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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2) (고후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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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2)(고후6:1~13)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장마의 끝자락 속에서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성령의 열매라는 주제로 두 번째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과 기쁨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고. 오늘 아침에는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참음, 자비, 양선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오래참음 입니다.
오래참음이란 우리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사람에 대하여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검사가 "욱하다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의 내용은 작은 범죄든 큰 범죄든 모두 순간적으로 참지 못해서 말 그대로 욱하는 성질을 다스리지 못해서 터지게 되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잠 12:16에서도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하였습니다.
또 잠 15:18에서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하였고
잠 16:32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참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요?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였습니다.
사마리아 근처를 지나가시다가 날이 저물어서 하루를 쉬어야겠는데 요새 같으면 뭐 모텔이 어디서나 휘엉청 밝은 불을 키고 있겠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숙박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우리 일행이 한 십 여명 되는데 하룻밤을 좀 지낼 수 없겠습니까? 하고 여러 집을 다녔지마는 모두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 사람들을 너무나도 싫어했기 때문에 대답은 오직 하나 안됩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아! 여러 집을 돌아다녔는데요 다 ―  안됩니다. 라고 거절합니다. 역시 사마리아 놈들은 다 못돼먹었어요!
이 보고를 듣고 있던 요한과 야고보가 그냥 화를 벌컥 내면서 예수님! 아니! 그런 놈들을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리게 해서 아예! 싸-악 불살라 버리시죠 하면서 그냥 펄펄 뛰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급하게 보였으면 예수님께서 야! 네 모습이 "보아너게"구나 다시 말하면 "우뢰의 아들"하늘에서 우르릉-꽝! 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이 우뢰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 비단 야고보와 요한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했을 대에 울분을 벌커덕 내진 않았습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울분이 치솟아 오르게 하는 것을 인내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울분과 성냄은 성령의 근심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엡 4:31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말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하였습니다.
잊지 마세요!
성질 내는 것!1
분노를 터트리는 것!!
울분을 폭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엡 4:26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도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오해나 모략과 중상 때문에 가슴 아픈 사람이 계십니까?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어 주라"
이건 완전 옛말이요.
이젠 오른 뺨을 맞기도 전에 두발 당수가 걷어차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궁화호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을 칼로 찔러서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집안은 200년 전에 원수 되었던 사건 때문에 손자의 결혼식을 반대해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리는 30대 중반의 노총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거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억울하죠! 분하죠! 그냥 한번 콱 쏟아놓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끝까지 "견디는 자가" 무엇을 얻으리로다?
예! 구원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원수를 갚으므로 승리하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인내로 승리하는 소망의 성도들이 되셔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같이 옆에 계신 분과 인사를 나누시겠습니다.
"인내하십시다"
"오래참으십시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두 번째는> 자비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자비를 gentlness 또는 kindness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비란 생각이나 이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 실행적으로 부드럽게 또 친절한 행동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비는 우리 기독교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대자대비를 유교에서는 맹자가 불인인지심이라 하여 자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비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주신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우리 예수님은 그 사람 자체가 자비의 삶이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을 보시고는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사람, 약한 사람, 베고픈 사람, 손 마른 사람, 눈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문둥병에 들린 사람,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다시 살려 주시는 자비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세상에 자비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제일먼저 불쌍한 사람을 돌봐 주는 것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들에게 목욕봉사를 하는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뭐 별스러운 일이 크고 장황하게 자비를 나타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그 현장!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 일이 사람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열차 안에서 사람들 살해하거나 길거리에 폰팅 한다는 플랭카드는 절대로 내 걸리지 않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친절해야 할까요?
마 5:7에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친절하십시다.
따사로운 미소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양선입니다.
양선이란 착한 일을 말합니다
엡 5:8-9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빛의 열매인 착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품 자체가 짜증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면 입이 간질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남의 흉을 보면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첫 번째로> 착한 사람은 다투지를 않습니다.
저도 설교는 합니다마는 저를 위해 주는 사람에겐 기쁨의 모습을 나타내기 쉽지만 그저 헐뜯고, 미워하는 삶 이거 사랑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 아시죠.
돌멩이로 내려치면서 욕을 퍼붓는 사람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나이다."하며 순교의 신음 속에서도 용서해 주셨던 스데반 집사님!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물을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까?
우물물을 흐린다. 샘이 더러워진다 라는 말은 악인이 막대기로 우물이나 샘을 마구잡이로 휘져으면 그 물이 어떻게 됩니까?
흐려집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물물이나 샘물은 다시 그 물이 맑아집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깨끗한 물이 자꾸만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악인은 의인의 물을 흐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흐린 물은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다시 맑게 되듯이 결국은 의인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후 6:9-10 다같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을 가져옵니다.
그가 나에게 악을 휙하고 던집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을 두 손으로 잡고 내 속에 있는 선을 지키면 그 악은 절대로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이 도로 그 사람에게로 튕겨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던질 때 야이! 나라고 참겠니 하면서 두순 내밀고 입을 열면 그 사람의 악은 나에게 들어오고 나의 악도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결국 두 사람 모두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멘!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의지해서 인내의 열매, 자비의 열매, 선한 열매를 많이 맺으셔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격 속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복되게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소망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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