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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시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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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3:2~4 
제목 :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주일 첫 절을 중심으로 살핀 시편 23편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이 시를 통해서 더운 여름철에 여러분의 영적 원기를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 절에는 하나님을 목자삼은 성도의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보살핌 속에 살아가는 양과 같은 성도의 만족이 표현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시편 23편 첫 절은 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신앙고백이요. 시편 23편 전부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의 시인들은 이지적이라기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 같습니다. 이야기를 차근히 논리적으로 풀어가기보다는 우선 가슴에 벅찬 결론적 신앙고백을 먼저 토설합니다. 결론은 먼저 말하고 나서야 왜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하나씩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도 예외가 아닙니다. 첫 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삼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첫 절에서 그는 시편 23편 전부의 대주제를 선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여호와를 목자삼은 이의 우렁찬 신앙고백이 먼저 터져 나온 다음에 2-4절에 그 고백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2절부터 4절을 중심으로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본문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목자의 인도하심을 두 경우로 나누어 살피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인도하심, 위기에서 인도하심. 해가 비치는 대낮에 펼치는 목자의 활동과 어두움이 짙은 밤에 돌보는 목자의 활동이 각각 노래되고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의 이야기라면 순풍에 돛달고 가는 평화로운 이야기가 먼저 펼쳐지고 풍랑 속에서 펼치는 선장의 필사적인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 셈입니다.

먼저 좋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일상적인 돌보심부터 하나씩 살펴봅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다윗은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양들에게 쉼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초장에 양들이 눕기 전에 양들은 먼저 배불리 먹어야만 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고백할 때는 이미 양들은 좋은 꼴로 배부른 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양떼는 결코 푸른 풀밭에 눕지를 않습니다. 우선 뜯어 먹습니다. 양껏 풀을 뜯어 먹은 다음에야 푸른 초장에 눕게 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라고 고백할 때에 다윗은 하나님의 양으로서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은 상태임을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모든 배고픔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오전 중 양껏 꼴을 뜯은 양떼를 정오에 목자는 푸른 초장으로 누이십니다. 적절한 때에 목자는 양들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십니다. 한껏 양떼들이 꼴을 뜯고 나면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간에 쉴만한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다윗이 경험한 여호와, 목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쉼은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합니다. 쉼이 없는 삶에, 참된 쉼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내어 맡기는 자는 쉼을 얻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자는 불안과 초조, 근심, 걱정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성도는 눕는 곳마다 거기가 푸른 초장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많은 대적의 흉계 속에서도 쉼을 얻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군을 이끌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의 위기 가운데서 뜻하지 않은 일들을 당할 때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로 인해서 흔들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신 후 목자는 양떼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이 물들은 천천히 흐르는 물이요 양떼들이 마시기에 편한 물입니다. 건강에 좋은 물이요 양떼들을 소생하게 하는 물입니다. 유쾌하게 하는 물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맛본 이들은 목자의 인도를 따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여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는 이 단어는 아침에 양떼들을 풀밭으로 인도할 때는 이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저녁 석양이 달릴 때 양떼들을 우리 속으로 인도해 갈 때는 이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정오에 양떼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때만 쓰는 단어 입니다. 우리는 목축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들이 발달되어 있지 않지요. 남반구의 따뜻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눈” “눈 내린다” 그러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눈이 있지요? 조용히 밤새 함박눈이 내리기도 하고 그 위에 싸락눈이 내리기도 하고 날씨가 좀 푸근해 지면 진눈깨비가 뿌린다.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 십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거기는 언제나 눈이니까 그 환경 속에서는 눈이 어떤 눈이 내렸는지를 표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단어들이 발달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풍족한 꼴로 배부른 양떼를 물가로 인도할 때 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말씀의 푸른 풀과 아울러 성령의 감화와 은혜의 시냇가를 연상합니다. 섭리 가운데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셔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그의 사랑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여러분 개개인의 신앙여정을 돌아보십시오. 지난 수요일 날 구역장들 모여서 울산교회에 대해서 감사할 만한 것 자랑할 만한 것 있는 지 썼더니 많은 분들이 말씀에 대해서, 풍성한 말씀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이야기를 써놓은 것을 봤습니다. 또 우리 부교역자들 마다 좋은 말씀으로 인도할 수 있어서 그것도 감사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에도 우리의 발걸음을 선히 인도하셨습니다. 풍족한 양식으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목마르고 지친 우리의 발걸음을 쉴만한 물가로 지금도 인도하십니다. 미리 예비된 쉼을 통해서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3절에서 고백하는 축복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지친 자에게 원기를 회복시키십니다. 병든 자의 상처를 싸 메어 주십니다. 곤한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친히 목자로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웃 여러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보내주셨습니다. 목자의 배려와 인도하심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관심과 기쁨과 만족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오아시스는 나그네의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비된 곳입니다. 축복된 쉼의 장소는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현명한 순례자는 오아시스에서 여장을 다 풀고 정주하지 않습니다. 원기를 회복하는 대로 다음 여정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현명한 성도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여기다가 복산동 459-4번지에다가 말뚝을 박지 않습니다.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원기를 회복하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질 다음 일을 위해서 우리는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생명 사랑 나눔의 신앙 공동체 울산교회는 우리끼리 즐기면서 언제까지나 머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얻는 힘으로 우리 주위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서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살려달라는 자기 자녀를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소식을 우리는 접했습니다. 저는 뉴스를 듣지 못하고 어떤 분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는 제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치 울산에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 정말 제가 긴장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인천광역시에서 일이 일어났더라고요. 울산광역시 백만 시민 가운데도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울산교회는 울산에서 제일 큰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 할 것 없이 제일 많은 사람들이 등록되고 매주 출석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새가족이나, 다니다가 낙심한 사람 외에 정식으로 현재 등록되어 있는 액티브한 멤버들만 이야기를 해서 아이들까지 합하면 사천구백구십여명 해서 거의 오천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 육만, 칠만 이야기 하는데 기독교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우리 울산교회 멤버입니다. 그리고 울산교회는 교회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울산광역시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가 십분의 일의 일을 담당해야 되는 책임이 우리 어깨에 있습니다. 울산광역시에 사는 사람들이 생의 절망적 순간에 마지막 소망을 걸고 찾아오는 피난처가 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끼리 좋은 교회 울산교회를 말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앙 공동체로 자리잡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체험 했습니다. 성령의 나눔을 경험한 울산교회 성도들은 마땅히 세상에 살기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치는 신앙 공동체로서 우뚝 서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이 칭송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 다행히 연초부터 시작한 어린이 공부방에 이어서 청소년 공부방(중 고등학생)을 개설하도록 한화그룹이 월드비전을 통해서 지원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8월 한 달 준비해서 9월부터 청소년 공부방과 대안학교를 시작도록 당회원 수련회에서는 공간을 제공하고 기본시설을 지원하기로 논의를 했습니다.

교육관 한 층을 이용해서 오전시간에는 학교를 포기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대안학교를 시작하고 오후에는 학교를 다니지만 집에서 제대로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청소년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공부방을 할 것입니다. 이런 선한 일에 하늘 은혜를 체험한 여러분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한화가 천이백만원, 월드비전이 얼마, 또 다른데서 이렇게 해서 이천사백만원 후원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다행이 우리 울산교회 어린이 공부방 소식을 그쪽에서도 듣고 있었고 또 꿈이 자라는 책마을 소식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일 하고 있으니까 함께 하겠다고, 처음에는 한화 회사가 남구에 있으니까 남구에서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고 우리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우리 울산교회는 중구에만 속해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울산광역시 전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작은 목자노릇을 한다면 신앙생활이 우리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딱한 처지에 있는 우리 이웃들에게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학교 3학년 졸업하면서 가정형편이 도무지 되지 않아서 고등학교 가는 것 포기했습니다. 저,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면 제가 거기에 승산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안 되니까 급사 생활 하는 겁니다. 그런데 1년 만에 아무래도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서울로 올라가서 검정고시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사람들이 많데요. 차비가 없어서 상당한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제가 사람들 보면서 그런 기대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분들 중에서 나한테 조금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없는가.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한테는 별게 아닙니다. 그러나 받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니 무슨 돈이 아니라 난 널 지켜보고 있다. 희망이 있다 그렇게 말 한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정말 힘들었을 때에 얼마나 그것이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의 수준을 떨어뜨리라고 지금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먹으려고 하는 그 피자를 뚝 잘라서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 그렇게 까지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상에서부터 떨어지는 그 부스러기라도 좀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으고 있는 옥수수의 의미고 어린양 저금통의 의미 입니다.

저처럼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돈 벌은들 몇 억씩 내어놓으면서 무슨 복지재단 설립하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나한테 주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옥수수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 하나 모을 때 나는 두개라도 모으자 그렇게 해서 도와보자. 조금 도우는 것도 나한테는 조금이지만 이것이 정말 구재로 쓰여 질 때는 한 아이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장학금이 될 수도 있고 격려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능하다면 조금만 우리가 생각하면 훨씬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문득 문득 목사 되길 참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나는 기질적으로 혁명가의 기질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선죽교에서 죽은 정 아무개 하고 맥이 좀 닿는 것 같더라고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0평짜리 방만 있어도 모자 센터를 얼마든지 세울 수 있는데, 그걸 짓는데 싸게 지으면 100만원 150만원이면 지을 수 있는 그런 집들 열채 열다섯 채만 있으면, 열다섯 가구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한숨을 덜어줄 수 있는데 요즘 세상에서는 평당 천만원 넘는 아파트를 지어서 자기들끼리 수위 세우고 그 안에 모든 좋은 시설 다 갖추어놓고 산다고 하면 누가 나보고 찾아와서 “목사님 저거 그냥 가만 두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래서 안된다” 그런말 잘 안나올 것 같아요. 나도 목사만 아니라면 너보다 먼저가서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다행이 목사가 되어서 참 다행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쓰나? 기도하면서 우리 끼리라도 힘을 모아서 정말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한번 도와보자” 그렇게 말할 여유가 생긴거죠.

오늘처럼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신앙의 순례자들이 원기를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잠시 원기를 회복한 다음 다시금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공동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은혜 받으면 그 은혜로 우리끼리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워진 심령가지고 어려워진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만 사랑의 눈길로 쳐다봐도 그렇게 엄청난 비극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며, 지칠 때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데는 주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이름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아가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이라도 세상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 다르다는 사람들이 인식을 가졌다면 11층에서 뛰어 내리기 전에 분명히 거기서 보면 밤마다 볼 수 있는 그 십자가의 네온사인을 보고 거기 마지막 희망을 두지 아니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목자의 배려와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날 누구엔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은혜 받은 자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자라고 하면 그렇게 코너로 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손을 내미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일이 불교, 천주교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저는 예수사랑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는 오늘 여러분과 제가 해야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의의 길을 향한 인도를 받기 위해서 오늘 말씀 있는 자리에 나와서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그것은 순례길 곳곳에 펼칠 다음 사역을 향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밥, 왜 먹습니까? 배고파 먹는 것 맞지요? 밥 먹고 힘 얻으면 무엇 합니까? 뒹굴뒹굴하고 네 시간 기다릴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나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왜 왔습니까? 왜 예배드립니까? 말씀 듣고 힘 얻으면 나가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돌아오면서 어깨 한번만 두드려 줘도 삶이 달라질 수 있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선생님들 많은 것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아주 소중한 자리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나보고 책 좋아한다고 “너 책벌fp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는 제가 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의 격려가 얼마나 많은 인생을 바꾸어 놓는지 모릅니다.

그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의의 길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길입니다.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사역들입니다. 당신의 나타내신 성품에 전적으로 어울리는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참 울산교회 하는 일들 보니까 정말 멋있네, 잘하네, 사람들이 그렇게 칭송 할 수 있도록 저는 반드시 우리 울산교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우리는 변해가고 있습니까? 아침 여덟시 예배에도 아주 성도들 많이 나왔어요. 열시 예배 오늘 이 시간 못지않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열두시 예배에도 이렇게 분산되어서 주차장에서 소식을 들려오는데 훨씬 쉬워졌다고 그럽니다. 함께 목표가 정해지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울산교회는 울산 사회의 소금과 빛의 사역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은 주님이 지정하신 의의 길을 기운차게 걷기 위해서 입니다. 이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계획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으로 기뻐합시다. 더 이상 방황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고 목자의 배려, 관심과 사랑, 회복과 만족이 있는 곳에 우리를 부르심은 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거든요. 저는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아무리 손가락질하고 짓밟고 욕해도 저는 감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내 인생에 손 내밀지 아니했더라면 정말 그렇게 짓밟혀도 아무런 항변조차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살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므로 우린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를 버려두시질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소중합니다. 우리가 방활 할 때에, 우리가 엉뚱한 길로 갈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목자 되신 당신의 이름이 거기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구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설정하신 그 목표를 향해서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실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헤매기만 잘하는 자신을 보고만 있지 마십시오. 저도 어떤 때는 제 자신을 생각하면 나 자신도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대해서 피 흘리셨고 나를 지금도 사랑하시고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는 주님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나도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리라. 누가 내게 무어라고 말해도 나는 주의 사랑받은 자녀이며, 나는 주의 선택받은 일꾼이라는 이 기본 진리를 나는 잊어버리지 아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을 향해서 뭐라고 말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생각해도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울 때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두신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속 실패의 길을 헤맬 때에도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당신이 원하시는 수준의 신자, 수준의 교회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교회로 우리 만들어 갑시다.

실망되는 자신의 모습과 한심스런 공동체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운 순간에도 성도들의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성도의 마지막 의지처 -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살펴보아도 소망이 없지만 우리에게 두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전능 하신 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전능하신 분 그분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우리는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에 성도는 그러기에 자신을 내 던지기 전에 11층에서 아래로 던지기 전에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품안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천한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마” “내가 너를 도우마”라고 찾아오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주의 백성들입니다. 신자의 삶에도 환란은 있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이 신자의 삶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자가 아니라 그때는 우리 주님의 은혜의 품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당신의 영광스런 이름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희망이 없었던 제 삶에 소망을 주신 분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지만 우리에게 두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개입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건 활동의 결과로 우리는 항상 의의 길로 인도됩니다.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목자께서 당신의 의로운 이름을 걸고 당신의 뜻하신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 목자의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어릴 때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동네에서 조금 개막나니 짓 하면 동네 사람들이 누구 욕합니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불러서 “누구 자식”이라고 그러지요? 세상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거든요. 하물며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 이름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선한 목자께서는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만 아니라 생의 위기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가서 주십니다. 한 걸음 가까이 와 주시고 이전보다 더욱 경계와 보호의 손을 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 위기에서 돌보시는 목자의 활동을 봅시다. 양떼들 위에는 항상 정오의 햇빛만 비취지 않습니다. 황금빛 햇살만이 양떼들 위에 머물지 않습니다. 석양이 떨어지고 나면 어두움이 온 누리에 내리덮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로”# 다니는 경우도 때대로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여호와를 목자로 신뢰하는 성도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자의 특별한 돌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 양 이야기를 하니까 ‘안 키워 봐서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비유를 바꾸어서 우리 어미닭과 병아리를 한번 보십시오. 구구구구 하면서 새끼들에게 모이 쪼아 먹으라고 하다가 위가가 닥치면 갑자기 불러 모읍니다. 새끼들을 날개아래 불러 모으는 그 어미닭 보셨습니까? 미물도 새끼를 그렇게 보호하시거든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위기에 우리를 내몰라라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어린 아이들 손잡고 길 걷다가, 손자 손녀 손잡고 가다가 길에 물이 있고, 돌이 많고 미끄러져서 넘어질 것 같으면 여러분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해지죠? 미끌~ 하고 넘어진 다 싶으면 확실하게 붙들어 주지요? 우리 하나님이 생의 위기에서 여러분을 미끄러지는 대로 포기 하시는 분 같으면 나는 여러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때 우리를 덥석 품에 안으시는 분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우리를 안고 난관을 통과하게 해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평소에 주님을 잘 믿었으면 그때는 주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보험이나 적금 넣는 사람 보십시오. 위기가 닥치면 넣었던 적금에서 도움 받고 보험에서 도움 받지 않습니까? 세상의 기업도 자기 맴버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돌보아 주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봐주지 않으면 차라리 주일날 하는 헌금 가지고 적금 들지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 합니까? 저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55년 인생 살면서 저는 체험해 보았습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에서 위안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위안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임종의 순간에 이 구절 붙들고 마지막 대적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양떼들은 항상 맹수의 위협 속에 살아갑니다. 양떼라고 하는 것은 사나운 짐승에게 언제든지 밥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허나 칠흑 같은 어두움이 덮인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그 위험이 훨씬 더 커집니다. 그러나 생사를 같이 하는 목자를 신뢰하는 양떼들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대 목자 되신 우리 구주께서는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그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목자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생의 어떠한 곤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호와를 목자로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여호와를 목자로 신뢰하십니까? 여러분은 여호와를 목자로 체험하십시오. 특히 어둠이 짙은 환난의 시간에 복된 함께함을 맛보실 것입니다. 평소에 여러분을 잡고 가시던 그 분께서 여러분을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극한 위험 속에서도 생명이 위협당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비밀은 전능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같이 이 구절을 외워 봅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진리를 신뢰하는 신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삶에 마지막 소망의 줄이 끊어진 것 같은 순간에도 성도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 갈 때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도 빛의 노래를 노래하는 자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 우리는 여기 골짜기를 통과 해가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메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우리는 어두움 저편에 있는 환한 곳을 내어다 보면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 그가 신자입니다.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 거기가 바로 온갖 대적에 의해서 둘러 쌓였을 그때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대책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주께서 함께하심이라는 승리의 노래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신앙인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사망에게 삼키우지 않습니다. 다만 성도는 여느 인생처럼 죽지 않습니다. 다만 영광 중에 깨어나기 위해 잠드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시골 살았던 것을 참 요즘 성경 보면서 늘 감사해요. 시골 경험이 있어야 성경이 잘 풀리더라고요.

나는 어린 시절에 여름 되면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 펴놓고 동네 어른들, 식구들 이야기 하면 우리 눈에 졸음이 온다는 것을 알면 어머니는 들어가 자라 그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떠납니다. 오히려 가라 그러면 어머니 무릎 베고 눕습니다. 그 다음 순간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눈을 떠보니까 방안이더라고요. 매일 아침 나는 경험을 했지만 눈 떠보면 거의가 방안이었어요. 찬 이슬 맞는 멍석 위에서가 아니라 눈 떳을 때는 방안이라는 사실, 언젠가 내가 세상에서 눈을 감게 되겠지만 나는 눈 뜨게 될 때 거기가 아버지의 집이 되리라는 소망이 분명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모든 것을 거신 영광의 주님이 나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주께서 나를 바라보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은 지금부터 초조해 할 수 있는, 지금부터 그 순간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뿌리를 내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저기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에 여러분과 저가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가는 그 순례길 좌우에는 비참한 사람들이 많이 널부러져 있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다고 하늘의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심정을 그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 순례의 길 걸을 때에 오늘 받은 은혜로서 엿세 동안 주님 나타내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만 합니다.

사망의 그림자,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의 그림자라도 그림자는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맹수의 그림자라도 그림자는 우리를 물 수가 없습니다. 사망의 그림자, 그것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믿음의 길을 출발하는 이웃 여러분, 죽음의 그늘이 짙어 질 때에도 생명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사망이 다시는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명의 주께서 나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는 주님의 생명은 사망을 이기고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저의 생이 다하는 순간 사망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덮칠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비상한 임재하심을 즐깁시다. 부끄럼 없이 신실하게 성도의 길을 걷는 자는 축복된 임재하심을 맛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위기 그때는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주님의 그 포옹을 받을 차례입니다.

여호와를 목자삼은 신자는 사는 동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것은 채찍이 아니라 우리를 안위하시는 방편입니다. 물론 꼭 말 안 들으면 막대기 가지고 바로 가도록 우리를 치실 수 있지요. 때로는 우리가 엉뚱한 길로 가서 나락에 떨어지면 굽은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은혜로운 돌보심이 보장 된 성도의 삶은 햇빛난 대낮뿐만 아니라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도 동일한 위안과 임재를 경험합니다. 돈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다. 자기도 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붙잡고 눈물로 기도해주면 거기서 더 감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에 입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 삶에, 그 신앙 여정의 낮과 밤에 목자의 인도하심이 언제나 함께 하길 빕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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