된 메시지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 거짓선지자들의 삶은 거짓되고 부패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령하고 은사가 많은 사람인줄 알고 있었는데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육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고 있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
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삶의 모습입
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가르침도 거짓입니다. 더 이상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진정한 기독교의 교리는 결코 삶의 모습과 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도 거짓선지자들의 거짓되고 부패한 삶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장을 통해
서 거짓선지자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9절에서는 “불의한 자”, 10절에서는 “육체
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 14절에서는 “음심이 가득한 눈
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성경의 구절들이 거짓선지자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삶을 상세
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 현대 교회들은 거짓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서 크게 잠식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유럽의 교회들입니다. 자유주의 신학, 해방신학, 흑
인 신학, 신신학, 사신신학 등과 같은 거짓선지자들의 엉터리 가르침과 거짓 교훈에 
속아 넘어가서 수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세상으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의 교회에도 이러한 영향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대다수의 목회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강단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신학계에는 대단히 치
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종 고등비평, 종교 다원주의, 현대신학, 심리학, 
정치학 등의 서구의 병폐를 가지고 계속해서 기독교내에 침투해 오고 있습니다. 그 결
과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정치적인 해방자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
서 오늘날의 교회도 정치적인 해방을 위해서 이 부패한 사회구조에 맞서서 데모를 하
고 투쟁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해방신학’, ‘민중신학’
입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배고픈 백성들이 민중이고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누르
는 자들은 전부 다 탄압자들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해방신학’ 과 ‘민중신
학’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이 사회의 부당함에 맞서서 데모를 하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현대신학의 주장들은 모두 다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지나
지 않습니다. 그런 사상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허락하신 근거가 조금도 존재하
지 않습니다.
  또한 여성신학은 여자는 핍박을 받는 가련한 존재요 남자는 여자를 탄압하고 핍박하
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이란 불쌍한 여자가 완악한 남자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더군다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남성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여성으로 표현하자고 주장을 합니다. 흑인신학도 이와 마찬가지입
니다.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들은 핍박자요 검은 비부를 가진 흑인들은 탄압을 받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란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이요, 고로 
진정한 구원이란 흑인이 압제받는 백인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해방신학들이 오늘날의 유럽의 교회를 잠식해 버렸고 서서히 한국의 교회
에도 침투해 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연약한 육신을 위해
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가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옳지 않은 설교나 
학설이나 이야기들은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영혼을 풍성하게 살찌
우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진리의 교훈에만 귀 기울이시기 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
에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을 갖고서 진리의 말씀만을 좇
아가시는 귀한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두뇌에는 우뇌와 좌뇌가 있습니다. 우뇌는 지성을 담당하고 좌뇌는 감
성을 조절합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에도 오른쪽으로 서면 지성적으로 약간 차
갑게 보여지고 왼쪽으로 서게 되면 감성적으로 조금 따뜻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
서 사진을 찍을 경우에는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서면 따뜻한 인상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찍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
혜로 구원을 받고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헌신하며 열성적으
로 봉사하는 삶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너무 감성적으로 뜨겁게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냉정한 지성을 갖고
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
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뜨거운 감성의 은혜와 냉철한 지성의 은혜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에 오직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을 따라가시면서 복된 믿음
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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