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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비판하지 않습니다(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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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판하지 않습니다(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1-5)

여러 해 전 가이드포스트라는 작은 잡지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는 한 부인의 체험담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이따금씩 한가할 때 응접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든지 또는 신문을 읽든지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그다지 넓지 않은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와 마주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건너편 아파트의 응접실 안이 육안으로도 들여다보일 정도였습니다. 건너편 아파트에는 아주 고상하게 생긴 부인이 이따금씩 응접실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도 커피 잔을 들고서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았습니다. 자연히 그의 눈길은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원 세상에 아무리 바빠도 창문이라도 닦고 책을 읽든지 뜨개질을 하든지 할 것이지 저게 뭐야? 얼굴은 곱상하게 생기신 분이 살림살이는 시원치 못하구먼!"

그로부터 한 두 주가 지났습니다.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마음을 먹고 집안을 구석구석 쓸고 닦으면서 대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창문도 깨끗하게 잘 닦았습니다. 그는 집안청소를 다하고 난 뒤에 피곤한 몸을 끌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자연히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건너편에 있는 응접실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입니까?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부인이 응접실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내가 얼마 전에 저 부인이 자기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 이제 보니까 내가 우리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이처럼 어리석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앞으로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창문을 제대로 닦지 못하면서 그저 성급하게 다른 사람이 자기의 창문을 닦지 않았다고 불평하며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모든 것을 환하게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판단하시는 일에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컨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11:5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자신의 두 눈으로 성과 대를 쌓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18:21입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판단하시기 전에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11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한 죄사함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사랑으로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비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3-4절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행여 우리의 마음 속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적인 비판의 태도가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떨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 물이 바다를 덮음처럼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긍휼로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1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금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누구에게서 비판을 받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비판"이라고 조금 약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원 단어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충고나 책망의 차원이 아니고,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감히 비판하겠습니까?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학생이 시험 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학생의 시험지를 자신이 채점하겠다고 생트집을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푯대를 향해서 열심히 달음박질해야될 경주장의 선수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서 제대로 뛰지를 못한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면 잘못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다른 사람이 못 뛴다고 해서 경주장 밖으로 나가라고 큰 소리 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했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다. 눅18:11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그 사람을 깔아뭉갠다고 해서 그만큼 우리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바리새인을 가리켜 오히려 세리보다도 더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은 세리보다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혹독하게 대하면, 하나님도 똑같이 우리를 가혹하고 혹독하게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5: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약2:13의 말씀처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심은 그대로 우리 자신이 언젠가는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모르드개를 미워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를 모함해서는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서 높이가 50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만이 오히려 그 장대에 매달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하만은 말하자면 자기의 비판했던 그 비판으로 자기가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만은 자기가 헤아리고자하는 그 헤아림으로 자기가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모르드개에게 했던 그 방식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전도를 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 엄청난 죄 값을 누가 치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2입니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교회를 손상시키고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우리가 서로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때 좋아하는 것은 마귀밖에 없습니다.
"잘들 논다. 내가 중간에서 이간질 좀 했더니 저희들끼리 잘들 싸우네."
왜 우리가 마귀의 수작에 놀아납니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는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3-4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 비유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망치질이나 톱질을 하다보면 이따금씩 눈 속에 티가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또 집을 지을 때는 통나무를 들보로 사용합니다. 들보에 비하면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티에 비하면 들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큰 허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작은 허물을 가진 사람을 탓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큰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우리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토록이나 기세 등등했던 그들이 다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감히 돌을 들어서 던지겠습니까? 실상은 똑같은 죄인들이요, 더 큰 허물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감히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계명들의 기본 뼈대, 근본, 들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위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옆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들보가 되는 정신인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연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자기들이 정해놓은 유전의 세미한 조항 하나라도 어기면 그들은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자기들은 들보를 어기면서도, 다른 사람이 티를 어기면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그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4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말에도 같은 의미의 속담이 있습니다.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책망한다."
솔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가랑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좀 더 저속한 표현도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무엇이 더 더러운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큰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간에 흉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좀 놀리고 싶어서 무학대사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사, 이제 보니까 대사의 얼굴은 돼지상이군요."
그러자 무학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폐하, 폐하의 얼굴은 부처님상이시군요."
그 소리를 듣고 이성계는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대사. 나는 대사를 돼지같이 생겼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대사는 나를 부처처럼 생겼다고 말하시오?"
그러자 무학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야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생긴 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돼지처럼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도 돼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처같이 생겼으면 다른 사람도 부처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가 보입니까? 실상은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꾸 보이면, 우선은 내게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누군가가 자꾸 내게 와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그것도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해보세요.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내게 와서 남의 허물을 전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리에 서서도 안되고, 비판을 듣는 자리에 앉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만큼 내 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남의 비판을 듣는 만큼 내 귀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판을 하는 자리에 서서도 안되고, 비판하는 것을 듣는 자리에 앉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종종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는 한 마디로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큰 들보가 박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니까 "먼저"와 "그 후에야"라는 두 단어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서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탈리아의 피사라는 곳에 가면 사탑, 곧 기울어진 탑이 있습니다. 피사의 사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탑은 주후 1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8층 높이의 탑입니다. 그런데 이 탑은 세울 때부터 한쪽 기반이 내려앉아 지금도 탑 전체가 수직면에서 5.2m정도 기울어진 채로 서 있습니다.
만약 이 피사의 사탑이 자기의 삐딱한 시각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만 똑바로 서 있고, 자기 이외의 세상 전체가 다 삐뚤어졌다고 계속해서 고집할 것입니다. 실상은 그 정반대입니다. 자기가 삐뚤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비딱한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전부 다 비뚤어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는 들보가 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의는 세리보다도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5:20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어떠합니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깔고 뭉개는 의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의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어 형제를 살려주는 의가 아니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형제의 눈을 찔러 그를 죽이는 의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를 가지고 어찌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더 나은 의, 곧 우리가 옷입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어떠합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의의입니다. 내가 희생하면서 형제를 살려주고 도와주고 세워주는 의입니다. 형제가 눈 속의 티로 인해서 괴로워합니까? 그러면 같이 아파하면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조심스럽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눈에 있는 티를 도와서 빼내줌으로서 형제를 살려주는 의입니다. 이런 의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학문이 깊고, 성경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에베소 회당에서 열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곳에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볼로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의 설교 중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듣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설교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뿐,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과시하고 싶은 심정에서, 우쭐대고 싶은 심정에서,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했더라면, 아볼로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생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조용히 아볼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겸손한 태도로 자기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들은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로 아볼로는 어디를 가든지 성경으로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힘써 증거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유익을 끼치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있었던 사랑과 겸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가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로 인해서 괴로워합니까? 그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티를 강압적으로 빼내려고 하면 형제는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의 마음에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안을 활짝 열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 후에야 우리는 그들과 같이 아파하면서 겸손과 온유의 태도로 조심스럽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형제를 도와서 빼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형제를 돕는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비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감히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비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렇게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자기성찰의 의무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그 뒤에 우리의 형제 가운데 눈에 티가 들어가서 힘들어하면,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도와 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어주십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도 똑같이 가혹하게 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마5:7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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