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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합니다 /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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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합니다
마 14:22-33

어릴 때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워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태양빛이 흩어지면 종이를 태울 수 없지만 볼록렌즈를 통해 집중되면 종이를 태웁니다. 무딘 화살은 과녁을 뚫을 수 없습니다. 집중력을 잃어 버린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집중력이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현직 교사인 유미현씨가 쓴 "넌 죽어라고 공부하니? 난 집중해서 공부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공부는 죽어라고 하는 것보다는 집중해서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집중력은 공부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비교할 때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집중력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에 집중해서 사업을 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핵심에 집중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주크와 제임스 앨런은 10년 동안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은 한가지 혹은 두 가지 핵심사업에 집중한 회사였다고 합니다. 핵심에 집중한 회사가 지속적인 수익을 올리며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Michael Treacy ,Fred Wiersema가 쓴 "The Discipline of Market leader"에서도 "목표 고객을 정하라! 핵심 영역에 집중하라! 시장을 지배하라!"는 경영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성공하려면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변화 심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앤서니 라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97년, 국제상공회의소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1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그이 책은 천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내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에서 기업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인데 사람이 변해야 세상이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능력의 집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10년 전 캘리포니아 베니스에 있는 10여 평의 독신자 아파트에 앉아서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가난뱅이 뚱보였다고 합니다. 고작 고등학교 졸업장밖에 갖지 못한 새파란 젊은이였지만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가 온 것은 "능력의 집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조절된 집중력은 레이저 광선 같아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떤 것이라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것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재능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자신에게 집중하면 실패합니다. 인간에게 집중해도 안됩니다. 환경에 집중해도 않됩니다. 목사에게 집중해도 실패합니다. 결국 실망합니다. 제도나 교회의 규모나, 프로그램에 집중해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보십시오. 베드로도 예수님께 집중하지 않고 풍랑을 바라볼 때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8)"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1. 우리는 폭풍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찾아 오시는 주님)

제자들은 재촉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저었지만 폭풍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약속하였지만 광야가 기다리고 있고 요단강과 여리고성, 아이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인생살이에서 거센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한다고 무균실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허리케인이 교회 종탑 있는 곳만 피해 가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 풍요로운 오아시로 인도하시지만 때로는 광야와 아골 골짜기 같은 곳으로도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당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어부들이기 때문에 바다에 관한 한 전문가들입니다. 이 바다는 그들의 놀이터나 같은 익숙한 곳입니다. 전문가라고 폭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하다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폭풍 가운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폭풍 가운데 헤매고 있는 시간이 몇시입니까? 25절 보십시오. 밤 사경입니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를 사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9시간을 폭풍 가운데 겨우 노를 저어 수리 갔다고 했으니(23, 24) 얼마나 거센 파도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6:19절에는 10여리 갔다고 했습니다. 9시간에 4-5km 간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폭풍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기도하시던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신앙이 좋았던 사람인 것같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생일이 되어 큰 축하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축하 행사 때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사용하던 테이블 서랍을 열어 보는 행사였답니다. 잠긴 서랍을 열었더니 아무 것도 없고 종이 한 장이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캄캄하고 어려울 때는 요나를 생각하라.' 요나는 바다에 빠졌고 큰 고래에 삼킴을 당한 사람입니다. 폭풍이 불수록 그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폭풍 속에서 바다 속에서 큰 고래속에서 자신을 찾아 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두울수록 괴로울수록 폭풍이 심하게 불수록 우리를 찾아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풍랑이 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레이놀드 W 그린씨는 말하기를 "인생에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고난과 슬픔이라는 보자기 속에 쌓여서 온다"라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 인생길에 폭풍이 다가 옵니다. 폭풍 가운데 괴로워하며 노를 저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고 도망간 아담과 하와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힘겨운 싸움을 하면 버립니다. 폭풍을 만나면 다 도망갑니다. 회사도, 가정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폭풍을 만난 사람을 찾아 오십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가며 살던 여인,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 사람을 피해 땡볕에 물을 길러 나오던 여인,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을 찾아가 치료해 주십니다. 마지막 희망 아들이 죽고 절망가운데 처한 나인성 과부에게 예수님은 찾아가 주십니다. 열두해 혈루증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여인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으며 사는 삭개오를,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씨병 환자를 예수님은 찾아가십니다.

찬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복음성가 842)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 오시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 주시는 주 예수 남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폭풍 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폭풍을 만나면 사람들은 자꾸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상대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환경에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는 우리 주님께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잔잔케 하시는 주님)

찾아오시는 주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폭풍을 잠잠케 하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문제의 답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다혈질적인 성격대로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고 명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합니다. 그 때 그는 무엇을 봅니까? 시선이 어디에 빼앗깁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바람을 봅니다. 그러자 바로 나타나는 마음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어지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어지고 무서움이 찾자 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집니다. 빠져 죽어가는 베드로를 붙잡습니다. 즉시 붙잡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폭풍만 바라보면 폭풍이 예수님보다 더 크게 보여 그곳에 빠져 죽습니다. 부드럽게 손을 붙잡으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외쳐야 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우리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폭풍 속에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 그 한 마디면 족합니다. 우리 주님 우리의 사정 다 아십니다. 주무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유령으로 착각하고 "만일 주시어든 "(28)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미 바다 체험을 세 번이나 한 사람입니다. 눅5:1-11에서 물고기 잡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 보았으나 그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를 말을 할 때 그 말씀 붙들고 그물을 던지지 그물이 찟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대도 만약신앙입니다.

마8:23-27을 보십시오. 폭풍을 잔잔케 하는 체험을 이미 한 사람입니다. 폭풍속에서 주무시던 주님께서 바람을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보며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만약신앙입니다. 만약에 부자가 되게 한다면 고아원을 짓겠습니다. 만약 주식이 오른다면 헌금을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 우리와 흥정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고 폭풍까지 주관하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십시오. 만약이 아닙니다. 주여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명도 내 재산도 내인생도 내 마음도 내 재능도 내 자녀도 내 명예도 내 지식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천지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폭풍을 만나면 잔잔케 하시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냥 주님에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우리 주님이 우리 인생의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폭풍을 잔잔케 하는 예수님인 줄 확신하고 그분에 베드로가 외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시는 순간, 우리의 손을 붙잡는 순간 순식간에 폭풍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살아질 것입니다.


3. 우리는 폭풍을 통하여 신앙을 성숙시키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성숙케 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폭풍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정선 카지노가다 사고 당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 순종하다가 어려움 당했습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님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니까 재촉하였습니다. 계속 독촉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어쩌면 밤에 행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주님 말씀대로 살려다 폭풍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요나 불순종 가운데 폭풍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순종 가운데 폭풍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갔지만 마라의 쓴물을 만났고, 요단강을 만났고 광야를 만났고 여리고성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창창대로가 열려야 할 텐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느냐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이런 폭풍을 주었습니까? 결국 우리는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폭풍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유령이라고 무서워 떤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고 이제 진정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전에 병을 났게 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것 특별하기는 하지만 선지자들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정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라는 신호입니다. 폭풍은 믿음의 테스트요, 성장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의 성숙한 신앙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을 사람낚는 어부 삼기 위해 불렀습니다. 그들이 훈련되어 성숙하지 않고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주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주님께서 쓰실 만한 성숙한 사람 만들기 위해 때로는 폭풍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폭풍 훈련의 과정을 통과한 베드로는 말년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성경을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데 광야라는 과정을 통과시켰는가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을 보십시오.
2절에서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 광야를 통과하게 했다고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은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광야를 통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 광야를 통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폭풍을 만납니다. 아브라함도 두 번이나 아내를 누리라고 속이는 폭풍, 자식들의 갈등,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요셉도,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폭풍 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주님을 평생 섬겼던 토플레디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4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청교도였는데, 얼마나 병을 많이 앓았던지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했답니다. 평생을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끝나지 않았답니다. 인생은 폭풍 속을 거니는 것과 같았지만 그는 찬양합니다. 찬송가 503장은 그가 지은 것입니다. 그는 노래합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인생의 폭풍이 있습니까?
문제는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이해 관계가 얽히면 얽힐수록 단순하고 원칙에 준하여 풀어야 합니다. 원칙을 벗어나면 편법이 되는 것이고 단순성을 잃어 버리면 트릭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놓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십시오. 믿음은 자기 확신도 아니고 신념화된 인생철학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환경에 집중하지 마시고, 자신과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마시고 오직 답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십시오. 예수님은 폭풍을 잔잔케 하시고 결국 그 폭풍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켜 마침내 복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해 주시길 것입니다. 시선을 분산하여 믿음의 길에서 패배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유한한 자신에게 시선 고정할 필요도, 변하는 환경에게 시선을 고정할 필요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어찌할 수없는 과거와, 자신의 실수나 남의 실수에 시선을 집중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시선을 빼앗으려는 것들로 즐비합니다. 밤에 거리를 나가면 시선을 빼앗고자 하는 간판들이 즐비하게 널렸습니다. 어두울수록 그것들은 명확하게 보여 시선을 유혹합니다. 간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각종 언론매체를 보아도 매일 시선을 빼앗고자하는 광고와 기사들어 널려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시청자와 독자의 시선을 빼앗아 자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습니다. 잘 못된 곳에 시선을 집중하면 결국 마음은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몸은 마음의 종이 되어 유혹자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오직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시는 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곳에 오셔서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시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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