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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영을 부어 주소서 / 겔 36: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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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을 부어 주소서 
겔36:22-28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지역(가나안), 그리고 그 안에서 사는 민족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저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데, 저들은 대단히 중요한 성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모르면 역사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도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가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땅, 민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a.창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 아브라함 한 사람,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형성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지요.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이루어질 한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며, 또한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참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b.저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 또한 지구촌 귀퉁이의 아주 작은 땅에 불과하지만, 그 땅은 보통의 땅이 아닙니다.

창12:1- 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리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의 가치를 가리켜 여러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약속의 땅(히11:9), 거룩한 땅(슥2:12), 여호와의 땅(호9:3), 성소(출15:17),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신1:10-)...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살짝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 거룩하게 구별된 땅입니다. 이 땅 주인은 이스라엘입니다. 누구도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내 놓으라고 하면 두 말없이 내 놓아야 합니다. 시105:8-를 보면 이 땅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소유인 것을 실감 있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러니까 이 땅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대에 명하신 하나님의 영영한 언약입니다. 누구도 거스리거나 부정할 수 없습니다.

c.민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17: 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할 것이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놀라운 축복입니다. 자손 대대로 축복하시고, 너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고로 이런 복을 누린 민족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누리는 선택된 권리요, 선택된 축복입니다.



그런데 실상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어보면 그렇게 말씀대로만, 그렇게 복되고 형통한 역사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숱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상처나고, 하여간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런 배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정세는 오늘날과 같이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초강대국인 앗수르, 바벨론, 애굽 이 세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들 사이에 끼어서 엄청난 피해를 보는 약소국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력 정도로 저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애당초,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을 빌어쓴다면 새발의 피입니다. 바람 앞에 촛불 정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전 580년경에 바벨론에 나라는 함락당하고 많은 젊은이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에스겔은 바로 이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잡혀간 지 5년이 되던 어느 날, 그발 강가에서 자기의 조국의 신세를 생각하며 한 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민족이 아닙니까? 이 민족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고 엄청나게 축복을 하셨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땅, 이 나라,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녕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어찌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산산조각 나야만 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온 신세가 되고 만 것이며, 힘없는 여인들은 강간당하고... 소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 겁니다. 이 민족이 보통 민족입니까? 이 나라가 보통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가나안, 예루살렘, 이게 어디 보통의 땅입니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똑똑하고 촉망 받는 젊은이들은 포로로 잡혀 가고, 부녀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이 꼴이 이게 뭡니까? 이렇게 깊은 회의와 상처를 안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하는 에스겔을 향하여 소망과 위로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a.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너희 조국이 이렇게 징계를 받고 있는 것이다.

b.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쳤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다시 저들을 쳐서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겔25:-35).

c.이런 내용이지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를 빼앗기면서 이렇게 어두움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때가 되면 회복하여 나라를 되찾고, 다시 고국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겼지만 다시 나라를 되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고국에 돌아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 되심과 거룩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만 얻으려고 합니다.

1)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결코 이스라엘은 이것으로 영영히 망하질 않습니다. 왜냐면 서두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약속이 있는 나라요, 약속이 있는 땅이요, 약속이 있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영광과 거룩하심을 다시 회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개치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이요 진리입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 각처에 흩어져 유리하는 고아와 같은 불행한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와 민족은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책의 한 구석에 한  두 줄 정도 소개되는 정도밖에는 더 이상 저들의 가치는 먼 옛날의 이야기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것입니다.(1948). 보란 듯이 세계에 독립을 선포하고 다시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계사의 중앙에 우뚝 서게 되었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때로는 범죄할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과연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나! 정말이지 내가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나!」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책망을 받을 때도 혹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을 통해서, 때로는 가지고 있던 물질을 다 빼앗아 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탄탄대로 승승장구하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고... 어째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렇게 수치스런 어둠의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럴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이렇게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저들을 깨우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인 것입니다. 우리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너는 내 것이라고 인치시고,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사랑, 이 구원, 이 축복, 이것은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24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너로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로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라.」무슨 얘기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이 고난을 통하여 이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와 정결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시련, 환난을 통하여 우리의 그동안의 잘못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정결케 되는 은총을 힘입는 회복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련 > 그리스도 예수 재림하시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뵙게 될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욥5:17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도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오직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래요. 성도님들!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혹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또 언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이 곧 나의 상황과 똑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큰 낙심 가운데 있는 분 계십니까? 나를 깨닫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더 큰 일꾼으로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결함을 회복하지 아니하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오늘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그렇습니다. 정결한 것이 중요합니다.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되 정결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형성되고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아들의 자격을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지난 날에 입었던 죄의 옷, 부정한 옷, 불순종하고 음란하고 타락한 옷 등등, 이런 옷을 벗어 버리고 아버지가 입혀 주신 아들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아직도 더러워진 죄악의 쓴 뿌리가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정결케 되며,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생각, 더러운 행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더러운 모든 습관들, 이것들 청산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는 지난 날의 낡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리고, 「이전 것을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로워져야 합니다.

2)그리고 오늘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새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준다.」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정결케 되었다면 이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간섭을 받고, 성령과 함께 동행 해야 합니다. 왜냐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힘을 얻지 못한다면 또 다시 나는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심하고 다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그렇게 끊으려 애를 써도 실패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30년 이상을 피운 담배를 한 순간에 끊으려 하니 그게 어디 쉽습니까?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습니다. 몸에 붙이는 파스를 붙여 보기도 하고... 하여간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번 더 끊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하루, 이틀 안 피웠는데,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너무도 쉽게 끊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억지로, 의지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할려고 할 때에는 안 되었습니다.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쉽게 끊어졌습니다. 성령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 있잖아요. 놀음 안 한다고 큰 결심을 하고 손을 잘랐는데, 그렇게 큰 결심을 했는데, 그런데 말이지요. 어느새 몸이 놀음판에 와 있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손을 잘라서 못할 줄 알았는데 발로 하더라는 겁니다. 결심 갖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도우시고 힘을 주셔야 합니다. 사단, 마귀의 유혹, 저들의 역사를 이론으로 지식으로 결심으로 물리칠 수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께 돌아온 자기 백성에게 새 영을 너희 속에 부어 주며, 새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예수님의 승천하신 이후의 기독교 역사를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사단, 마귀, 귀신의 역사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서당게 삼 년이면 풍월을 읽는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능력이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지난 날에 그렇게도 힘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쉽게 지켜집니다. 피곤하고 지쳤습니까? 내 방법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하심을 간구하십시오. 성령이 임하시면 은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열매가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진리 가운데 거하며 기쁨, 평안,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회복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은 거룩케 하는 영이시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는 수양과 참선을 이야기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면서 득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 사실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거룩해 진다거나 온전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인정하자 구요. 내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인정하자 구요. 나라고 하는 존재, 별것 아닙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 있었는데, 음성 꽃 동네 오모 신부의 후원금 횡령 사건. - 평소에 그는 국민적으로 존경을 받던 분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존경받는 성직자들의 탈선, 생각보다 상당히 많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왜, 존경 받는 성직자들에게서까지 이런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고,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안겨 주는 것입니까? 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까? 양심의 가책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유혹을 뿌리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목사도 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자연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죄의 유혹의 허허벌판에 서 있는 우리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몰라서도 아니요, 결심이 부족해서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입니까?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힘을 주시고 나를 붙드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내가 나를 지켜낼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부인하지 않을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의지, 결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도 호언장담한 지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입니다. 총칼 앞에서 부인한 것입니까? 일개게집아이 앞에서 부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결심, 의지는 초라한 것입니다. 별 것 아닙니다.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승리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관건은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다시 회복케 하실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약속합니다. 「내가 새 영을 너희에게 부어줄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굳은 마음이 제하여 지고 부드러운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내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거뜬히 지키게 될 것이다. 지난 날의 너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른 변화된 새 사람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성령의 매력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포로로 잡혀 가던 지난 날과 다시 회복케 되어 고토에 돌아간 이 다음의 삶의 큰 변화, 큰 차이는 「하나님의 새 영이 너희에게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지난 날에는 내 욕심, 내 자아, 내 교만, 내 잘난 맛에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삽니다. 내 자아를 성령의 감동에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멋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들, 이제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도 바울은 롬8:12-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갈6:8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의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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