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단계 (요 1:35-42)

  • 잡초 잡초
  • 414
  • 0

첨부 1




 
신앙의 단계 (요 1:35-42)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는 과정에는 대개 네 단계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단계가 남에게 듣는 단계이다.

즉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개받는 단계이다. 흔히 어려서는 부모에게, 성장해서는 교회학교 교사나 친구에게 혹은 교역자에게서 예수에 관한 말씀을 듣는다. 성경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우리의 삶에서 듣는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듣는 말씀에 의해 우리 인격이 형성된다. 우리 인간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존재인데 어려서는 부모의 말을 들으며 성장하고 좀 커서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적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무엇을 듣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만 들으며 자랄 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인격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어려서 좋은 이야기, 감동적이고 훌륭하게 살아간 위인들의 이야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은 얼마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줄 때 한 평생 그 이야기가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별히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가장 값진 복음을 들려주는 것이 된다.

많은 불신자들이 자기 친지 중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를 소개받는다. 이런 일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다. 기회가 있는대로 그리스도에 관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간증 또는 가르침을 힘써 듣는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남에게 들어서 아는 예수는 ① 부분적이고 ② 피상적이며 ③ 주관적이기 쉽다.

예를 들어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의사로, 산상보훈을 들은 이들은 예수를 위대한 선생으로, 이적을 본 사람은 예수를 신기한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소개하기 쉬운 것이다. 마치 장님 코끼리 이해하는 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 자기 지식이 자기세계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안에 갇혀 살아간다. 그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둘째 단계는 예수께 직접 듣는 단계이다.

예수님에 관해서 우리가 남에게 듣는 일도 귀하지만 예수님 자신에게서 직접 듣는 것이 더욱 귀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야(encounter) 한다. 우리가 그에게 직접 듣는 방법으로써 주님 당시에는 그를 대면함으로 가능했지만 오늘날은 특별한 경험과 성경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사무엘이나 이사야처럼 특별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특별한 체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자주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지나치게 이러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자칫하면 우리의 신앙을 탈선케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함부로 바랄 것은 못된다.

다음으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 직접 듣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가장 안전하고 누구나 가능한 보편적인 방법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성경을 읽노라면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게 된다. 남의 설교나 간증을 들으러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는 열심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매일매일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한가한 때뿐 아니고 바쁠수록 읽어야 한다. 평안하고 안일한 때뿐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시험이 부닥칠 때일수록 더 열심히 읽고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제 2 단계를 거친 사람은 이제 제 3 단계로 전진하게 된다.


셋째 단계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함께 생활하는 단계이다.

주님께 직접 듣는 시간을 갖노라면 자연히 자기편에서도 그분에게 말하고 싶어지며, 그렇게 하노라면 대화가 이뤄지며 그것은 깊은 영적 교제를 갖다준다. 예를 들어 내가 갑이라는 선생을 남에게 소개받고 대강 그를 알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고 어느 기회에 그의 강의나 발표를 나도 청중 속에 끼어 앉아서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를 더 잘 알게 된다. 그러나 그와 직접 생활해 보고 교제를 가짐으로 우리는 그를 더욱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신앙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며, 이 교제(코이노니아)는 사심없는 허심탄회한 대화로써 더욱 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과 생활하고 교제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그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말 '야다'는 '동침'이란 뜻을 담고 있다. 마치 부부가 동거동락하므로 서로를 잘 알듯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아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알고 교제하는 단계에 머물러만 있어도 안 된다. 다시 더 높은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예수를 말하고 전하는 단계로써 곧 증거하는 단계이다.


넷째 단계는 증거하는 단계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예수를 소개받는 제 1 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친 사람은 직접 예수님께 듣는 제 2 단계로 진입하게 되고 다시 이 제 2 단계를 잘 거친 사람들은 그와 직접 사귀고자 하는 제 3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귐을 통해 그를 체험한 사람은 자연히 그를 이제는 남에게 자기 자신이 소개하게 되는 제 4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가장 잘 알게 되는 것이고 또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안드레는 이 네 개의 단계를 차례로 거쳤다. 그는 처음에 세례요한에게서 예수께 대한 소개 말씀을 듣는다. 듣고 보니 예수를 따르고 싶어진다. 가까이 따르면서 이번에는 예수께 직접 듣는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예수와의 대화의 계단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는 빛을 찾았다. 메시아를 만난 것이다. 감격과 기쁨이 가슴에 벅차 오른다. 대수롭지 않은 것을 본 사람처럼 시무룩하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예수를 남에게 말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쳤다. 그래서 그는 우선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로 안도해 왔다. 안드레의 말을 듣고 예수께 나온 베드로도 역시 같은 단계를 거쳐 위대한 대 전도자가 된다.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께 대한 말씀을 남에게서 많이 들었다. 그러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오히려 그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옥에 가두며 죽이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후일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 직접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듣고 '뉘오니까?' 물었을 때 주님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듣고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그리고 예수를 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그후 아라비아광야에서 3년간 주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영교를 체험했다. 그 다음 바울은 자기 자신이 직접 예수를 남에게 말하고 전하기 시작했다. 보다 더 멀리 가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려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내가 로마도 보리라'고 선교적 비전을 말했다.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로마에 가서 예수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로부터 사도와 모든 성도들이 걸어온 과정이요 오늘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밟아야 할 과정이요 단계이다. 그럼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서 있는가?

부흥회는 다 쫓아다니며 남에게 듣기는 많이 하지만 자신이 직접 주님께 듣는 일이 없는 교인들이 많다. 우리는 밤낮 남에게 듣기만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주님께 직접 듣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눅 10:39).
주님께 신비한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산중에 도사리고 앉아서 명상에만 잠겨 있는 만년수도사도 있다. 그리고 무슨 영험을 하고 신비한 계시를 받았노라고 내세우며 신앙의 교만만 생겨 가지고 교회를 오히려 어지럽히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주께 진정 들었다면 그리고 주께 진정 받았다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제 뛰어 나아가 예수를 내가 증거해야 한다.

정지는 곧 후퇴이다. 한 계단에서 또 다른 계단으로의 부단한 전진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하며 성장해야 한다. 정지하면 넘어진다. 부동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과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자만도 또한 탈선하고 자멸로 빠져들기 쉬운 위험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했다. 세상에 누가 가장 미숙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아는가? 나는 다 배웠다고 생각하며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발전하고 성장하지 못한다. 어거스틴도 '완전한 순례자는 아직 완전한 수도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부단히 앞을 향해 쫓아가는 전진의 신앙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느 계단에 서 있는가? 내가 베드로는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베드로를 주께 인도한 안드레는 되어야겠다. 우리가 무디는 될 수 없을지라도 무디를 주께 인도한 킴보리는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찬송가 263장 작사자의 말처럼 '멀리 가서 이방 사람 구원하지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천사같이 말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예수께서 구속함을 힘을 다해 전하세.' 우리가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도 아직 복음을 전할 대상이 많다. 사도행전 4장 18절 이하에 보면 백성들의 관원들이 초대 크리스천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계하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저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도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되게 충동하고 역사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한다고 표현했다.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의 삶을 발견했다면 이 영생의 진리를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다. 이웃에게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내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 기쁨에 넘치는 천국에의 보화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이웃에게 증거해야 하는 문제를 잘 설명해 준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웃을 사랑으로 만나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사랑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행하는데 의의가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러한 실천적인 사랑이란 적어도 다음 몇 가지 행동을 수반한다고 하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3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 번 같이 읽겠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했다. 참된 사랑은 먼저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 즉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데 있다.

영어 성경에는 "A certain Samaritan who was on a journey, came upon him, and bandaged up his wounds"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다. 영어성경에는 Passed by on the other side, 즉 다른 쪽으로 지나갔다고 했다. 말하자면 거리를 두고 외면하며 지나간 것을 말한다. 아마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겨야 하는데 시체를 보고나 만지면 부정해져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종교와 신앙을 빙자해서 피해 지나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늘 날도 신앙과 교리를 구실로 상처받고 죽어가는 영혼을 적극적으로 구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이웃을 만나지만 피하여 거리를 두고 외면하고 지나감으로 증거의 기회를 놓치거나 헛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직접 만나서 악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기는 하지만 거리를 두고 인사를 하고 거리를 두고 기도를 하며, 거리를 두고 찬송을 부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즉 나와 상대방 사이에 간격이 있다. 거리가 있다. 38선이 있다. 그러기에 거기에 진정한 증거의 사건은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거리감 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흔히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 교회에 나오라고 말한다. 우리 부흥회에 오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에 얼마나 나오는가? 대부분은 안 나온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가정으로 찾아가고 병원으로 찾아가고 학교로 찾아가고 회사로 찾아가야 하며 공장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감옥에도 찾아가야 한다. 가되 거리감 없이 찾아가야 한다.

김대두라는 수십 명을 살인한 살인수가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를 찾아간 몇 전도자에 의해서 회개의 열매가 맺어졌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칫하면 믿는 몇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불신사회에 대해서는 담을 쌓고 살아가기가 쉽다. 즉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아량을 갖지 뭇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들고 사랑으로 그들을 찾아가 만남으로 거기 복음의 결실이 맺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먼저 믿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때가 많다. 그러면 다른 지역에서 교회 생활하다가 새로운 분들이나 처음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온 분들이 설자리가 없다.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계속 성장하려면 안 믿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소외감이나 이질감이 느끼지 아니하도록 그들 중심의 교회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형제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지사이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찾아가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이다. 성경에 보면 '그가 거기 이르러' '가까이 가서'라고 했다. 참 사랑은 가서 만날 뿐 아니라 그들이 처하여 있는 형편을 분명히 보는 것이다.
33절에 보면 '그를 보고'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말할 때 혹 어떤 분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그를 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그를 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기는 보았지만 그를 분명히 보지는 못했다. 그의 상처 그의 흘린 피 그의 비참 등 겉모양은 보았지만 그들은 그 속에 있는 그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그 속에 있는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보았더라면 그곳을 도저히 그냥 지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속에 있는 사람 곧 그의 인격을 본 것이다. 흔히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재산을 보기 쉽다. 그 사람의 지위를 보기 쉽다. 명예를 보기 쉽다. 그 사람의 겉을 보기 쉽다. 그 사람의 학식이나 그 사람의 옷이나 그 사람의 연령이나 그 사람의 인종이나 그 사람의 인물만을 보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보는 관점이다. 믿는 우리는 특별히 전도자는 그 사람의 외모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아야 한다. 그 속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심령을, 그 사람의 인격을, 그 사람의 영혼을 보아야 한다.

주님처럼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말고 그 중심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미래를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꿈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과거의 허물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 속에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보고 spiritual giant(영적 위인)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 그의 현재의 불의나 부정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의 장래의 제자로서의 헌신을 본 것이다. 박해자 사울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악함과 잔인성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의 위대한 전도를 본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그 불한당 만난 나그네의 그 속 중심을 본 것이다. 그때 거기에 증거의 사건을 일어났다.

참사랑은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같이 느끼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 10장 33절에 보면 사마리아인은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다. 영어로는 "He had compassion"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상대방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의 어려운 입장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입장을 바꾸어 보는 행위이다.
우리가 그를 찾아가고 그를 분명히 보기는 하지만 이 입장을 바꾸어 보는 Compassion이 없으므로 증거의 사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전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생활이나 사회 공동생활에서도 많은 불행이 많은 불상사가 이 'compassion' 서로 입장을 바꾸어 보는 삶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생겨난다(돕슨의 부부갈등).

우리 모두! 자녀는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는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에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니 시부모를 내 부모로 며느리를 내 딸로 사위를 내 자식으로 생각해 보자.
그러면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분이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누가 갑자기 자기 앞으로 끼어 들어서 옆으로 쫓아가 욕을 하려고 쳐다보았더니 자기 친구 형이었더라고 한다. 그래서 욕을 하려던 말을 바꾸어 '하이' 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기 앞에 갑자기 끼어든 분이 자기 부모요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애교로 받아주게 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자.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이 있을 때 거기에 위대한 증거의 사건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도와주며 해결해 주는 행동을 말한다. 사마리아인은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치료하고 간호해 주었으며, 다시 자기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봐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노라고 말했다. 영어 성경에는 "Bound up his wounds, and took care of him"이라고 표현했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읊었다.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병이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과 절망과 좌절의 유일한 치료제는
사랑이다.
세상에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러분! 작은 사랑이 죽어 가는 한 생명을 살리고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힌다. 참사랑은 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그 상처를 싸매어 주고 치유해 주는 행동의 봉사가 언제나 뒤따르는 것이다. 그를 찾아가고 그를 분명히 보고 그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며 그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며 채워주는 사랑의 손길이 있는 곳에 복음은 씨뿌려지고 싹트며 자라고 열매맺는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 선교의 사명은 모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수행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이다. 교회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선교하고 전도하는 missionary church가 되어야지 제도화하면 쇠퇴하고 죽게된다. 그래서 계속 생명력이 넘치고 성장하는 교회들은 구도자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인 것을 알 수 있다. 전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전도할 때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생명력이 넘치고 생동하게 된다. 그렇지 못할 때 침체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말하면 좋아하고 전도나 봉사를 말하면 부담감을 느끼는데 사실은 그것은 잘 몰라서이다. 참으로 복 받는 비결은 내가 남을 위해 섬기고 나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축복해 주는 길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회의는 짧게 하고 기도는 오래 하고 성경은 많이 읽고 깊이 묵상하며, 토의는 간단히 하며, 전도와 선교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지난 11월부터 탈북자들을 잡아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는데 벌써 3,200여 명을 송환했고 지금도 1,500여 명을 체포 억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결사적으로 제 3 국으로 가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지난해 북한에서 믿는 신자들이 적어도 400여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많은 말씀을 드렸다. 다 잊어 버려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초대 크리스천의 믿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성전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