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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기념]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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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계2:18-29)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이 여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남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 못지 않게 유교는 인, 불교는 자비를 강조합니다. 행위적 측면에서 볼 때 어쩌면 저들이 더 앞서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저들은 피조물을 사랑해서 살생을 하질 않습니다. 미물 하나도 섣불리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그들보다 그리 우월하지가 못합니다. 또 외적으로 보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데도 살신성인의 큰 자선과 나눔을 베푸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적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특징이 사랑'이라고 강변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남달리 기독교적인 게 뭐냐'고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분명 희망 중에 삽니다. 아니 반드시 희망 중에 살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생생한 희망을 갖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언제나 살아있는 희망을 갖고 살고 그 희망에 대해 누가 묻거든 언제든지 해명할 준비를 갖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위험한 때는 바로 희망을 상실할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가정, 교회, 사회, 국가도 그렇습니다. 절망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잃어도 희망만 잃지 않는다면 다시 좋은 날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우리네 속담은 바로 그런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은 삶,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편지입니다. 주님이 편지를 보낸 일곱 도시들 중에 이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제일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무역이 성행했고 특히 양모 산업과 염색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두아디라 하면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처음 건너와 마게도냐 빌립보에 복음을 전할 때 안식일에 강변에서 만났던 자주장사 루디아입니다. 사도를 도와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출신입니다. 그녀가 취급했던 자주빛 물을 들인 옷감은 그 당시 엄청나게 비싼 고가품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듯이 뮤렉스라고 불리우는 작은 조개에서 추출해낸 로얄 퍼플이라는 별명을 가진 염료로 만드는 옷감이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조개의 목부분에서 나오는 극소량의 추출물로 만드는 염료이기에 그 염료로 물들인 자주색 옷감은 엄청 고가인 명품 중의 명품이었기에 권력층 또는 재벌들이나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주장사 루디아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을 팔고 있었던 귀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두아디라는 '작지만 알찬 도시'였습니다. 교통의 요지요,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부유한 패션의 도시, 무역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의 특징이 두아디라에 세워진 그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가장 작은 도시 두아디라에 서 있는 두아디라 교회, 외형적으로나 숫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작은 교회... 그러나 그것이 두아디라 교회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가장 작은 두아디라 교회가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긴 장문의 편지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정 한 가운데에 이 교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 그리고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제일 작고 왜소하지만 일곱 교회의 중심이 바로 이 두아디라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지만 알찬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존칭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18절에 보면 이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최고의 존칭이 계시록 전체에서 오직 여기에 단 한번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눈은 '불꽃 같은 눈'으로 묘사됩니다. 여기 '불꽃 같다'는 표현은 '밝다'는 뜻이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눈길은 더없이 깊고 따스한 사랑의 눈길입니다. 그 눈은 불꽃처럼 사랑으로 이글거립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각별하심을 잘 표현해 줍니다. 주님은 이 두아디라 교회를 그 어떤 교회보다도 귀히 그리고 각별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도 이런 주님의 사랑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불꽃같은 사라의 눈길을 건네시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어느 교회보다 귀히 여기시고 친히 나서서 챙겨주시고 보살펴주시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맨 마지막에 언급된 주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동트기 전 새벽녘에 나오면 유달리 반짝이는 샛별, 그게 바로 새벽별입니다. 샛별은 새날이 동터옴을 가리키는 별이요 새 날의 개시를 알려주는 별입니다. 이 샛별은 예로부터 나그네와 항해자들에게 필수적인 별이었습니다. 남쪽 밤하늘에 떠 있는 샛별을 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했고 새로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키웠습니다.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것은 곧 희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주시는 겁니까? "너희에게"가 아니라 "그에게"입니다. 여기 그란 '신앙으로 이기는 자요, 끝까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요,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의 줄을 굳게 잡는 자'입니다. 바로 그에게 새벽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아디라 교회의 사정을 좀 더 깊숙히 들여다 보십시다. 이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19절에 보면 주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게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저들은 갈수록 주님을 위한 더 많은 사업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얼마나 복된 칭찬입니까? 갈수록 더 성장하고 성숙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버린 점점 퇴보하는 교회'였지만 가장 작은 두아디라 교회는 활발히 성장하는 '나중이 처음보다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아디라 교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영혼의 해이'였습니다. "내가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하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용납', 이 단어가 중요한 단어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너그럽지 말아야 할 것에 너그러움으로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해 무사안일하게 대처했다는 겁니다. 24절 말씀처럼 사탄의 깊은 궤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이란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아실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가 된 여인입니다. 그녀는 바알숭배자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변질시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한 여인이 두아디라 교회에 예언자로 자처하며 신앙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 이세벨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저버리게 했듯이 이 이세벨 또한 두아디라 교인들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 이세벨의 현혹에 넘어간 자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 저들이 어떻게 그녀에게 미혹되었을까요? 무역도시요 상업도시였던 두아디라에는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길드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상업조합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장사나 업자도 이 상업조합의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번창하거나 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조합원이 된다는 것은 두아디라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회적 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상업 조합이 이교신 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이면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식사 전후에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교신 숭배였습니다. 제물이 이교신에게 올려진 후 그 고기를 가지고 조합원들이 함께 먹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상업조합의 축제는 늘 그렇듯이 먹고 떠드는 모임이었고 이어서 2차, 3차로 술취함과 부도덕한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이런 모임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이 두아디라 교인들의 현실적 당면문제였습니다. 이 의식에 참여하면 할수록 사업의 이익과 물질적인 번창은 늘어날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조합의 회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업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어쩌면 가난과 파산을 면치 못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갈등 국면에서 고민하던 두아디라 교인들로 하여금 상업 조합의 회원이 되게 하고, 이교적인 활동을 하게 하며, 결국 상업적 이익을 위해 이방신을 숭배하게 한 여인이 바로 이세벨이었던 것입니다. 즉 그녀는 신앙과 경제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던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타협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겁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은 돈을 버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느냐의 양대 기로에 서 있었는데 바로 그 틈새에 이세벨이라는 설득력 강하고 매력적 개성을 소유한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마치 하와처럼 저들에게 타협과 절충과 적응을 가르쳐 저들로 거기에 흡수되게 한 것입니다. 즉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경제냐 신앙이냐, 장사가 우선이냐 그리스도가 우선이냐? 조합 회원의 역할이 먼저냐 교인의 역할이 먼저냐? 하는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서 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택했던 것이고 그 배후에 이세벨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이 오늘 현대 교회의 상황과 너무도 닮아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또한 1800년 전 두아디라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했던 현실과 이렇게 똑같은 현실에 처해있습니까? 하나 다를 게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어떤 이는 신앙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돈을 선택합니다. 돈이라면 신앙, 주일, 섬김, 진리를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그런 사람에게는 새벽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희망이 없는 인생입니다. 새벽별을 볼 수 없는 인생은 절망의 인생입니다. 언제까지나 어둠과 답답함 속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2절에 보면 주님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시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게 지혜입니다. 내가 9단이면 사탄은 45단이고 하나님은 90단이십니다. 주님의 훈수대로 살면 승리할 수 있고 인생의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기 방법대로,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겁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 몇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체면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의 눈높이에 맞춰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새벽별을 볼 수 없다면 그 인생은 언제까지나 어둠 속에 머물다 끝나고 마는 겁니다.

영적인 깊이를 좀 헤아리며 사십시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얼른 이세벨을 떠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의 '영혼의 해이'는 물질적인 것들이 본질적인 것을 흐리게 하는 데서 야기된 문제였습니다. 하와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가 교회 바깥에서 들어온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겁니다. 박해의 위협이 아니었고 이교 숭배의 엄포나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타협의 교리를 제시하는 교회 안에 있는 인정많고 용기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겁니다. 무사안일, 자기 합리화, 회피주의... 이런 것들이 두아디라 교회의 위기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런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주님은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어떤 선택이 바람직할까요? 어떤 선택이 희망적일까요?...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빛나는 새벽별이신 주님은 명확하고 단호한 신앙고백을 기대하십니다. 놓아버린 것을 당신 오실 때까지 굳게 잡고 살라하십니다. 신앙으로 이기고 끝까지 주님의 일을 잘 간수하라십니다.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또 새벽별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여기 그들이란 다름아닌 믿음에 충실한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교회 창립 23주년을 맞습니다. 이 창립기념주일 아침에 종을 통해 주신 이 말씀을 여러분 마음판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의 생일을 맞아 이 교회의 지체로 부름받은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점점 어두워가는 이 세상 속에서 언제나 희망의 새벽별을 바라보며 사는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별이신 주님의 그 사랑에 익은 불꽃 같은 눈길에 데이는 따스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만들어 또 하나의 새벽별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벽별이신 주님을 매일 만나고 뵈는 사람은 그런 샛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다같이 벧후 1:18-19절을 찾아 읽음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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