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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을 원하는 뜻 / 마 9: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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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긍휼을 원하는 뜻
성경본문 : 마태복음 9장 9절 - 13절

설교내용

수년 전에 횃불선교원에서 초교파 부부성경공부 하는 클럽이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2년간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지식인 한 사람이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현직 대학교수로 있는 이 사람이 성경 읽는 열심이 나서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번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성경에 긍휼이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데 그 말이 참 어렵더군요. 그 말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 한글만 읽는 것이 아니고 영어 성경도 두 권이나 대조해 가면서 그렇게 읽었습니다. 이 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영어번역에 보니까 I will have mercy 이렇게 되어 있는데, 자비라는 말과 긍휼이 같은 뜻입니까? 또 어떤 성경에는 I want your love 사랑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사랑이라는 말도 긍휼과 같은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내가 사전적으로 깊이 가르쳐 드릴 테니 한주간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 내가 자세히 가르쳐 드릴께요.”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생명의 고향

  히브리말은 어근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언어가 히브리말과 헬라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연구할 때는 어근을 많이 분석합니다. 긍휼이라는 이 말은 라함이라는 히브리말인데 이 말의 그 어근은 레헴입니다. 레헴에서 이 말이 왔습니다. 레헴은 그 뜻이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왜 긍휼이라는 말이 자궁이라는 말에서 왔는가? 참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자궁은 생명의 고향입니다. 사랑의 고향입니다. 여인이 자궁의 생명을 잉태하면 그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사랑을 먹여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자궁 안에서 안전하게 자랍니다. 생명이 자라는 곳은 자궁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임신하고 1개월, 2개월 된 생명, 5개월, 6개월, 10개월 이렇게 자라 가는데, 이 생명은 자궁 외에 다른데 가서는 보존이 안 됩니다. 1개월 된 그 생명이 어디 가서 보존되겠습니까? 자궁이라는 이 평안의 자리, 안전의 자리, 그곳이 아니고는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자궁은 사랑의 뿌리요 생명의 뿌리가 되는 좌소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것은 사랑과 생명을 담아서 베푸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냥 좋아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궁 속에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이 바로 자라도록 사랑을 베풀어주는 모성의 사랑이 그 생명을 안전하게 자라게 하는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우리가 베푸는 사랑이요, 그 사랑은 상대방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을 얻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이 말은 사랑과 생명의 본질을 담은 인간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 사랑은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먹고 반쯤 소화를 해서 새끼 새에게 그 주둥이를 입안에 넣어서 먹이를 먹이는 그 어미 새의 모습은 바로 놀라운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레헴이라는 말은 그 개념이 아주 넓습니다.

  땅도 레헴입니다. 여러분, 땅도 산 땅이 있고 죽은 땅이 있습니다. 죽은 땅에는 곡식이 되지 않습니다. 흙은 살아서 숨을 쉽니다. 그런데 죽은 흙에는 곡식이 되지 않습니다. 산 흙이라야 파종을 하면 거기서 발아가 되고 싹이 나고 곡식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땅도 자궁입니다. 숲도 자궁의 역할을 합니다. 숲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새들과 짐승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숲도 하나의 자궁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바다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바다에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온 우주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레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이 세리는 그 당시에 가장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고 비 신앙적인 사람이어서 천대를 받는 사람이고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 집에서 예수님이 잡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일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을 했던 것은 심리적으로 ‘주님, 빨리 일어나십시다. 오래 앉아 있다가는 안 좋은 소리 듣겠습니다. 빨리 일어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하셨습니다. “가서 일러라!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느니라. 그 뜻이 무엇인지 너희들은 배우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오늘 설교의 내용이고 중심입니다. 이 긍휼의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이 되기 바랍니다.

  긍휼있는 제사를

  예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1장 6절에서도 주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바 “긍휼을 원한다는 것”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사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제사행위는 오늘의 예배 행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뜻은 예배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고, 긍휼 없는 예배를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이 말은 유대인을 향하여 우회적으로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긍휼이 없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 유대인들, 긍휼이 없이 율법을 논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그들의 신앙을 주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긍휼 없는 예배, 긍휼 없는 기도, 긍휼 없는 섬김, 긍휼 없는 모든 행위를 주께서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렸으면 방심하면 안 됩니다. ‘아, 오늘도 나는 예배를 드렸다. 내 신앙생활은 이것으로 그래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긍휼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을 행하고 살면서 오늘도 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한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사장 한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피하여 갔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레위인 한 사람이 그 길을 지나다가 역시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세번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나귀에서 내려 그 죽어 가는 사람을 응급조치를 하고 나귀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여비까지 주면서 그 사람을 살렸습니다. 주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세 번째입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이 양과 염소를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합니다. 레위인들은 도와줍니다. 율법에 보면 죽은 시체를 만지는 자는 성전에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제사를 집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 사람들은 혹시 죽어가는 그 사람이 내가 돌보는 그 사이에 죽어 버린다면 시신을 만지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피하여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되어서 그 사람이 죽었다 할지라도 제사를 집행하는 일을 일정기간 못한다 할지라도 가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결론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누구든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가 바로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조직, 구조, 체제, 법령, 환경, 그런 것에 부족함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는 긍휼의 부족입니다. 이 긍휼이라는 말은 매우 영적입니다. 국가에서 담화문 발표할 때 긍휼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반서신에도 긍휼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긍휼은 매우 영적인 용어이고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긍휼은 사회적 관념으로 보면 매우 필요한 말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자궁은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긍휼이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행위를 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삭막해져 가고 사나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주고받는 거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메말라져 가고 인간들은 점점 잔인해 가고 있습니다. 긍휼의 부족입니다. 긍휼의 굶주림입니다.

  다르다와 틀리다

  요즘 사회현상을 보면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을 하지 못하는 부조리가 있습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나와 취미가 다른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취미가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틀려먹었다고 우리사회는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틀린 것을 본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자세히 보고 이해하고 인내하면 그 속에서 배울 것도 많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배울 것이 없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틀리다는 사고방식, 신문의 논조, 정치인의 의식, 나를 움직이고 있는 의식이 나와 다른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큰일입니다. 노동현장의 의식이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합니다.

  언젠가 세미나를 갔는데 목사님 네 사람이 한방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오후 시간이 끝나고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저녁시간까지 세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우리 방에만 있지 말고 나들이를 하자, 운동을 하자, 볼링을 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네 명중에 한사람은 볼링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볼링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못해도 같이 배울 기회도 되고 볼링을 안 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분위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칠 줄 모른다고 안 가려고 합니다. 네 사람 중에 한사람이 안가면 판이 깨집니다. 그래서 억지로 가자고 하는데 이 친구는 안가기로 단언을 하고는 급기야는 본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안 가는 것도 괜찮고 못하는 것도 괜찮은데 볼링을 하는 우리를 비판하고 나옵니다. 볼링, 그 쓸데없는 거 하느냐고 방에서 조용히 쉬자는 것입니다. 결론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쌈을 해서 같이 갔습니다. 보쌈을 한 결정적인 말이 무엇이냐면 “너 가서 오늘 우리 볼링 치는데 음료수를 사라, 마음에 내키거든 요금도 내라, 그리고 기분이 좋거든 저녁까지 사라,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  그날 저녁 재미있게 놀다 왔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는 것이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생활 속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분석해 보면 너무 많습니다. 부부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가족관계도 그렇습니다. 친구와 거래 관계도 그렇습니다. 교인들끼리 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다르다고 틀렸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게 답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런 병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해 줄 때 우리 사회는 갈등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르면 무조건 틀린 것입니다. 내 편 아니면 다 틀린 것입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베짱이가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개미에게 양식을 얻으러 왔습니다. 그 때 개미가 이 베짱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일할 때 너는 놀았어. 나는 억울하다. 너는 내가 일할 때 노래하고 놀았으니까 이제 와서 굶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나는 결코 너를 도와 줄 수 없다”고 문전박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화를 재 해석 하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개미의 심리를 잘 분석해 봅시다.  베짱이를 보고 옳은 말이지만 너무 매몰차고 가혹합니다. 지금 베짱이는 밖에 나가면 죽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문전 박대하는 개미의 매정함입니다. 그런데 개미의 심리를 잘 분석해 보십시오. 개미는 내가 일할 때 너는 놀았다. 나는 억울하다. 내가 사실 놀지 못하고 일했는데, 나 사실 그때 놀고 싶었다. 그때 너처럼 놀고 싶었지만 못 놀았다. 못 놀았던 것이 억울하다. 그런 심리가 개미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미가 이렇게 답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 친구야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느냐? 좀 들어오너라. 사실 지금 내가 말하지만 내가 일할 때 너는 노래만 부를 때 미웠어. 하지만 그래도 너의 노래 듣고 나도 힘을 얻었고 일하다가 너의 노래 때문에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때는 인사 못했는데 고마웠어. 이것 먹고 기운차려라.”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 너처럼 놀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 요즘 성공한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데’ ‘내가 허리 졸라매면서 입을 거 안 입으면서 이룬 성공인데 누가 감히 손을 대’ 그래서 주머니를 풀지 않습니다.

  요즘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아실 겁니다. 개미가 겨울을 맞아 들어 앉아 보니까 너무 중노동을 해서 관절염이 걸려서 시름시름 앓고 그 많은 양식도 입맛을 잃어버리고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되어 가는데 베짱이는 노래 부르다가 노래가 히트 하고 앨범을 내서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신세대 풍자 유머입니다. 어른들이 공부,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특기만 살려도 잘 사는 경우가 있다는 세태를 풍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부족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노라” “너희들이 긍휼을 베푸는 것을 원하노라” “내가 너희들에게 예배를 원치 않는다” “왜? 긍휼이 없는 예배생활 지쳤다” “긍휼이 없는 기도, 내가 듣기에도 피곤하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 베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몹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주님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원수를 갚아 주시옵소서.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을 베풀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원수를 다스려 주십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긍휼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갚아 주셨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을 회개시켜 스데반이 못하고 간 선교의 일을 바울이 하도록 하나님께서 선하게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역사입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동기를 가지고 베푸는 것은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며칠 전에 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갔습니다. 현재 중국수석이 후진 타오입니다. 이 사람은 금년 초에 국가 주석이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상 이렇게 나이어린 사람이 주석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이가 많습니다. 61살입니다. 그러나 주석으로 등극 하는데 아주 생각보다 빨리 주석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목을 받습니다. 이 사람은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주 가난한 차를 파는 찻집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참 좋아서 이번에 노 대통령이 가서 연설했던 중국의 친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너무 천해서 원하는 학과에 가서 공부를 못했습니다. 머리는 참 좋은데 학교 안에서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이 사람이 야망을 가지고 정계에 입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되고 하는 중에 이 사람이 신분이 천해서 좋은 자리에 배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구이조우라는 가난한 성이 있습니다. 네팔쪽의 히말리야 산기슭의 가장 가난한 성이 있답니다. 관리들이 그쪽으로 발령이 나면 죽으러 가는 귀양살이로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그곳에 후진타오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구이조우 성은 세 가지 악담이 있는 고장입니다. 사흘연속 갠 날이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전부 산촌이고, 스푼에 은전이 없는 땅이랍니다. 즉 벌어먹을 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황막한 땅이기 때문에 이런 악담이 생겨서 여기 가는 사람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생각했습니다.

  후진 타오가 거기 발령을 받아 갔습니다. 그 사람은 거기서 세 가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후진타오의 신조가 있습니다. 생각을 해방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흘 갠 날이 없는 그 땅에 가서 여기만큼 비가 많이 오고 물이 좋은 곳이 없으니까 여기는 수력발전을 일으켜야겠다는 정책을 붙잡았습니다. 평지가 없이 산만 있는 여기를 내가 위대한 관광지로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먹고 살 것이 없는 이 고장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그는 연구하고 찾고 찾은 결과 그 고장에는 무궁무진한 석탄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진타오는 거기서 오늘의 중국개발의 밑거름이 되는 수력발전을 일으키고, 그 황막한 땅을 오늘 세계인들이 찾아가는 관광지로 만들고, 석탄산업을 통하여 잘 사는 고장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업적이 누구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는가? 중국의 주석이었던 등샤오핑이 후진타워를 발탁했습니다. 너는 거기 있을 인물이 아니므로 나오라 해서 오늘의 주석의 자리에 앉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등소평이 한번 봐 줄 때 그 사람의 인생에 그런 결과가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순수하게 베풀면 불신자의 선행도 하나님이 위대하게 쓰십니다. 그런데 욕심을 가지고 베풉니다. 계산을 가지고 베풉니다. 내게 돌아올 잇권을 가지고 베풀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긍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베푸는 나보다도 베풂을 받는 상대방이 죽은 자리에서 살아납니다. 희망을 잃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긍휼의 효력입니다. 이와 같은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긍휼 없는 교회봉사는 위험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기쁘고 그것이 복이 되려면 긍휼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긍휼을 가지고 섬길 때 자궁 속에 생명이 자라듯이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갈 줄 믿습니다. 이 교회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는 때로 교만해서, 미련해서, 조그만 일 하나 해 놓고 잘했다고 큰소리칩니다. 이제 우리는 그 큰 소리를 그치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을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여 섬긴 것이고,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지, 내가 무슨 일을 해놓고 큰소리 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한 주간 후에 우리는 성전건축 기공을 합니다. 보이는 집을 짓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집을 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큰집을 짓습니다. 공간이 많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말씀을 담아서 우리가 짓는 성전은 크기에 비하여 구석구석 방마다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한 성전으로 만듭시다. 집만 크게 지으면 무엇합니까? 예배당 안에서 긍휼을 잃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분쟁한다면 그 성전은 하나님이 받는 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집으로 삼고 사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가 지은 건물 속에 오시겠습니까? 그러나 건물 안에서 우리가 긍휼을 베풀고 주님을 섬길 때 긍휼의 자리에, 긍휼의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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