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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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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염려하지 말라  본 문 마 6:25~34
설교자 박봉수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그래요!”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은 우리가 달라야 할 그 무엇인가를 자세히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마 5:48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따라서 온전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상보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해 지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염려’라는 문제에서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결론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걱정도 팔자!’라는 말처럼 염려 속에 파묻혀 인생을 살아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를 극복하여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염려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칫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끼니때면 “뭘 먹을까?”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다이어트를 하기 때문에 먹는 것도 신경써야하고, 당뇨나 건강 때문에 가려먹어야 하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식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고민을 염려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염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먹을까라는 물음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아직 이것저것 먹거리가 있는데 그 중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목숨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든 먹어야 살텐데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 이것이 바로 목숨을 위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란 무엇을 먹을까 선택을 하면서 마치 먹을 것이 없어서 목숨 걸고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고민하는 것을 말합니다. 염려란 목숨 걸 일이 아닌 것에 목숨 걸고 고민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란 도를 넘어선 고민을 말하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고민 때문에 더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는 고민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농사도 짓고, 돈도 벌고, 밥도 짓고, 음식도 만듭니다. 이렇게 먹을 것을 위해 몸부림치며 땀흘려 노력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조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새들도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 힘들여 날아갑니다. 때론 다른 새들과 경쟁하며 다투기도 합니다. 삼켜 소화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보조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먹이를 준비해 주셨고, 필요할 때 챙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시기 위한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만 새들은 하나님의 수고의 열매를 먹을 뿐입니다.

  염려란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땀흘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수고를 외면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수고를 대신하려고 애를 태우고 몸부림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능력도 없으면서 무엇인가 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소원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 소원과 바람을 이루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쓰고 몸부림칩니다. 이것을 염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품고 그 다음으로 자신의 소원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선 순위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간절한 소원 못지않게 자기의 소원이 점점 더 중요해 집니다. 그러다가 우선 순위가 역전이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염려란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소원보다 다른 소원을 앞세울 때 그 소원을 비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염려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로 ‘염려하다’라는 말은 ‘메림나오’ (merimnavw)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메리조(merivz)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메리조라는 동사의 뜻은 ‘나누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라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마음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고전 7:33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결혼하기 전에는 오직 주만 섬기던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염려입니다.

  우리가 세상 일에 고민이 지나쳐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세상 일로 나뉘이게 되는 것이 염려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세상 일을 처리하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하면서 하나님의 수고를 감사하면서 받을 수 없도록 마음이 나뉘게 되는 것이 염려입니다. 우리가 세상 일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바람으로 마음이 나뉘게 되는 것이 염려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란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나뉘게 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해 우선 순위를 정하고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첫째,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염려는 백해 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가 작아서 고민인 사람이 염려한다고 그 키가 자랄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염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염려의 한계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루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역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변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차분히 생각해 보면 염려할 필요가 없는데 어리석게 속아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염려는 습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열자(列子)라는 책에 보면 옛날 기(杞)나라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통에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이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면서 걱정하는 내용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이것이 염려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염려 걱정을 한다는 뜻으로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杞)나라는 기원전 12 세기 경에 지금의 하남성 지역에 있던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나라는 주(周)나라 입니다. 중국 땅이 하도 크니까 주나라 성왕은 땅을 친족이나 공신들에게 나눠주어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杞)나라는 그 중에서도 나라 잃은 유민들이 모여 살던 힘 없고 작은 나라였습니다. 늘 설움과 천대를 받았고, 어느 나라가 어떻게 공격해 오지는 않을까 늘 염려하고 불안에 떨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기나라 사람들은 염려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하나의 습관입니다. 늘 염려하던 사람들이 염려합니다. 염려가 습관이 되다보니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가져다가 염려하게 됩니다. 염려가 하나의 생활이 됩니다. 우리는 염려가 습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 이미 내게 염려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또 하나 염려는 불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된 팝송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보비 맥페린(Bobby McFerrin)이 부른 [Don't Worry Be Happy]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Don't worry, be happy.

  In every life we have some trouble, but when you worry you make it double.

  Don't worry, be happy.

  염려하지 마세요 행복하게 사세요

  누구나 힘겨운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배가 됩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행복하게 사세요


  이 가사 그대로 염려는 하면 할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염려는 하면 할수록 손해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믿어야 합니다.

  30절을 보면 염려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곧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염려합니다.

  앞에서 살핀 대로 염려는 마음이 나뉜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 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믿음 하나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세상 일에 대한 마음으로 나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약해지고 믿음이 적어집니다. 그 믿음이 적어진 마음의 공간에 염려가 채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키우면 염려는 반비례해서 사라지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32절을 보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합격을 통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감사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 돌아보니 수풀 속에 수양이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제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수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6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공중의 새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저 하루살이 들풀보다 훨씬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따라 채우시고 풍성케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문제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일천번제 사건을 잘 압니다. 한번 번제에 소 한 마리를 각을 떠서 태워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번제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려 일천번의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드렸다면 1년 이란 긴 시간 동안 왕이 다른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번제 드린 일에만 전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감동을 받으셔서 솔로몬에게 소원을 말하라 하셨습니다. 그 때 그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왕의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를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염려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벧전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 버리고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맡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염려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고 전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염려를 떨쳐버리고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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