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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추구함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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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추구함
마가복음 10장 46-52절
<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

지난 목요일에 인천에 사는 한 엄마가 생활고를 비관해 자녀 3명과 함께 투신자살했습니다. 그날 아침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큰딸이 학교 수영장 현장 학습을 한다고 3800원을 달라고 했는데 주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많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날 오후 5시쯤 이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외출한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엄마! 지금 어디 가요?" 8살, 6살, 4살 아이들은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 엄마는 버스를 타고 고층 아파트가 있는 곳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15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이웃집 주민에게 7살 여자아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나 죽기 싫어!" 그러면 나와서 말렸어야 하는데 그냥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결국 이 엄마는 두 아이를 먼저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는 셋째 아이를 안고 투신했습니다. 이 엄마의 뒷주머니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살기 싫다. 죽고 싶다. 안면도에 묻어주세요"라는 내용의 유서와 현금 1만5천 원, 그리고 집 열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었으면 살 용기는 없었을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본인이 없어도 아이들은 하나님이 잘 키우십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 아이들을 못 키우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죄 없는 아이들을 죽입니까? 남편은 멀리 떠나 있고 본인은 3천만 원의 빚을 지고 너무 살기 힘드니까 순간적으로 죽음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이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가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자식이 망하는 길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사치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고 자식 잘되기를 진정 원하면 우리는 스타만 우러러보지 말고 어둔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요새는 스타를 '스스로 타락한 자'라고 말합니다. 스타를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타락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타를 좇아 군중심리로 몰려다니는 것보다 작고 비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끔 먹자골목에 가보면 유난히 손님이 없는 식당이 있습니다. 주인의 얼굴을 보면 삶의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식사 한끼를 맛있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의욕을 주기 위해서 한끼 맛있게 못할 것을 감수하고 사람 많은 곳을 피해서 그곳에 들어가 식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런 작은 정성도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나의 삶과 자녀의 삶과 내세의 삶에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식당을 찾을 때 손님이 적으면 맛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다 식당 나름이고, 주방장 나름입니다. 정자동에 있는 춘천닭갈비집이나 후미진 구석에 있는 버섯전골집, 불낙전골집은 손님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면 주인에게 힘을 주려고 그곳에 갈 때가 있는데, 갈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친절하고, 음식에 정성이 들어있고, 정갈하고, 맛도 있고, 조용해서 대화하기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에게 작은 힘을 보태줄 수 있어서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사람 많은 식당에 가서 정신없이 있다가 나오면 '먹은 음식'이 육신의 에너지로 변화되고 배설되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적한 식당에 가면 '먹은 음식'이 육신의 에너지도 되고, 영혼의 에너지도 되고, 장래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자를 살피는 마음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만원을 써서 식사를 했지만 한 곳에서는 배설물이 되고, 한 곳에서는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 되었으니 군중심리에 편승하는 것이 얼마나 경계해야 할 삶입니까?

어제 어떤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공무원으로 전국의 여러 곳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한번은 전북 고창에 근무할 때 그 근처에 OO교회라는 곳을 잠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보니까 네 명의 성도가 허름한 공간에서 예배 드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목사님 여동생, 그리고 갓난아기였습니다. 그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지갑 안에 있는 것을 다 드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 돈이 큰 교회에서는 모래처럼 흩날리는 돈이 되었겠지만 OO교회에서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돈이 되었으니 돈을 잘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우리가 그 작은 자에게 손을 내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작은 자를 생각하며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생각 속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작은 자의 상처와 아픔을 보고 같이 아파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처를 씻어주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베풀 때, 그 손길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 우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 삶의 변화시키는 기도 >

오늘 본문에는 수많은 여리고 군중으로부터 소외되어 그늘진 곳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삶이 변화된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불행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몇 가지 기도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1. 첫째,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47절 말씀을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 없으면 저는 정말 길이 없습니다.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힘이 있는 줄 알았는데 힘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도 없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고,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처럼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구나!"라고 여기시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은혜를 받는 분들을 보십시오. 벌써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일이 안 풀리면 "하나님! 제 탓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기도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기도 응답 이전에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겸손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다보면 기도목표에 대한 집념은 사라지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부모님 속을 썩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남편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는지 깨닫게 되고,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아내의 개인적인 삶을 배려하지 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물질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베푸는 삶에 인색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면 내가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하고, 내 생각이 변합니다.

기도 응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로 변화된 후에 주어지는 부수적인 선물입니다. 나를 변화시킨 기도가 곧 신비한 영적 파동을 일으키며 환경도 점차 변화시킵니다. 때로 환경을 변화시키지 못해도 나를 변화시킨 그 기도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도 극복하게 만듭니다.

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습니까?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영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이 문제에 빠져 죽습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기도가 없는 것이 문제이고, 특별히 나를 변화시킨 기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겸손한 심령으로 변화됩니다. 한참 기도하고 났더니 내가 느끼기에도 나 자신이 참 겸손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잘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가보면 다 겸손하고 자기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만 모여 있습니다. 하는 얘기들도 들어보면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겸손한 심령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2. 둘째, 끈질기게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을 부를 때 많은 사람들이 야단을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왜 소경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말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의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치유해 주셨습니다. 만약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주님 부르기를 포기했다면 그에게 가장 귀한 축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장벽이 있어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셨습니다(눅 18:1).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환경이 어려워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시간이 없어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 같아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쉽게 응답해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도할 수 있었고, 기도 중에 내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었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다." 기도 응답이 늦는 것에도 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쉽게 주어지는 축복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끈질기게 기도할 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소중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마 7:7)"라고 하셨습니다. 구할 때 응답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면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 끈질긴 기도의 대표적인 것이 매일 새벽기도입니다. 여러분! 매일 하루의 첫 시간을 끈질기게 하나님 앞에서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무엇보다 기쁘게 보시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3. 셋째, 간절하게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디매오는 목소리를 다해 주님을 불렀고, 마음을 다해 주님을 불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제지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애타게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 간절한 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바디매오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본문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바디매오는 흥분했습니다. 구걸한 동전을 모아두었던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무조건 내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향한 열망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침노하는 자는 얻느니라."(마 11:12) 저는 성격적으로 침략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공격적인 성격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지만 끊임없이 천국을 침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극적인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국어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향한 놀라운 열정(passion)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수난(passion)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수난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열정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열정(passion)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바디매오가 열정적으로 달려오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원하는 소원을 주님께 즉각 말씀드렸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소원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생을 보람있게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구하십시오. 큰 것도 구하십시오.

군림하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3자녀와 함께 투신한 엄마와 같은 구석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할 목적이라면 지위도 구하십시오. 떵떵거리며 과시하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한 뜻을 이루고 선교와 구제에 사용할 목적이라면 물질도 구하십시오. 신앙생활에서 그런 간절한 소원이 없다면 그 인생은 엄청난 것을 잃어버리는 인생이 됩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초대형 베스트셀러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존스라는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가니까 베드로가 천국 투어(tour)를 시켜주기 위해 천국 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안내로 천국 투어를 하는데 투어 중에 이상하게 생긴 빌딩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창고 같은데 창문은 없었고 문도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자고 하니까 베드로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안 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긴 했지만 존스는 궁금했습니다. "아니, 천국에도 비밀이 있나?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공식 투어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창고가 계속 궁금해서 베드로에게 다시 그 안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할 수 없이 그의 요청대로 창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거대한 빌딩에 칸칸이 선반마다 거대한 흰 박스가 빨간색 리본에 묶인 채로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스마다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존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제 것을 보아도 되나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좋지만 내가 자네라면 그냥 돌아갈 거야."

그러나 존스는 베드로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기 박스를 찾으려고 J라고 쓰여진 선반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존스는 정신없이 달려가 자기 박스를 찾고 그것을 끌러 보았습니다. 존스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소리가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존스의 흰 박스 안에는 그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원했던 모든 축복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창고를 찾는 사람마다 그 탄식소리를 들었기에 그곳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존스가 구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추구하는데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것을 간절히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얻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이 소중한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넷째, 헌신을 예비하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바디매오의 소원을 듣고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자 즉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52절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는 바로 주님께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은혜 받고 거기서 끝나면 은혜는 곧 타성이 되고, 나태가 되고, 영적 게으름이 되고,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예수님께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면 그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되고, 놀라운 만족감을 주며, 더 큰 은혜를 예비하는 초석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예수님은 극히 값진 진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예수님을 내 품에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고 예수님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입니다.

코메디의 황제 이주일이 죽기 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지만 내 속에는 웃음이 없었다." 하나님이 없으면 많은 것을 가져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 영적인 소경의 상태에서 깨어나는 삶 >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영적인 소경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저의 영적인 눈이 뜨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불러주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세상이 사랑으로 움직이고, 사람이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면 우리의 영혼은 더욱 새롭게 되고, 더욱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마하트마 간디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두 살 무렵에 동전을 훔쳤고, 열 다섯 살 무렵에 형의 팔찌에서 금붙이 한 조각을 훔쳤습니다. 그 뒤 그 일이 대한 죄책감이 계속 남아 있어서 어느 날, 자기의 죄를 아버지에게 자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웠습니다. 아버지의 매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로 아버지가 마음의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기도하고 용기를 내어 자백의 글을 썼습니다. 편지의 끝에는 자기에게 벌을 내려주시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 말아달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그 편지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그 글을 다 읽었습니다. 눈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셨습니다. 잠시 동안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그 종이를 찢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눈물과 종이를 찢은 행위에서 그는 아버지의 용서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간디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평생 그 아버지의 눈물 속에 담긴 사랑을 생각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연약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죄와 허물을 씻음 받게 될 것이고,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과 마음이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려주려고 애쓸수록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영적 소생의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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