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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고자 하는 자 /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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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자 하는 자

                       
                        이사야 53:11, 마태복음 20:20~28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email protected])

지난 주 설교는 "관용부재중"이라는 제목으로 관용의 태도와 그 정신을 서로간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갈등구조현상으로 말씀드렸다면 오늘의 설교는 사람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그 마음 상태와 태도에 따라 동기가 부여되고 그 동기에 따라 삶의 의미가 나타나기에 의미있는 삶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한다.

인간의 행위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동기 여하에 따라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부심이 강하거나 이타주의적이며 자기 희생적일 수 있다. 충분한 동기가 주어지지 않고서는 인간은 아무리 명석하고 현명하다 해도 소홀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친구를 능가해야 되겠다는 열정과 강렬한 동기가 부여되기만 한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근면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스스로 추진할 줄 아는 지도력을 만드는 요소는 동기이다. 동기는 근본적으로 욕망에 뿌리하고 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이나 재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보상이나 명예를 위해 경쟁하고 싶은 욕망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도록 그에게 박차를 가할 것이다. 발명에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험을 하도록 또는 고난을 견디어 내도록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주저 없이 어려움과 대결할 용기를 주게 된다. 인간이 욕망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다.

가치는 바람직한 것과 부족한 것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물건이 부족하면 부족할 수록 그 물건에 대한 욕망은 더 커진다. 바람직함이 크면 클수록 그 가치는 더 커 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가 원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때에는 그 가치는 감소하는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만큼 가치는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람이 욕망을 갖고 있는 것만큼 많은 동기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제자들은 자기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다툼을 한다. 마치 임종하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유산을 다투는 아들들의 모습과도같이 비정한 엇갈림의 장면이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다.

세베대의 아들 곧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로서 그녀는 두 아들과 함께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청탁을 한다. 더욱이 살로메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자매로 추정되어지는 예수의 친척으로 청탁의 좋은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이유로 청탁을 구한다. 살로메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서는 깨닫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결정된다. 이것은 곧 동기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구하는 "크고자 하는 자"는 예수의 좌상이나 우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지실 주를 따라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한 희생에서만이 얻어 질 것이다. 세상에는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의미와 섬김의 도를 가르쳐 준다.

오늘날에는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와 종교에서도 명예와 권세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으니 언어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섬김과 인정을 받는 것만이 자신의 지위와 신앙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유지되는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예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판단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는데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인으로 삼은 우리들은 존경받고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이 세대 가운데서 그분의 모범을 따라 모든 이들을 섬기며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갖게 된다.

본문의 헬라어 동사 "섬기다"란 의미를 지닌 "디아코네오"나 "종"을 뜻하는 "디아코노스"는 이사야 53;11에 나오는 히브리어 "에베드"와 개념적인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기 목숨을.......주려 함이니라"는 구절은 이사야 53;10. 12,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대속물"을 뜻하는 헬라어 "뤼트론"은 히브리어 "아샴" 즉 속건 제물에 해당되는 단어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으로 명백히 나타내셨으며 또한 자기의 죽음을 이사야서에 비추어 해석 하셨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지도자로 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믿음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교회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의 은혜를 인하여 전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모아서 드려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목적과 영광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재능 돈을 드리는데 인색함이 없어야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요 자기의 생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온전히 헌신한다는 것은 섬김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을 가르쳐 줄 때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크고자 하는 사람은 욕심과 명예와 탐심과 사심을 버려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그의 은혜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크고자 하는 자는 지도자의 자질을 생각해야 한다. 지도자는 자기 희생 정신과 자기 목숨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희생 정신을 소유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의 시간, 돈, 힘, 지식 또는 생명까지도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정의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기의 봉사 정신이 특색을 이룬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 질 것이다", "누구라도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라도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경고한 말이 생각난다. "이기적인 야망이나 헛된 자만으로 하지말고 겸손함으로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생각하라"고 한 것이다.

희생이란 말의 가까운 뜻을 가진 동의어는 봉사(Service)이다. 라틴어 Servire란 말로 "Serve"란 말은 Deserve(상을 받을 만한 가치), Sergeant(하사관), Servant(종복 봉사자)의 뜻과 상응한다. 만일에 한 지도자가 이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만심이 강한 자신의 욕망만을 달성하기 위해 급급한 자라면 그 지도자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희생 정신이 있으며 어려운 고난이나 유혹에 직면해도 그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솔로몬'과 같이 현명하고 '올테가이 가셋'처럼 스스로를 제어 할 수 있고 '데이비드 리즈맨'과 같이 주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아놀드 토인비'같이 창조적인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삶의 자세가 있음을 안다. 하나는 본을 보여 주는 삶이 있고, 또 하나는 본을 받고 사는 삶이 있다. 선한 일에 섬김을 갖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며 선한 일을 본 받으며 사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오직 예수만이 본을 보이며 사신 분이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본 받고 사는 사람이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이 삶의 현장에서 크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하는 문제를 오늘의 성서 말씀에서 찾아본다. 먼저 겸손하게 봉사와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크고자 하는 자"의 마음과 삶의 자세이다. 겸손은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항상 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평가에서 자신을 높은 자리에 두려고 할 때에는 교만과 권위와 이기심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은혜란 항상 자신을 작게 보는 데서 나온다. 내가 자격이 있고 또는 공로가 있어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는 사는 것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데서 봉사로 이어져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께 겸손하여 사명을 갖고 봉사하므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작아지고 또 내 것은 적어지고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으로 드릴 것밖에 없어진다. 은혜를 깨닫게 되면 일생이 빚진 자가 되고 만다.

이것이 "크고자 하는 자"의 본연의 자세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본다. 바울은 자랑할 것도 없고 일생을 다 바쳐도 갚을 수 없는 빚진 자 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종이 되어 이제부터는 자기 일이 없고 자기의 것이 없고 성공도 영광도 자기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크고자 하는 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감옥에 갇혀서도 매 맞고 굶고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늘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를 섬김의 자리로 옮기는 것임을 "아멘"으로 깨닫고 삶으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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