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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결정체 (삼하 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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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결정체(사무엘하 9:1-13) 


「다윗이 가로되 사울이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삼하 9:1-3>

'결정'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반죽되고 혹은 뭉쳐져서 아주 값지고 귀한 것이 되어 졌다는 말로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강한 것 중에서 제일 강한 것이 다이아몬드입니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쇠를 뚝뚝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값비싼 것으로 유명한 보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다이아몬드가 무엇으로 되었느냐 하면 공기 중에 있는 탄소로 된 것입니다. 이 탄소 그 자체는 전혀 값어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또 있는지 없는지 느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꽉 뭉쳐져서 다이아몬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탄소의 결정체가 된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강하고 값비싼 보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우리의 믿음이 무엇의 결정체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믿음으로 반죽이 되고 뭉쳐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강한 믿음이고 얼마나 값어치 있는 믿음이냐 하는 것을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I. 보답하는 신앙

첫째로 우리의 믿음은 "보답하는 신앙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보답하는 신앙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사랑의 보답(1절)

첫째로는 사랑의 보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사울이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은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윗은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다 하면 꼭 보답하고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마하나임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 바실래라고 하는 한 부자가 있어서 다윗이 그곳에서 난을 평정하고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까지 불과 많은 기가도 아닌 두 세달 동안 다윗을 잘 공경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80세 된 바실래에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80이 된 이 할아버지 바실래가 "내가 나이 80이 되었는데 어디 가서 입맛을 맞춰 살겠습니까? 난 우리 선조가 묻힌 이 땅에 살다가 선조의 묘실에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그럼 아들이라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김함을 데려다가 평생 돌보아 주었습니다. 두 세 달 동안 신세진 것을 평생 동안 갚은 것입니다. 하여튼 다윗은 은혜 갚기도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집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입니다. 그런데 왕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를 생명같이 사랑해 준 은인입니다. 아버지 되는 사울 왕은 원수요 아들 되는 요나단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그 때 마다 그 아들 요다단이 감싸고 빼내주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요나단 앞에서 울면서 내가 이 신세를 꼭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울 왕과 요나단이 전쟁에 나갔다가 길보아 산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정돈되고 숨을 돌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이제 은혜를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사울의 집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요나단에게 진 신세를 꼭 갚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진 신세를 갚을 줄 모르는 사람,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사람, 밤낮 대하는 사람의 은혜도 못 갚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그러므로 보답하는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즉 보답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언약의 보답(7상반절)

두 번째로 "언약의 보답"입니다. 바꿔 말하면 책임지는 보답입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반드시 은총을 베풀어 보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맹세한다, 언약한다"할 때는 둘이서 언약하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둘이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아니라고 못합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하고 언약을 하면 반드시 지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짐했기 때문에 안 하면 그것은 너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어도 맹세를 지킵니다. 언약을 했다 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인도 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루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는 기브온 사람들이 가만히 있다가는 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지라 곰팡이나 난 떡, 누더기가 된 옷,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평화의 조약을 맺자고 청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떠날 때 새 떡을 해 가지고 새 옷을 입고 떠났는데 길이 하도 멀어서 곰팡이가 나고 옷이 다 헤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온 줄 알고 하나님께 물어도 안 보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룻길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에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을 몇 명 죽였는데 그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3년 동안 기근이 들었습니다. 다윗 때에 가서 사울의 자손들과 몇 사람을 내 주고야 그 흉년이 끝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죽기 얼마 전에 함께 맹세를 했었습니다. "우리 서로 도우며 살자. 내가 네 자손을 돕고, 네가 내 자손을 돕고 자손끼리 서로 돕자"는 맹세였습니다. 다윗은 그 맹세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나섰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한 약속에 대해서는 나 혼자 했다거나 단 둘이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누군가 못 들었어도 하나님은 들으셨고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한 행동,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신앙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계속적인 보답(7절 하반절)

세 번째로는 "계속적인 보답"입니다.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돌려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사울왕의 아들이 요나단이요, 그 요나단의 아들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므비보셋입니다. 그 므비보셋을 찾아 그 아버지 까닭에 그 아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사울이 재산을 전부 돌려주겠다는 뜻입니다. 돌려주겠다는 것은 벌써 몰수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찾아서 다시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 손에 권세가 있는 한, 내 손에 힘이 있는 한, 내게 기회가 주어져도 있는 한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는 것입니다. 항상입니다. 요나단에게 몇 번 신세를 지고 몇 번은 은혜를 받았지만 다윗은 그 자손에게 죽을 때까지 항상 책임을 지고 보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도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한번 하나님 앞에 뭔가 했다고 다 된 줄로 생각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보답, 언약의 보답, 계속적인 보답―보답하는 신앙, 이것이 우리들에게 열매 맺고 결정이 된 신앙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II. 영광 되는 신앙

다음에 두 번째로 영광 되는 신앙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희에게 천하에 있는 권세와 아울러 세상에 좋다하는 것을 다 갖다 주고 부귀영화 다 주겠으니 네 믿음하나 내놓으라." 그런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하의 영광을 다 준다고 해도 "아니오"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천하의 영광다 가져가라. 이것은 내가 살 동안 누리는 것 뿐이요 저 내세의 무궁하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을 내놓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그 믿음이 열매맺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광 되는 신앙"입니다.


1) 부친의 영광(1,7절)

첫째로는 부친의 영광입니다. 즉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1하반절)하였고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7상반절)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요나단 때문에 즉 아버지 때문에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숨어서 살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쩌면 살 것 같기도 하지만 자기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원수의 자손이기 때문에 산다는 보장이 없었던 연고입니다. 그래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살던 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내 왕궁에서 평생을 나와 함께 살고 함께 먹고 지내자"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 다윗을 통해 주어진 이 영광이 자기 공로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제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100% 아버지의 공로요, 아버지의 덕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때문에 받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로부터 받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 영광이 아버지 까닭이라면, 그것이 부럽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을 영광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이 베푸는 영광은 나 하나 살 동안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받는 영광은 영원무궁한 영광입니다. 므비보셋이 아버지 때문에 받은 영광보다 하나님 아버지께 받는 우리의 영광은 천배 혹은 만배나 더 귀한 영광이라고 하는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2) 특혜의 영광(3절)

다음에는 특혜의 영광입니다. "왕의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었습니다. 이 절뚝발이가 다윗에게 그런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특혜중의 특혜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절뚝발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임금이 되었을 때만 해도 예루살렘은 점령을 못했었고 유대나라 한 복판의 예루살렘에는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의 세력을 크게 한 다음에 예루살렘을 쳐들어갔습니다. 쳐들어갔을 때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을 단단히 방비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다윗 같은 사람이 쳐들어온다면 우리의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물리칠 것이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만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치면서 절뚝발이는 보는 대로 없애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도 절뚝발이는 곁에도 못 오게 했습니다. 보기도 싫다고 뜻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은인인 요나단의 아들을 찾아내고 보니 그 사람이 절뚝발이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한 번만 보고 말 것입니까? 하루만 보고 말 것입니까? 죽을 때까지 내상에서 먹자고 한 것은 특혜 중에서도 보통 특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하나님은 죄라고 하는 것은 꼴을 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은 용납을 안 하십니다. 반드시 죄에 대해서는 징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 중의 죄인이 아닙니까? 즉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서 속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우리들에게 주시고 우리의 죄는 다 가져 가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의인이 되고 예수님은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므비보셋이 다윗 왕의 영화를 누린 것처럼 영원히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특혜 중의 특혜입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특혜보다 천배 만배 귀한 특혜를 받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그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3)왕자의 영광(11절)

다음에는 왕자의 영광입니다.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예수님이 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 젊은 부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계명을 다 지키라고 했습니다.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계명 지킨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재산이 너무 많아, 네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데 네 필요 이상의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와서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필요 이상의 것은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얘기를 듣더니 재산이 많은 고로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슬픈 빛을 띄우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천당에 못 간다는 뜻입니다.

주경 신학자 중에는 이것을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바늘구멍이라는 성문이 있는데 그것이 하도 작아서 약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 기어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다른 것은 다 벗어버려야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까지 해석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적으로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러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처럼 그런 부자, 재산 때문에 예수를 버리고 가버리는 부자, 그런 사람은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 제자들이 "그러면 주님 어떻게,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시느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또 한 마디를 했습니다. "주여 그럼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으니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그 때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너희들도 그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다음에 만 왕의 왕으로 오실 때에 우리들도 다같이 같은 보좌에 앉아 예수님과 같은 권세,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가지고 거기에 동참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다윗 왕에게는 왕자가 몇이 있어서 왕궁에서 아주 자유롭게 삽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왕의 온갖 영화를 다 누립니다. 누구도 왕자들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므비보셋도 바로 그런 왕자의 하나처럼 똑같은 영광을 가지고 살게 해주었습니다. 왕자의 똑같은 영광, 즉 왕자의 영광입니다. 주님이 만 왕의 왕으로 보좌에 앉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과 같이 보좌에 앉아서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예표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광 되는 신앙은 부친의 영광, 특혜의 영광, 왕자의 영광입니다.


III. 충성하는 신앙


1) 숨겨주는 충성(4절)

충성하는 신앙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첫째는 숨겨주는 충성입니다. 이 충성의 장본인은 시바라고 하는 므미보셋의 종입니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시바가 왕에게 과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그 다음 5절에 보면 다윗이 가서 데려 오라 해서 데려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므비보셋은 숨어야 살지 나타나면 죽을지 살지 장담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도 숨어 있는 곳을 몰랐고, 많은 신하도 몰랐고, 어는 백성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왕이 수소문해 찾다 찾다 찾지 못했고 옛날 사울의 집에서 왕의 종노릇하던 시바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 시바가 요나단의 아들 하나를 숨겨두었습니다. 가장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숨겨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가장 적절한 도움은 바로 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인께 대한 충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은 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할 때 갚은 돈이 없어 처자식을 팔아다가 갚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다 탕감해주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니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십 만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적은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붙잡아 놓고는 조금만 연기시켜 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하고는 자기 집에 다 감금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먼저 주인이 불러다가 모든 것을 다 받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부자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 받은 사람은 어마어마한 죄를 용서받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쥐꼬리만한 죄를 지은 것을 용서 못합니다. 그걸 들추어내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 못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의 죄를 들추어내지 맙시다. 남의 약점을 덮어주는 아량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대한 충성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준행하는 충성(11절)

그 다음에는 준행하는 충성입니다.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 하겠나이다"(11상반절). 다윗 왕이 시바를 불러다 놓고 네 주인에게 충성을 하여 그 재산을 다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시키는 온갖 일, 궂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내게 해롭다고 이롭거나 다 준행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지나간 금요일 욥기 2장에 대해서 구역공부를 했습니다. 욥이 열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그 많은 재산을 잿더미가 되고 자기 몸에는 악창이 나고, 견딜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아내가 와서 뭐하고 했습니까? 이런 지경이 되고도 하나님 믿느냐, 저주하고 나가서 자살해 죽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는 응답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병신 같기도 하지만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욥은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해 줄 때 내가 복을 받았는데 재앙을 준다고 해서 안 받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는 것은 내게 현재 좋지 않아 보여도, 고통스러워도, 손해나 보여도 다 받겠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다 받더니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좋지 않다 싶은 것은 주어도 받고서 지나 놓고 그 과정을 넘기고 보면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좋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도 해롭거나 이롭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맡기시는 것은 다 준행 하고 나면 갑절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다 준행 하는 충성만 해야 합니다.


3) 종으로의 충성(12절)

다음에는 종으로서의 충성입니다.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무릇 시바의 집에서 거하는 자들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시바의 집에 사는 사람은 시바뿐 아니라 전부가 다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를 이어 충성입니다. 종으로서의 충성이란 말은 대를 이어 충성이란 말과 바꿔도 됩니다. 김일성이 자꾸 이 말을 씁니다. 자기 아들을 대를 이어 세워놓고 백성들보고 대를 이어 충성하자고 야단합니다. 본래 마귀란 놈은 성경에 있는 좋은 말씀을 가져가 자기 말처럼 쓰는 법입니다. 또 시바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열 다섯 아들도 대를 이어서 종이 되어서 충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을 하는데 나 혼자 잘 믿는다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아들도, 손자도, 계속 대를 이어 충성하는 그 믿음, 그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열매로 맺어지고, 결정이 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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