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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영광 / 엡 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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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엡2 : 11 -22절
제 목 : 성도의 영광

고전15:1-2절 [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고 합니다.
그럼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내게 구원을 안겨다 준 기쁜 소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하여 졌고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성도에게 주어진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신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주경가 <헨드릭슨>은 제목을 말하기를
[ 영광스러운 교회 ] 라고 합니다.
물론 본문말씀에는 교회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말씀은 영광스러운 교회
또는 영광스러운 성도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영광스럽다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가장 귀하고 가장 영광스러우냐?
그것은 독생자 아들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이요
또한 기능적인 면에서도
엡1:23절에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 ] 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완전케 하시는데 교회를 통하여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약하거나 병들면
세상도 약해지고 병든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될 때 세상도 건강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럼 왜 성도가 영광스럽고
즉 성도의 영광스러운 신분이 무엇입니까?

15,16절에 [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 고 합니다. <2>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는 엡2:1절에 [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들 ] 이었습니다.
혹 죽었던 너희들 하니? 죽긴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 있는데 하시겠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다 죽은 상태입니다.
저는 이것을 밑둥치가 잘려 나간 나무에 비유합니다.
밑둥치가 잘려 나가도 얼마동안은 싹이 나고 봉우리 활짝 핍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유한한 것입니다.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금 사업 잘되고 아무 일 없다고 살아 있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자만이 살아있는 자입니다.

본래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화목제사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칭의라고도 하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정의를 내려보면
복음도 구원도 복도 다 하나님과 바른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케 되면
구원도 복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복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사 모든 불행과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 단절에서 온다는 것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그려보세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늘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나눌 수 있습니다. 베풀 수 있습니다. 꾸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한하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유한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욕심부리고 뺏으려고 하고 싸움하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한정되니 양보할 수 없습니다. 먼저 차지해야 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 라고 합니다
선진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심성. 그리 곱게 보지 않습니다
예의도 없고 친절도 모르고 특히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나라 그것도 반동 이가 난 좁은 땅 덩어리에
4600만 인구가 사니 늦게 줄 서면 자기 몫이 없습니다.
그러니 새치기라도 해야 하고 빨리 빨리 하다 보니 <3>
국민성이 약고 거칠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나 중국 가보세요 빨리 빨리 가 없어요
역에서나 공항에서 하루 밤 기다리는 것 보통입니다.
왜? 넓으니깐 늦게 일어나도 남는게 땅입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조선족들이 쓰는 말 가운데
무슨 부탁을 했는데 [ 일이 바쁘게 되었다 ] 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 이 사람이 일을 빨리 처리해 가지고 잘 되었구나 싶은데
그 정 반대인 것 있지요. 일이 안되면 바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쁜 것 좋아할 것 못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안 바삐도 내 몫뿐만이 아니라
베풀고 꾸어 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과 화목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과 화목된 것을 감사하고 감격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까?
본래 우리가 그런 입장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선배 목사님이 하는 말이
대구에 미꾸라지 용된 목사 두 사람이 있는데
저 동쪽에 누구하고 서쪽에 내일교회 김 목사다 한답니다.
저 미꾸라지 용된 사람 맞습니다. 맞고요.
어찌 저 뿐이겠습니까?
제가 보니 우리 모두가 다 미꾸라지 용된 사람들입니다.
성경 보세요.
엡2:1절 [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 ]을 예수 믿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11절 [ 너희는 그때에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던 자들이라 ] 12절 [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한마디로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는 괄호 밖의 사람이요
희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과 화목 되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축복 안에 들어온 자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함은
적어도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어다 는 말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는 말은 선민으로서의 특권도 갖지 못했다는 말이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말은 <4>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밖에 있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괄호 밖에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으니 축복 중에 축복이요 기적 중에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 괄호 밖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된 자들이 되었는가?

13절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14절에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 ] 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입니다.
15절에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심으로
[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 ] 고 합니다.
즉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바로 하나님과 화목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화해의 복음에 눈이 뜨여져야겠습니다.
세계에 대한민국만큼 갈등이 많은 나라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남북의 이념 갈등,
동서 지역감정, 혈연, 지연, 학연에 따른 패거리 짓기
수구와 진보의 갈등, 사회 계층간의 갈등
우리 민족만큼 갈등을 극단화하는 데는 월등하고
그러나 해소하는 데는 부족한 민족도 드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문화는 그렇다 하더라도 복음은 화해의 복음이 되어야 하는데
복음이 한국교회에 들어올 때 구원의 복음, 칭의의 복음은 강조되었지만 화해의 복음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여
사회나 교회나 패거리 짓는데는 그게 그겁니다. <5>
서울에 가보면 구로구 영등포구는 국회의원만 전라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전라도 목사가 되어야 하고 전라도 세가 월등합니다. 그런데 서초구 송파구에 가보면 그 반대인 것 있지요.
서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어느 장례식에 갔는데
그 교회는 의성 출신 모씨가 아니면 장로도 못되고
직분자가 되어도 교회에 발을 못 붙인다고 해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에 눈이 뜨여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남북화해 동서화해 혈연화해를 도모해야할
역사적 과제를 앉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화해가 어찌 정치가들의 협상과 조정으로만 이루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구원을
화해의 범주로 해석하여 선포하고
우리가 화해의 복음에 따라 화해의 삶을 살 때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해는 우리 민족 안에만 화해가 아닙니다.
골1:20절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이 복음은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까지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복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교에 대해서도
화해의 복음의 차원에서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고후5:18-19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사
화목케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 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해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선교란 무엇인냐?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직책을 오늘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5:9절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
이 말을 단순히 중간에 싸움 말리는 자 정도로 받아 드리지 말고
세상을 향해 선교적 책임을 다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드려져야 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오셔서 먼 데 있는 자들이나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화해의 복음을 전하셨습니까? <6>
5. 성도의 영광의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17,18절)
18절에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 둘이 라는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를 말하는데
성령 안에서 모두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일년에 단 한차례씩 대제장 만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옷에 방울을 달고 들어갔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 불경하여 죽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딸랑 딸랑, 나 지금 살아서 대제사장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밖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택한 대제사장 외에는 감히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마는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갈라지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하나님 알에 나아갈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히4:16절에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특권 중에 특권이요 축복 중에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만이 하나님의 풍요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누리는 은혜를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잔치집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5:에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용서하신 것만이 아니라 풍요로운 잔치를 베푸시고
예복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풍악을 울리는 풍요와 기쁨과 사랑의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내일교회 잔치 집 같은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잔치 집 하면 제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 총회 선교회 선교지 방문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제가 월남 참전용사인데 32년만에 방문했어요.
호치민 시에 가보니 변해서 몰라보겠어요.
그런데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하니 청사 앞 낡은 건물이 하나있는데 기억나요
미군 전용 뷔페식당이었는데 저희들은 기수단 행사병 이어서
거기서 무료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뷔페 식당에 갔을 때 차려 놓은 음식을 보고 <7>
전쟁 중인데도 세상에 이런 음식들도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풍성하고 신기한데 열 친구를 보니 입이 떡 벌어지는 것 있지요.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23:5절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살아가다가 혹 주림과 부족함을 느끼거든 사람에게 구걸하지 말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잔치집의 특징 가운데 한가지,
꼭 혼주의 인사말 가운데
오늘 마음껏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지요
입이 떡 벌어지고 내 잔이 넘치는
잔치집에 마음껏 드시고 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면
우리가 누리는 영광된 신분이 또 있습니다.

19절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괄호 밖에 사람이 아니라
[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삶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집 떠난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께 하는 말이 눅15:21절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게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하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
[ 야가 지금 무슨 말하노?
바라 그 제일 좋은 옷하고 손에 가락지하고 발에 신 안 신기고 뭐하노? 내 아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하고
덩실, 덩실 춤을 추시는 아버지입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에 눈이 뜨여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회복하면
우리의 삶이 회복되어진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신학에 의하면 <8>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여섯 가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 얼굴에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2) 하늘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어두움의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3) 아담의 장대한 키가 작아졌다.
이것은 인간이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나무의 열매를 잃었다. 5) 땅의 열매를 잃었다.
나무의 열매 땅의 열매를 잃었다는 것은
인간이 결핍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랍비들은 우리가 본 적이 있는 그림인데
아담의 타락 전 낙원에서의 포도를 장정들이 들 수 없는 정도로
큰 것으로 그렸습니다.
6) 영생을 잃었다.
물론 성경은 아닙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이런 무능력과 부족과 결핍에서
삶이 회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마치 삼하9장에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서 먹듯이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먹는 것도 풍성했습니다.
왜 풍성한 줄 아십니까?
아버지의 주신 것으로 가족이니깐 나눠먹기 때문입니다.
유무 상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 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키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
교회만이 나타낼 수 있는 잔치의 맛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으로 풍성해 질 줄 믿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는 초대교회의 맛입니다.

성도에게 또 한가지의 영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9>
20-22절에 보면
[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사 그 위에 지어진 성전으로써
하나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신학적으로는 함께 지어져 가는 연합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그러나 연합성전은 신약적인 성전 즉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대신하여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라틴어 가운데 노블레스 오불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독서계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은 책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의 유명한 로마인의 이야기에 보면
지성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어떻게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을까. 나나미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걸맞게 의무를 다한 것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부족한 재정을 부유한 계층이 내는 돈으로 충당했고
귀족들은 전쟁터에서 늘 평민보다 먼저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제 전통은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솔선해서 국가를 위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부(富)를 환원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오늘 교회가 성도의 영광에 눈이 뜨여진다면
우리가 누리는 특권만큼이나 책임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책임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선교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입니다.
앞장서서 이 책임을 다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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